레프 톨스토이 · 안나 카레니나 · 1877

제2부 제12장

거절당한 기억에 몸을 움찔하는 레빈
거절당한 기억에 몸을 움찔하는 레빈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처음 얼마 동안만 해도 레빈은 거절당한 치욕을 떠올릴 때마다 몸을 움찔하고 얼굴을 붉히면서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물리학에서 낙제점을 받아 유급되었을 때에도,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며 똑같이 얼굴을 붉히고 몸을 떨었지. 누이가 내게 맡긴 일을 망쳤을 때에도 내 인생이 끝난 것처럼 여겼고.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여러 해가 지나고 나니, 내가 그런 일로 어떻게 그토록 괴로워했는지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이번 슬픔도 똑같을 거야. 시간이 지나면 아무렇지도 않게 될 거다.’

그러나 석 달이 지났는데도 그는 아무렇지 않아지지 않았다. 첫날들과 마찬가지로 그 일을 떠올리는 것은 여전히 고통스러웠다.

그가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는 것은, 그토록 오래 가정생활을 꿈꾸었고 자신이 이미 결혼할 만큼 충분히 성숙했다고 깊이 느꼈으면서도, 여전히 결혼하지 못한 채 이제는 그 어느 때보다 결혼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이었다. 그의 주위 사람 모두가 느끼듯, 그 자신도 자기 나이의 남자가 혼자 산다는 것은 좋지 않다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느꼈다.

모스크바로 떠나기 전, 그는 말하기 좋아하는 순박한 농부이자 자기 집의 가축지기 니콜라이에게 한번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어때, 니콜라이! 나 결혼하려고 하네.”

그러자 니콜라이는 의심할 여지가 전혀 없는 일에 대답하는 사람처럼 즉시 말했다.

“진작에 그러셨어야지요, 콘스탄틴 드미트리치.”

그러나 이제 결혼은 그 어느 때보다 멀리 물러나 있었다. 그 자리는 이미 한 사람이 차지하고 있었고, 이제 레빈이 아는 처녀들 가운데 누구라도 상상 속에서 그 자리에 세워보면, 그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거절당했던 순간과 그때 자신이 맡았던 역할을 회상하면 수치심 때문에 괴로웠다. 자기는 그 일에 아무 잘못도 없다고 아무리 되뇌어도, 그 기억은 과거의 다른 수치스러운 기억들과 마찬가지로 그를 움찔하게 하고 얼굴을 붉히게 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그의 과거에도 자기 스스로 나쁘다고 인정하는 행동들이 있었고, 양심이라면 오히려 그런 일 때문에 그를 괴롭혔어야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나쁜 행동에 대한 기억은 이런 보잘것없지만 수치스러운 기억만큼 그를 괴롭히지 않았다. 이런 상처는 좀처럼 아물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그런 기억들 옆에는, 키티에게 거절당한 일과 그날 저녁 다른 사람들 눈에 자기가 얼마나 가련하게 보였을까 하는 기억까지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과 일은 자기 몫을 했다. 무거운 기억들은 눈에 띄지는 않으나 중요하기 이를 데 없는 시골 생활의 사건들에 조금씩 덮여갔다. 주가 바뀔수록 레빈은 키티를 떠올리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그는 키티가 이미 결혼했거나 곧 결혼한다는 소식을 초조할 만큼 기다렸다. 이를 뽑아버리면 앓던 이가 단번에 끝나듯, 그런 소식을 들으면 자기 병도 완전히 낫게 되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는 동안 봄이 왔다. 기다리게도 속이지도 않고 한꺼번에 온, 식물과 짐승과 사람이 함께 기뻐하는 드문 봄 가운데 하나인 아름답고 온전한 봄이었다.

이 아름다운 봄은 레빈을 더욱 들뜨게 했고, 지난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의 고독한 삶을 굳건하고 독립적으로 세우겠다는 결심을 더욱 확고하게 해주었다. 시골로 돌아오며 세웠던 여러 계획 가운데 많은 것을 아직 실행하지 못했으나, 가장 중요한 것, 삶을 깨끗하게 지키겠다는 계획만큼은 지켜왔다. 그는 잘못을 저지른 뒤면 늘 자기를 괴롭히던 부끄러움을 느낄 일이 없었고, 사람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2월에는 마리야 니콜라예브나에게서 형 니콜라이의 건강이 더 나빠지고 있지만 그가 치료받기를 거부한다는 편지를 받았다. 그래서 레빈은 모스크바에 가 형을 찾아갔고, 끝내 의사의 진찰을 받고 외국의 광천지로 떠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형을 화나게 하지 않으면서도 여행비를 빌려주는 데까지 뜻대로 해낸 것이 레빈은 만족스러웠다.

봄이면 각별한 주의를 요구하는 농장 일과 독서에 더해, 레빈은 그해 겨울 농업에 관한 글도 쓰기 시작했다. 그의 구상은 농업에서 노동자의 성격을 기후와 토양처럼 하나의 절대적이고 주어진 조건으로 보아야 하며, 따라서 농학의 모든 명제를 오직 토양과 기후의 자료에서만 끌어낼 것이 아니라, 토양과 기후와 더불어 일정하고 변하지 않는 노동자의 성격이라는 자료에서도 끌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홀로 지내고 있었음에도, 아니 어쩌면 혼자였기 때문에 그의 생활은 대단히 충만했다. 다만 이따금 머릿속을 떠도는 생각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다는 채워지지 않는 욕구를 느꼈는데, 아가피야 미하일로브나 말고는 그 말을 들어줄 사람이 없었다. 레빈은 그녀와도 물리학이나 농업 이론, 그리고 특히 철학을 놓고 적잖이 토론하곤 했다. 철학은 아가피야 미하일로브나가 무엇보다 좋아하는 주제였다.

봄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순절 마지막 몇 주 동안에는 맑고 얼어붙을 듯한 날씨가 계속됐다. 낮이면 햇볕 아래 녹았다가 밤이면 기온이 영하 일곱 도까지 내려갔다. 눈 표면이 단단히 얼어 길이 아닌 곳으로도 썰매가 다닐 수 있을 정도였다. 부활절에도 눈이 남아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부활절 이튿날 따뜻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구름이 밀려오더니 사흘 낮 사흘 밤 동안 거칠고 따뜻한 비가 쏟아졌다. 목요일이 되자 바람이 그치고 짙은 잿빛 안개가 밀려와, 자연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비밀을 감추려는 듯 세상을 덮었다. 안개 속에서 물길이 흘러내렸고, 얼음장이 갈라지고 움직이기 시작했으며, 흐리고 거품 이는 물살은 더 빠르게 달렸다. 마침내 봄맞이 절기인 크라스나야 고르카 바로 전날 저녁, 안개가 찢어지고 구름이 양 떼처럼 흩어져 하늘이 맑아지면서 진짜 봄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음 날 아침 솟아오른 밝은 태양은 물 위에 얇게 언 얼음을 순식간에 먹어치웠고, 되살아난 땅에서 피어오르는 수증기로 따뜻한 공기 전체가 떨리는 듯했다. 묵은 풀은 초록빛을 되찾고 어린 풀은 바늘처럼 땅을 뚫고 올라왔다. 가막살나무와 건포도나무와 끈적한 수액을 머금은 자작나무의 눈이 부풀었고, 금빛 햇살을 뒤집어쓴 버드나무에서는 겨울을 난 벌이 날개를 풀며 윙윙거렸다.

보이지 않는 종달새들은 벨벳 같은 푸른 들과 얼음 낀 그루터기밭 위에서 노래를 터뜨렸고, 댕기물떼새들은 치우지 못한 갈색 물이 가득 찬 낮은 땅과 늪지 위에서 애처롭게 울었다. 높은 하늘로는 두루미와 기러기 떼가 봄의 울음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겨우내 털이 빠져 아직 얼룩덜룩한 가축들이 목장에 나와 울어댔고, 구불구불한 다리를 가진 어린 양들은 털갈이를 하며 우는 어미들 주위에서 뛰놀았다. 발 빠른 아이들은 맨발 자국이 찍힌 마르기 시작한 길 위를 달렸다. 연못에서는 아마포를 헹구는 여자들의 명랑한 목소리가 울렸고, 마당마다 쟁기와 써레를 손보는 농부들의 도끼 소리가 쾅쾅 울렸다.

진짜 봄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