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 / 제6권 1808~1810년 / 제24장
《전쟁과 평화》 · 제6권 1808~1810년

제24장

《전쟁과 평화》 제6권 24장 삽화

정식 약혼식은 열리지 않았고 나타샤와 볼콘스키의 약혼도 발표하지 않았다. 안드레이 공작이 그렇게 하자고 고집했다. 결혼이 미뤄진 데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으니 모든 부담도 자신이 져야 한다고 말했다. 자신은 약속으로 영원히 묶였지만 나타샤를 구속하고 싶지 않으며 그녀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겠다고 했다. 6개월 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끼면 나타샤는 얼마든지 거절할 권리가 있었다. 당연히 나타샤도 부모도 그런 말은 듣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안드레이 공작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날마다 로스토프 집을 찾아왔지만 나타샤를 약혼녀처럼 대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반말하지 않고 존댓말을 썼으며 손에만 입을 맞추었다. 약혼 뒤 두 사람 사이에는 이전과 전혀 다른 친밀하고 자연스러운 관계가 생겨났다. 마치 지금까지는 서로를 알지 못했던 듯했다. 아직 서로에게 *아무것도* 아니었을 때 상대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회상하기를 둘 다 좋아했다. 이제 자신들이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었다고 느꼈다. 그때는 꾸며 냈지만 지금은 자연스럽고 진실했다. 처음에는 가족들도 안드레이 공작을 대할 때 다소 불편해했다. 그는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처럼 보였다. 나타샤는 오랫동안 가족들이 그에게 익숙해지도록 애썼다. 안드레이 공작은 겉보기에만 다를 뿐 실은 자신들과 똑같은 사람이고, 자신도 그를 두려워하지 않으니 다른 누구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자랑스럽게 모두에게 장담했다. 며칠 뒤 가족들은 그에게 익숙해졌고, 그가 있어도 거리낌 없이 평소의 생활을 이어 갔다. 안드레이 공작도 그 생활에 참여했다. 백작과는 영지 경영에 관해, 백작부인과 나타샤와는 유행에 관해, 소냐와는 앨범과 수예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었다. 이 모든 일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런 일을 예고한 징조가 얼마나 뚜렷했는지를 가족들이 자기들끼리, 때로는 안드레이 공작 앞에서도 놀라워했다. 안드레이 공작이 오트라드노예에 찾아온 일, 로스토프 가족이 페테르부르크에 온 일, 유모가 그의 첫 방문 때 알아본 나타샤와 안드레이 공작의 닮은 점, 1805년 안드레이와 니콜라이가 만난 일 등 수많은 사건이 이 일이 반드시 일어나리라고 예고했던 듯했다.

집 안에는 약혼한 두 사람이 있을 때 언제나 따라오는 시적이면서도 무료한 고요가 감돌았다. 흔히 모두 함께 앉아 있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때로 다른 사람들이 일어나 나가고 두 사람만 남아도 여전히 침묵했다. 두 사람은 미래의 생활에 관해 좀처럼 말하지 않았다. 안드레이 공작은 그 이야기를 하기가 두렵고 부끄러웠다. 그의 감정을 끊임없이 알아차리는 나타샤도 똑같은 기분을 느꼈다. 한번은 나타샤가 그의 아들에 관해 묻기 시작했다. 안드레이 공작은 이제 흔히 그랬듯 얼굴을 붉혔고(나타샤는 그의 그런 모습을 특히 좋아했다), 아들이 자신들과 함께 살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왜요?” 나타샤가 두려운 목소리로 물었다.

“할아버지에게서 데려올 수 없고, 또…….”

“나는 그 아이를 얼마나 사랑했을 텐데요!” 나타샤는 곧바로 그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 우리를 탓할 구실이 생기지 않게 하려는 마음이라는 것을 알아요.”

노백작은 때때로 두 사람에게 다가와 안드레이 공작에게 입을 맞추고, 페탸의 교육이나 니콜라이의 복무에 관해 조언을 구했다. 노백작부인은 두 사람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소냐는 방해가 될까 봐 늘 겁을 먹고, 두 사람이 바라지 않을 때조차 혼자 있게 해 줄 구실을 찾으려 했다. 안드레이 공작이 이야기하면(그는 이야기를 아주 잘했다) 나타샤는 자랑스럽게 귀 기울였다. 자신이 말할 때는 그가 주의 깊고 탐색하는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을 두려움과 기쁨 속에서 알아차렸다. 나타샤는 당혹스러워하며 자문했다. ‘그분은 내게서 무엇을 찾는 걸까? 나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알아내려 하고 있어! 그분이 내게서 찾는 것이 없다면 어떡하지?’ 때로 그녀는 특유의 미칠 듯이 유쾌한 기분에 빠졌다. 그럴 때면 안드레이 공작이 웃는 소리를 듣고 모습을 보는 일이 특히 좋았다. 그는 좀처럼 웃지 않았지만 한번 웃으면 온몸과 마음을 웃음에 내맡겼다. 그런 웃음을 본 뒤 나타샤는 언제나 그와 더 가까워진 듯했다. 자신을 기다리며 다가오는 이별에 대한 생각이 두렵지 않았다면 나타샤는 완전히 행복했을 것이다. 그 이별을 생각하기만 해도 안드레이 공작의 얼굴도 창백하고 차가워졌다.

페테르부르크를 떠나기 전날 안드레이 공작은 피에르를 데리고 왔다. 피에르는 무도회 이후 로스토프 집을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는 당황하고 난처한 듯했다. 피에르가 백작부인과 이야기하는 동안 나타샤는 소냐와 함께 작은 체스 탁자 곁에 앉았다. 안드레이 공작에게도 오라는 뜻이었다. 그는 그곳으로 갔다.

“베주호프를 안 지 오래되었지요?” 그가 물었다. “그를 좋아합니까?”

“네, 사랑스러운 사람이지만 아주 우스꽝스러워요.”

나타샤는 피에르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늘 그랬듯 그의 건망증과 엉뚱함에 관한 일화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에는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도 있었다.

“내가 우리 비밀을 그에게 맡겼다는 것을 압니까? 나는 그를 어린 시절부터 알았습니다. 마음이 황금 같은 사람입니다. 부탁합니다, 나탈리.” 안드레이 공작은 갑자기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떠나고 하늘만이 무슨 일이 생길지 알 겁니다. 당신은 나를 더는…… 아니, 이런 말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압니다. 다만 내가 이곳에 없을 때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든…….”

“무슨 일이 생길 수 있어요?”

“어떤 어려움이 닥치든.” 안드레이 공작은 말을 이었다. “소피 양, 부탁이니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오직 피에르에게 조언과 도움을 구하십시오! 아주 건망증이 심하고 우스꽝스러운 사람이지만 마음은 황금 같습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소냐도 안드레이 공작 자신도 사랑하는 남자와의 이별이 나타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예견하지 못했다. 나타샤는 얼굴을 붉히고 흥분한 채 온종일 집 안을 돌아다녔다. 눈물도 흘리지 않고 자신을 기다리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아주 하찮은 일들에 매달렸다. 작별하며 안드레이 공작이 마지막으로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었을 때조차 울지 않았다. “가지 마세요!” 나타샤가 말했다. 정말 떠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닌지 그를 망설이게 한 어조였고, 그는 그 말을 오랫동안 기억했다. 안드레이 공작이 떠난 뒤에도 그녀는 울지 않았다. 하지만 며칠 동안 눈물 없는 눈으로 방에 앉아 아무 일에도 관심을 두지 않고 이따금 “아, 왜 가신 거야?”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가 떠난 지 2주 뒤, 나타샤는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며 정신적인 병에서 빠져나왔다. 병을 오래 앓은 아이가 달라진 얼굴로 일어나듯 마음의 모습은 달라졌지만, 예전처럼 갑작스럽게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