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 / 제10권 1812년 / 제21장
《전쟁과 평화》 · 제10권 1812년

제21장

《전쟁과 평화》 제10권 21장 삽화

피에르는 마차에서 내려 일하는 민병대원들을 지나 군의관이 전장을 볼 수 있다고 말한 둔덕 위로 올라갔다.

시간은 오전 열한 시쯤이었다. 해는 그의 왼쪽 뒤편에서 빛나며, 맑고 성긴 대기 속에서 원형극장처럼 솟아올라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전경을 환히 비추었다.

왼쪽 위에서 스몰렌스크 큰길이 원형극장을 양분하며 구불구불 뻗어 있었다. 길은 둔덕 앞 아래쪽 5백 걸음쯤 떨어진 흰 교회가 있는 마을을 지났다. 그곳이 보로디노였다. 길은 마을 아래에서 다리로 강을 건너 굽이치며 오르내린 뒤 약 4마일 밖에 보이는 발루예보 마을까지 점점 높아졌다. 당시 나폴레옹이 그곳에 있었다. 발루예보 너머의 길은 지평선의 누렇게 물든 숲속으로 사라졌다. 길 오른쪽 멀리 자작나무와 전나무 숲에서는 콜로차 수도원의 십자가와 종탑이 햇빛에 빛났다. 숲과 길의 좌우로 펼쳐진 푸른 공간 곳곳에는 모닥불 연기와 아군과 적군의 분명치 않은 병력 덩어리가 보였다. 오른쪽 콜로차강과 모스크바강을 따른 지형은 울퉁불퉁한 구릉지였다. 골짜기 사이로 베주보보와 자하리노 마을이 멀리 보였다. 왼쪽은 더 평평하고 곡식밭이 있었으며 불타 버린 세묘놉스크의 연기 나는 폐허가 보였다.

피에르가 본 것은 모두 너무도 불분명해 전장의 왼쪽도 오른쪽도 그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그가 찾으리라 여긴 전장은 어디에도 없고 들판과 초원과 군대와 숲과 모닥불 연기와 마을과 둔덕과 시냇물만 있었다. 아무리 살펴도 생명으로 가득 찬 이곳에서 군사적인 ‘진지’를 찾아낼 수 없었고, 아군과 적군조차 구별할 수 없었다.

‘아는 사람에게 물어봐야겠군.’ 그는 생각하고 자기의 거대하고 군인답지 않은 모습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는 장교에게 말을 걸었다.

“실례지만,” 피에르가 말했다. “앞에 있는 마을은 어디입니까?”

“부르디노 아닌가?” 장교가 동료에게 물었다.

“보로디노요.” 동료가 바로잡았다.

이야기할 기회가 생겨 기쁜 듯 장교는 피에르에게 다가왔다.

“저기에 있는 것은 우리 군대입니까?” 피에르가 물었다.

“그렇소. 더 멀리는 프랑스군이고요.” 장교가 말했다. “저기 있습니다. 저기…… 보이지요.”

“어디요? 어디입니까?” 피에르가 물었다.

“맨눈으로도 보입니다…… 바로 저기!”

장교는 강 건너 왼쪽에 보이는 연기를 손으로 가리켰다. 피에르가 만난 수많은 얼굴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이 엄숙하고 진지한 표정이 그의 얼굴에도 떠올랐다.

“아, 저쪽이 프랑스군이군요! 그러면 저기는요?” 피에르는 병력이 보이는 왼쪽 둔덕을 가리켰다.

“우리 군대입니다.”

“아, 아군이군요! 그러면 저쪽은요?” 피에르는 골짜기 마을 근처의 큰 나무가 선 먼 둔덕을 가리켰다. 그곳에도 모닥불이 연기를 피웠고 검은 무언가가 보였다.

“저곳은 다시 그자의 것이오.” 장교가 말했다. 그곳은 셰바르디노 보루였다. “어제는 우리 것이었지만 지금은 그자의 것이오.”

“그렇다면 우리 진지는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우리 진지요?” 장교가 만족스러운 미소로 대답했다. “거의 모든 보루를 내가 쌓았으니 분명히 말해 줄 수 있습니다. 보입니까? 우리 중앙은 저기 보로디노, 바로 저곳입니다.” 그는 앞의 흰 교회가 있는 마을을 가리켰다. “콜로차강을 건너는 곳이지요. 아래 골짜기에 건초가 줄지어 놓인 곳이 보입니까? 거기에 다리가 있습니다. 그곳이 우리 중앙입니다. 우익은 저쪽입니다.” 그는 울퉁불퉁한 지형 멀리 오른쪽을 날카롭게 가리켰다. “저곳에 모스크바강이 있고 아주 튼튼한 보루 세 개를 쌓았습니다. 좌익은…….” 장교는 말을 멈췄다. “보시다시피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어제 우리 좌익은 저기 셰바르디노, 참나무가 있는 곳이었는데 이제 좌익을 철수시켜 저쪽에 두었습니다. 마을과 연기가 보입니까? 세묘놉스크입니다. 그래요, 저기입니다.” 그는 라예프스키 둔덕을 가리켰다. “하지만 전투는 아마 저기서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그자가 병력을 그곳으로 옮긴 것은 계략일 뿐입니다. 아마 모스크바강 오른쪽으로 우회하겠지요. 어디에서 벌어지든 내일이면 많은 사람이 사라질 겁니다!”

장교가 설명하는 동안 다가온 늙은 하사관은 말이 끝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으나 마지막 말을 못마땅하게 여긴 듯 끼어들었다.

“개비온을 가져오게 해야 합니다.” 그가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장교는 내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라질지를 생각할 수는 있어도 입 밖에 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듯 당황했다.

“그럼 제3중대를 다시 보내게.” 장교가 서둘러 대답했다.

“그런데 당신은 군의관이오?”

“아니요, 혼자 왔습니다.” 피에르는 대답하고 민병대원들을 지나 다시 언덕을 내려갔다.

“아, 저 망할 것들!” 뒤따라오던 장교가 일하는 사람들 곁을 뛰어 지나며 코를 막고 중얼거렸다.

“저기 온다…… 성모님을 모시고 와…… 저기야…… 곧 이리 오실 거야…….” 갑자기 여러 목소리가 들렸다. 장교와 병사와 민병대원들이 길을 따라 앞으로 달려갔다.

보로디노에서 종교 행렬이 언덕을 올라오고 있었다. 먼지 나는 길을 따라 먼저 보병들이 모자를 벗고 총구를 아래로 향한 채 대열을 이루어 걸었다. 뒤에서는 성가가 들려왔다.

병사들과 민병대원들은 모자를 벗고 피에르를 지나 행렬 쪽으로 달려갔다.

“성모님을 모셔 온다, 우리의 수호자이신 이베리아 성모님을!” 누군가 외쳤다.

“스몰렌스크 성모님이야.” 다른 사람이 바로잡았다.

마을에 있던 민병대원도 포대에서 일하던 민병대원도 삽을 내던지고 종교 행렬을 맞으러 달려갔다. 먼지 나는 길을 행진하는 대대 뒤로 제의를 입은 사제들이 왔다. 두건을 쓴 작은 노인과 수행원과 성가대가 함께했다. 그 뒤로 병사와 장교들이 돋을새김 금속 덮개를 씌운 검은 얼굴의 커다란 성상을 들고 왔다. 스몰렌스크에서 가져와 그 뒤로 줄곧 군대와 함께한 성상이었다. 성상 뒤와 앞과 양옆에는 모자를 벗은 민병대원 무리가 걷고 뛰며 땅에 엎드려 절했다.

언덕 꼭대기에서 행렬이 멈췄다. 성상에 매단 아마포 띠를 잡고 있던 사람들이 교대했고 성가대원들은 향로에 다시 불을 붙였으며 예배가 시작되었다. 뜨거운 햇살이 수직으로 내리쬐고 신선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맨머리의 머리카락과 성상을 장식한 리본을 흔들었다. 드넓은 하늘 아래에서는 성가가 크게 울리지 않았다. 모자를 벗은 장교와 병사와 민병대원이 엄청난 무리를 이루어 성상을 둘러쌌다. 사제와 성가대원 뒤의 따로 마련된 자리에는 고관들이 서 있었다. 목에 성 게오르기 십자훈장을 건 대머리 장군은 사제 바로 뒤에 서서 성호도 긋지 않은 채 예배가 끝나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는 분명 독일인이었고 아마 러시아 민중의 애국심을 북돋우려면 예배를 끝까지 지켜보아야 한다고 여긴 듯했다. 다른 장군은 무인다운 자세로 서서 가슴 앞에서 손을 흔들어 성호를 그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농민 무리 속에 선 피에르는 고관들 사이에서 아는 사람 몇을 알아보았으나 그들을 보지 않았다. 모든 관심이 성상을 열렬히 바라보는 병사와 민병대원 무리의 진지한 표정에 쏠렸다. 그날 스무 번째로 같은 예배를 노래해 지친 성가대원들이 “하느님의 어머니시여, 당신의 종들을 재앙에서 구하소서.”라고 나른하고 기계적으로 노래하고, 사제와 부제가 “하느님 아래에서 우리 모두가 무너지지 않는 성벽이자 보호자이신 당신께 피하나이다.”라고 화답하자, 모자이스크 언덕 아래와 그날 아침 마주친 수많은 얼굴에서 순간순간 보았던 임박한 순간의 장엄함에 대한 자각이 모든 얼굴에 다시 타올랐다. 사람들은 더 자주 머리를 숙이고 머리카락을 뒤로 젖혔으며, 한숨과 성호를 그을 때 내는 소리가 들렸다.

성상을 둘러싼 군중이 갑자기 갈라지며 피에르 쪽으로 밀려왔다. 사람들이 서둘러 길을 내주는 것으로 보아 대단히 지위 높은 인물이 성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진지를 돌아보고 타타리노보로 돌아가던 길에 예배를 보고 멈춘 쿠투조프였다. 피에르는 누구와도 다른 특유의 풍채를 보고 곧 그를 알아보았다.

지나치게 뚱뚱하고 어깨가 굽은 몸에 긴 외투를 입고 흰 머리를 드러낸 채, 잃은 눈의 흰자위가 보이는 부은 얼굴로 쿠투조프는 깊이 발을 내디디며 몸을 흔드는 걸음으로 군중 속에 들어와 사제 뒤에 멈췄다. 익숙한 동작으로 성호를 긋고 몸을 굽혀 손으로 땅을 짚은 뒤 깊이 한숨을 쉬며 흰 머리를 숙였다. 쿠투조프 뒤에는 베니히센과 수행원들이 있었다. 고급 장교 모두의 시선을 끄는 총사령관이 나타났는데도 민병대원과 병사들은 그를 보지 않고 계속 기도했다.

예배가 끝나자 쿠투조프는 성상 앞으로 가서 무겁게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 절했다. 오랫동안 일어나려 했으나 쇠약하고 무거운 몸 때문에 일어나지 못했다. 힘을 쓰느라 흰 머리가 떨렸다. 마침내 일어난 그는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게 입술을 내밀어 성상에 입 맞추고 다시 몸을 굽혀 손으로 땅을 짚었다. 다른 장군들이 그를 따랐고 장교들이 그 뒤를 이었다. 이어 흥분한 얼굴로 서로 밀고 몰리며 숨을 헐떡이고 떠미는 병사와 민병대원들이 성상 앞으로 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