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 / 제1권 1805년 / 제15장
《전쟁과 평화》 · 제1권 1805년

제15장

《전쟁과 평화》 제1권 15장 삽화

“사랑하는 보리스.” 로스토바 백작부인의 마차가 짚을 깐 거리를 지나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베주호프 백작 저택의 넓은 안뜰로 들어설 때 안나 미하일로브나 공작부인이 아들에게 말했다. “사랑하는 보리스.” 어머니는 낡은 망토 아래에서 손을 꺼내 아들의 팔 위에 조심스럽고 다정하게 얹었다. “그분께 다정하고 세심하게 행동하렴.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백작은 결국 네 대부이고, 네 장래는 그분께 달려 있어. 그 점을 기억하고, 네가 잘할 줄 아는 대로 그분께 상냥하게 대하렴.”

“굴욕 말고도 무언가 얻을 수 있다는 확신만 있다면 좋겠군요…….” 아들은 차갑게 대답했다. “하지만 약속했으니 어머니를 위해 그렇게 하겠습니다.”

현관 앞에 다른 사람의 마차가 서 있는 것을 문지기가 보았는데도, 동상들이 놓인 벽감 사이의 유리 현관을 지나 알리지도 않고 곧장 들어온 모자를 살펴보고 특히 부인의 낡은 망토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본 뒤, 백작을 만나려는지 공작 영애들을 만나려는지 물었다. 백작을 뵙고 싶다는 말을 듣자 오늘은 각하의 병세가 더 나쁘며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냥 돌아가는 편이 좋겠습니다.” 아들이 프랑스어로 말했다.

“얘야!” 어머니는 애원하듯 외치며, 손길로 아들을 달래거나 북돋울 수 있다는 듯 다시 그의 팔에 손을 얹었다.

보리스는 더 말하지 않고 외투도 벗지 않은 채 묻는 눈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여보게.” 안나 미하일로브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문지기에게 말했다.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백작께서 몹시 편찮으신 것을 알아요…… 그래서 온 거예요…… 나는 친척이랍니다. 그분을 방해하지 않겠어요, 여보게…… 바실리 세르게예비치 공작만 만나면 돼요. 이곳에 머물고 계시지요? 내가 왔다고 전해 주세요.”

문지기는 시무룩하게 위층으로 이어진 종을 잡아당기고 몸을 돌렸다.

“드루베츠카야 공작부인께서 바실리 세르게예비치 공작님을 뵈러 오셨다.” 그는 반 층계참에서 몸을 내밀어 바라보는 하인에게 외쳤다. 무릎바지와 구두에 연미복을 입은 하인이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어머니는 벽에 걸린 커다란 베네치아 거울 앞에서 물들인 비단 드레스의 주름을 매만진 뒤, 뒤축이 닳은 구두를 신고도 카펫 깔린 계단을 재빠르게 올라갔다.

“얘야.” 그녀는 손길로 아들을 다시 북돋우며 말했다. “내게 약속했잖니!”

아들은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뒤따랐다.

그들은 커다란 홀로 들어갔다. 그곳의 문 하나는 바실리 공작에게 내준 방들로 이어졌다.

모자가 홀 한가운데까지 와서, 그들이 들어오자 벌떡 일어선 나이 든 하인에게 길을 물으려던 순간 문 하나의 청동 손잡이가 돌아갔다. 바실리 공작이 집에 있을 때 늘 그러듯 가슴에 별 하나를 단 벨벳 상의를 입고, 잘생긴 검은 머리 남자를 배웅하며 나왔다. 그는 페테르부르크의 유명한 의사 로랭이었다.

“그렇다면 확실한 것이오?” 공작이 말했다.

“공작님, 인간은 실수하는 법입니다. 하지만…….” 의사는 프랑스식 억양으로 라틴어를 발음하고 ‘르’ 소리를 삼키며 대답했다.

‘인간은 실수하는 법’이라는 뜻이다.

“좋소, 좋아…….”

안나 미하일로브나와 아들을 본 바실리 공작은 목례로 의사를 보내고, 묻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없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보리스는 어머니의 얼굴이 갑자기 깊은 슬픔으로 흐려지는 것을 보고 살짝 미소 지었다.

“아, 공작님! 이토록 슬픈 상황에서 다시 만나는군요! 사랑하는 환자분의 병세는 어떻습니까?” 그녀는 자신을 향한 차갑고 모욕적인 눈길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말했다.

바실리 공작은 의아하고 당혹스러운 눈으로 그녀와 보리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보리스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공작은 그 인사를 받아 주지 않은 채 안나 미하일로브나에게 몸을 돌리고, 환자에게 희망이 거의 없다는 뜻으로 머리와 입술을 움직여 질문에 답했다.

“설마요?” 안나 미하일로브나가 외쳤다. “아, 정말 끔찍해요! 생각만 해도 무섭군요…… 이 아이는 제 아들입니다.” 그녀는 보리스를 가리키며 덧붙였다. “직접 감사드리고 싶어 했답니다.”

보리스는 다시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공작님, 어머니의 마음은 우리를 위해 해 주신 일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는 것을 믿어 주세요.”

“당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 기쁘오, 친애하는 안나 미하일로브나.” 바실리 공작은 레이스 주름 장식을 매만지며 말했다. 페테르부르크의 안나 셰레르 모임에서보다, 자신에게 은혜를 입은 안나 미하일로브나를 모스크바에서 대하는 지금의 목소리와 태도에는 훨씬 대단한 사람인 듯한 기색이 배어 있었다.

“맡은 일을 잘하고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임을 보여 주게.” 그는 보리스에게 엄하게 말했다. “기쁘군…… 휴가를 와 있는 건가?” 그는 평소의 무심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새 연대에 합류하라는 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각하.” 보리스는 공작의 퉁명스러운 태도에 불쾌한 기색도, 대화를 이어 가려는 욕망도 드러내지 않았다. 너무나 차분하고 공손하게 말했으므로 공작은 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어머니와 함께 사나?”

“로스토바 백작부인 댁에 머물고 있습니다, 각하.” 보리스는 다시 ‘각하’를 덧붙였다.

“나탈리 신시나와 결혼한 일리야 로스토프의 집입니다.” 안나 미하일로브나가 말했다.

“알고 있소, 알아.” 바실리 공작은 단조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탈리가 어떻게 그 다듬어지지 않은 곰 같은 자와 결혼할 마음을 먹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소! 완전히 우스꽝스럽고 어리석은 사람이지. 도박꾼이기도 하다고 들었소.”

“하지만 아주 친절한 분입니다, 공작님.” 안나 미하일로브나는 애처로운 미소로 말했다. 로스토프 백작이 그런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자신도 알지만, 가엾은 노인에게 너무 가혹하게 굴지 말아 달라고 청하는 듯했다. “의사들은 뭐라고 합니까?” 잠시 뒤 공작부인이 물었다. 지친 얼굴에 다시 깊은 슬픔이 떠올랐다.

“희망이 거의 없다고 하오.” 공작이 대답했다.

“아저씨께서 나와 보리스에게 베푸신 모든 친절에 대해 마지막으로 한 번 감사드리고 싶군요. 이 아이는 그분의 대자랍니다.” 그녀는 이 사실이 바실리 공작에게 큰 기쁨이라도 주어야 한다는 듯 덧붙였다.

바실리 공작은 생각에 잠겨 얼굴을 찌푸렸다. 안나 미하일로브나는 그가 베주호프 백작의 재산을 놓고 자신이 경쟁자가 될까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서둘러 안심시키려 했다.

“내가 아저씨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헌신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말이지요.” 그녀는 ‘아저씨’라는 말을 유난히 확신에 차고 태연하게 발음했다. “그분의 성품을 잘 압니다. 고결하고 올곧은 분이지요…… 하지만 곁에는 젊은 공작 영애들밖에 없잖아요…… 그들은 아직 어리고요…….”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공작님, 아저씨께서는 마지막 의무를 다하셨나요? 마지막 순간은 얼마나 귀중합니까! 더 나빠질 것도 없으니, 그토록 위중하시다면 반드시 준비시켜 드려야 합니다. 우리 여자들은, 공작님,” 그녀는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이런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늘 알지요.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꼭 그분을 뵈어야 합니다. 나는 고통에 익숙하답니다.”

공작은 분명 그녀의 뜻을 이해했다. 안나 파블로브나의 집에서 그랬듯, 안나 미하일로브나를 떼어 놓기 어려우리라는 사실도 이해했다.

“그런 만남은 환자에게 너무 힘들지 않겠소, 친애하는 안나 미하일로브나?” 그가 말했다. “저녁까지 기다립시다. 의사들은 고비가 올 것으로 보고 있소.”

“하지만 이런 때에는 미룰 수 없습니다, 공작님! 그분 영혼의 안녕이 걸린 일임을 생각해 보세요. 아, 무서운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의무란…….”

안쪽 방 가운데 하나의 문이 열리고, 백작의 조카딸인 공작 영애 한 명이 차갑고 엄한 얼굴로 들어왔다. 긴 몸통은 짧은 다리와 놀라울 정도로 균형이 맞지 않았다. 바실리 공작은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래, 병세는 어떻소?”

“여전하세요. 하지만 이렇게 소란스러운데 무엇을 바라겠어요…….” 공작 영애는 안나 미하일로브나를 낯선 사람처럼 바라보며 말했다.

“아, 얘야, 몰라볼 뻔했구나.” 안나 미하일로브나는 기쁜 미소를 띠고 백작의 조카딸에게 가볍게 종종걸음으로 다가갔다. “왔으니 내 아저씨를 간호하는 일을 도와줄게. 네가 얼마나 고생했을지 짐작이 가는구나.” 그녀는 동정 어린 눈길로 눈을 치켜떴다.

공작 영애는 대답도 미소도 없이 방을 나갔다. 안나 미하일로브나는 장갑을 벗고 자신이 쟁취한 자리를 차지하듯 안락의자에 앉아, 바실리 공작에게 곁에 앉으라고 권했다.

“보리스.” 그녀는 아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백작 아저씨를 뵈러 들어가마. 그동안 너는 피에르에게 가는 편이 좋겠구나. 로스토프 집안의 초대를 전하는 것도 잊지 마라. 저녁 식사에 오라고 했어. 아마 가지 않겠지요?” 그녀는 공작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오히려 그 반대요.” 확실히 풀이 죽은 바실리 공작이 대답했다. “그 젊은이를 내게서 맡아 준다면 더없이 기쁘겠소…… 여기 있는데도 백작은 한 번도 그를 찾지 않았소.”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인 하나가 보리스를 이끌고 한 층계를 내려갔다가 다른 층계를 올라 피에르의 방으로 안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