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프 톨스토이 · 안나 카레니나 · 1877

제8부 제10장

'나는 무엇이며 무엇을 위해 사는가'
'나는 무엇이며 무엇을 위해 사는가'

레빈이 ‘나는 무엇이며 무엇을 위해 사는가’를 생각하면 아무런 대답도 찾지 못하고 절망에 빠졌다. 그러나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기를 멈추면, 마치 자기가 무엇이며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 그는 확고하고 분명하게 행동하며 살았고, 심지어 최근에는 예전보다 훨씬 더 확고하고 분명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6월 초 시골로 돌아오자 그는 늘 하던 일로 되돌아갔다. 농장 경영, 농부들과 이웃 사람들과의 관계, 집안일, 자기에게 맡겨진 누이와 형의 일, 아내와 친척들과의 관계, 아이를 돌보는 일, 그리고 그해 봄 새로 재미를 붙인 양봉까지 그의 시간을 온통 채웠다.

이 일들이 그를 사로잡은 것은 예전처럼 어떤 일반적인 이론을 내세워 그것들을 정당화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제 그는 한편으로 예전에 공공의 이익을 위해 벌였던 일들이 실패한 데 환멸을 느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생각과 사방에서 밀려드는 수많은 일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있었으므로, ‘공공의 이익’에 관한 모든 생각을 완전히 버렸다.

그 일들이 그를 붙들고 있는 까닭은 오직 자기는 지금 자기가 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달리할 수 없었다.

예전에는 ― 거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 완전히 성인이 될 때까지 점점 강해진 일이었지만 ― 모든 사람에게, 인류에게, 러시아에, 현 전체에, 온 마을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려고 애쓸 때면 그런 생각 자체는 즐거웠지만 실제 행동은 언제나 어딘가 어긋났다. 정말 꼭 해야 하는 일이라는 확신도 없었고, 처음에는 아주 거대해 보이던 사업도 점점 작아지다가 마침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사라져버리곤 했다.

그러나 이제 결혼 뒤 점점 더 자기와 가족을 위한 삶으로 범위를 좁혀가자, 그는 자기 활동을 생각하며 예전 같은 흥분이나 기쁨을 느끼지는 못했어도, 그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확신을 느꼈으며, 일이 전보다 훨씬 잘되어가고 또 점점 커지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이제 마치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땅을 깊이 파고드는 쟁기처럼 삶 속에 점점 더 깊숙이 들어가고 있었고, 이미 밭고랑을 끝까지 갈지 않고서는 밖으로 빠져나올 수도 없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살아온 방식대로, 같은 수준의 교육과 생활 조건 속에서 가족이 살아가고 아이들도 그렇게 길러야 한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이 필요한 일이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 것만큼이나 당연했다. 그리고 밥을 먹으려면 음식을 준비해야 하듯이,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포크롭스코예의 농장 기계를 수입이 나도록 움직여야 했다.

빚을 갚아야 하는 것이 의심할 수 없는 의무인 것처럼, 아들이 그 땅을 물려받았을 때 레빈 자신이 할아버지가 지어놓고 심어놓은 모든 것에 감사했던 것처럼 아버지에게 감사할 수 있도록 조상 대대로 내려온 땅을 제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것도 의심할 수 없었다. 그러려면 땅을 소작 주지 않고 직접 농사를 지어야 했고, 가축을 기르고, 밭에 거름을 내고, 숲을 심어야 했다.

세르게이 이바노비치의 일이나 누이의 일, 조언을 구하러 와서 이제는 그가 조언해주는 것에 익숙해진 수많은 농부들의 일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이미 팔에 안은 아이를 내던질 수 없는 것과 같았다. 초대해온 처제와 아이들이 편안하게 지내도록 돌보아야 했고, 아내와 아기에게도 하루의 적어도 얼마쯤은 함께 있어주어야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사냥과 새로 생긴 양봉 취미와 함께, 생각하기만 하면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이는 레빈의 삶 전체를 빈틈없이 채웠다.

그러나 레빈은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확고히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 모든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느 일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도 똑같이 알고 있었다.

일꾼은 가능한 한 싼값에 고용해야 했다. 하지만 미리 돈을 주고 실제 품삯보다 훨씬 싼값으로 그들을 속박하는 것은, 아무리 이익이 된다 해도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사료가 모자라는 때 농부들에게 짚을 파는 것은, 그들이 안쓰럽기는 해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관과 술집은 수입을 가져다준다 해도 없애야 했다.

숲의 나무를 몰래 베어간 일에는 가능한 한 엄하게 배상금을 물려야 했지만, 남의 밭에 들어온 가축에는 벌금을 받아서는 안 되었다. 그것 때문에 감시인들이 불평하고 사람들이 겁을 덜 내게 된다 하더라도, 붙잡아온 가축은 돌려보내야 했다.

고리대금업자에게 한 달에 십 퍼센트씩 이자를 내고 있는 표트르에게는 빚에서 벗어나도록 돈을 빌려주어야 했다. 그러나 지대를 체납한 농부들에게는 지대를 깎아주거나 납부를 늦춰줄 수 없었다.

관리인이 목초지를 제때 베지 않아 풀이 헛되이 썩게 만든 일은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어린 나무를 심어놓은 팔십 데샤티나의 땅은 풀을 베어서는 안 되었다.

농번기에 아버지가 죽었다고 집으로 가버린 일꾼은, 아무리 가엾어도 그대로 용서할 수 없었고 일을 빼먹은 값비싼 달의 품삯은 깎아 계산해야 했다. 그러나 아무 쓸모가 없어져버린 늙은 집안 하인들에게 매달 주던 생활비를 끊을 수도 없었다.

레빈은 또한 집에 돌아가면 먼저 몸이 좋지 않은 아내에게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기를 기다린 지 벌써 세 시간이 된 농부들은 조금 더 기다릴 수 있었다.

또 벌떼를 새 벌통에 옮겨 앉히는 일이 아무리 즐겁더라도, 그 즐거움을 포기하고 늙은 양봉가에게 자기 없이 일을 맡긴 채 양봉장까지 찾아온 농부들과 이야기를 나누러 가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자기가 옳게 행동하는지 그르게 행동하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이제 와서 그것을 논증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런 문제를 두고 이야기하거나 생각하는 일을 피했다.

추론을 시작하면 의심에 빠져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보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하지 않고 살아갈 때면, 그의 영혼 안에는 두 가지 가능한 행동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좋고 어느 쪽이 더 나쁜지를 판단하는, 틀리지 않는 재판관이 늘 존재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대로 행동하지 않았을 때에는 즉시 그것을 느꼈다.

그렇게 그는 자기가 무엇이며 무엇 때문에 세상에 살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 채, 그것을 알아낼 길조차 보지 못한 채, 그 무지 때문에 스스로 죽을까 두려워할 정도로 괴로워하면서도, 동시에 자기만의 분명하고 확고한 삶의 길을 뚫고 나아가며 살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