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프 톨스토이 · 안나 카레니나 · 1877

제8부 제5장

포대 그림자 속을 짐승처럼 오가는 브론스키
포대 그림자 속을 짐승처럼 오가는 브론스키

플랫폼에 쌓여 있는 포대들이 길게 드리운 저녁 그림자 속에서 브론스키는 긴 외투를 입고 모자를 깊이 눌러쓴 채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우리 속 짐승처럼 스무 걸음쯤 되는 거리를 빠르게 오가다가 갑자기 방향을 돌곤 했다.

다가가던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브론스키가 자기를 보았지만 못 본 척하는 듯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르게이 이바노비치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는 브론스키와의 개인적인 감정 따위보다 위에 있다고 느꼈다.

이 순간 세르게이 이바노비치의 눈에 브론스키는 위대한 일을 위해 움직이는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코즈니셰프는 그를 격려하고 지지하는 것이 자기 의무라고 여겼다.

그가 다가가자 브론스키는 걸음을 멈추고 자세히 바라보다가 그를 알아보고 몇 걸음 마주 와 세르게이 이바노비치의 손을 아주 세게 잡았다.

“어쩌면 나를 보고 싶지 않으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없겠습니까?”

세르게이 이바노비치가 말했다.

“당신만큼 만나도 덜 괴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브론스키가 대답했다.

“용서하십시오. 지금 내 삶에는 즐거운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해합니다. 그래서 혹시 도움을 드릴 일이 있을까 해서요.”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고통이 분명히 드러나는 브론스키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리스티치나 밀란에게 소개장을 써드릴까요?”

“아닙니다.”

브론스키는 그 말을 이해하는 데에도 힘이 드는 듯 대답했다.

“괜찮으시다면 좀 걸으시지요. 객차 안은 숨이 막힙니다. 소개장이라고요? 아니, 고맙습니다. 죽는 데 소개장은 필요 없지요. 터키군에게라면 몰라도…….”

그는 입만 웃었다. 눈에는 여전히 성난 듯하면서도 고통스러운 표정이 남아 있었다.

“그렇지만 현지에서 여러 사람과 연락할 필요는 있을 텐데, 준비된 사람을 통해 관계를 트면 더 쉬울 수 있습니다. 물론 마음대로 하십시오. 당신이 이런 결정을 했다는 말을 듣고 나는 정말 기뻤습니다. 요즘 자원병들에 대한 공격이 워낙 많아서, 당신 같은 사람이 가는 것은 그들의 사회적 평가를 높여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인간으로서의 내가 쓸모 있는 점이라면, 이제 내게 삶이 아무 가치도 없다는 것뿐입니다.”

브론스키가 말했다.

“다만 내 몸에는 아직 기력이 충분해서 적의 방진 속으로 뛰어들어 깨뜨리든지, 아니면 거기서 쓰러질 수 있다는 건 압니다. 내게 필요 없다는 정도가 아니라 이제는 지긋지긋해진 이 목숨을 내놓을 곳이 있다는 게 반갑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쓸모가 있겠지요.”

끊이지 않는 치통 때문에 그는 턱을 초조하게 움직였다. 통증은 그가 의도한 표정으로 말을 하는 것조차 방해하고 있었다.

“당신은 다시 살아날 겁니다. 나는 그렇게 믿습니다.”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형제들을 압제에서 해방시키는 일은 죽기에도 살기에도 값어치 있는 목적입니다. 하느님이 당신에게 바깥의 성공과 마음속의 평화를 함께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는 손을 내밀었다.

브론스키는 그 손을 힘껏 잡았다.

“그렇습니다. 하나의 도구라면 내가 무언가에 쓸모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나는 폐허입니다.”

그는 한 마디씩 끊어 말하듯 천천히 말했다.

단단한 이가 쿡쿡 쑤시며 입 안에 침이 고이게 해 말하기 어려웠다. 그는 입을 다물고, 레일 위를 부드럽고 느리게 다가오는 기관차의 탄수차 바퀴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치통과는 전혀 다른, 온몸과 마음을 조이는 끔찍한 내적 불쾌감이 그를 덮쳐와 그는 잠시 이의 아픔조차 잊었다.

불행 이후 처음 만나는 지인과 이야기를 나눈 뒤 탄수차와 레일을 바라보는 순간, 갑자기 그녀가 떠올랐다. 아니, 그 미친 듯 역 구내 막사로 뛰어들었을 때 그곳에 남아 있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막사 안 탁자 위에, 얼마 전까지 생명이 가득했던 피투성이 몸이 낯선 사람들 한가운데 뻔뻔스럽게 뻗어 있었고, 뒤로 젖혀진 머리는 상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무거운 땋은 머리와 관자놀이의 곱슬머리, 그리고 아름다운 얼굴에는 반쯤 열린 붉은 입술에 기묘하고 가련한 표정이, 감기지 않은 채 멈춘 눈에는 무시무시한 표정이 굳어 있었다. 마치 싸우던 날 그녀가 그에게 던졌던 그 끔찍한 말, 언젠가는 후회하게 되리라는 말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얼굴 같았다.

브론스키는 그녀를 마지막 순간의 잔인하고 복수심 가득한 모습으로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처음 만났을 때, 역시 기차역에서 보았던 신비롭고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행복을 찾고 또 행복을 주던 그녀를 기억하려 했다.

함께했던 가장 좋은 순간들을 떠올리려고 했지만, 그 순간들까지 이제는 영원히 독에 물들어 있었다. 그의 기억 속에는 오직, 아무에게도 필요 없지만 지워지지 않을 후회라는 협박을 승리하듯 완성해버린 마지막 그녀의 모습만 남았다.

그는 치통을 더 이상 느끼지 못했다. 흐느낌이 얼굴을 뒤틀었다.

포대 곁을 말없이 두 번 왕복한 뒤 가까스로 자신을 가라앉힌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세르게이 이바노비치에게 물었다.

“어제 이후 새 전보는 못 받으셨습니까? 그렇지요, 세 번째로 패했다더군요. 하지만 내일 결정적인 전투가 있을 거라고 합니다.”

두 사람은 이어 밀란을 왕으로 선포하는 문제와 그것이 가져올 수 있는 거대한 결과에 대해 잠시 더 이야기했고, 두 번째 종이 울린 뒤 각자의 객차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