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 / 제14권 1812년 / 제15장
《전쟁과 평화》 · 제14권 1812년

제15장

《전쟁과 평화》 제14권 15장 삽화

보급품 수레와 포로들, 원수의 치중대는 샴셰보 마을에 멈췄다. 사람들은 모닥불 주위에 몰려들었다. 피에르는 불로 다가가 구운 말고기를 조금 먹고 불 쪽으로 등을 돌린 채 누워 곧바로 잠들었다. 그는 보로디노 전투 뒤 모자이스크에서 잠들었던 것과 같은 잠에 다시 빠졌다.

또다시 현실의 사건들이 꿈과 뒤섞였고, 또다시 누군가가—그 자신인지 다른 사람인지—그의 생각을 말로 나타냈다. 그것은 모자이스크의 꿈에서 나타난 것과 같은 생각이었다.

“삶은 모든 것이다. 삶은 하느님이다. 모든 것은 변하고 움직이며 그 움직임이 하느님이다. 삶이 있는 동안에는 신성을 의식하는 기쁨이 있다. 삶을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어렵고 복된 것은 고통 속에서, 죄 없는 고통 속에서 이 삶을 사랑하는 것이다.”

‘카라타예프!’라는 생각이 피에르의 마음에 떠올랐다.

그 순간 그는 오래전에 잊었던 다정한 노인을 눈앞에 생생히 보았다. 스위스에서 그에게 지리를 가르쳤던 사람이었다. “잠깐 기다리거라.” 노인이 말하며 피에르에게 지구본을 보여주었다. 그 지구본은 살아 있었다. 일정한 크기 없이 진동하는 구체였다. 표면 전체는 서로 바싹 눌린 물방울들로 이루어졌고, 모든 물방울이 움직이며 자리를 바꾸었다. 때로는 여러 개가 하나로 합쳐지고 때로는 하나가 여럿으로 갈라졌다. 각각의 물방울은 퍼져나가 가능한 한 많은 공간을 차지하려 했지만, 똑같이 그러려는 다른 물방울들이 그것을 압박하고 때로는 없애버리며 때로는 그것과 합쳐졌다.

“그것이 삶이란다.” 늙은 선생이 말했다.

‘얼마나 단순하고 명료한가.’ 피에르는 생각했다. ‘왜 나는 전에는 이것을 몰랐을까?’

“한가운데에는 하느님이 계시고, 각각의 물방울은 그분을 최대한 온전히 비추려고 넓어지려 한단다. 그것은 자라고 합쳐지고 표면에서 사라져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가 다시 나타나지. 자, 이제 카라타예프가 퍼져나가 사라졌구나. 알겠니, 얘야?” 선생이 말했다.

“알아들었나, 빌어먹을 놈아?” 누군가가 소리쳤고 피에르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방금 러시아인 병사를 밀쳐낸 프랑스군 병사 하나가 불 옆에 쪼그려 앉아 총 꼬질대에 꽂은 고기 조각을 굽고 있었다. 소매를 걷어붙인 그의 힘줄이 불거지고 털이 난 붉은 손은 손가락이 짧았으며 능숙하게 꼬질대를 돌렸다. 눈썹을 찌푸린 갈색의 음울한 얼굴이 숯불에 선명하게 비쳤다.

“이 녀석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그는 뒤에 서 있는 병사를 향해 재빨리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도적놈! 저리 가!”

그는 꼬질대를 비틀며 피에르를 음울하게 바라보았다. 피에르는 고개를 돌려 어둠 속을 응시했다. 그 프랑스인이 밀쳐낸 포로인 러시아인 병사는 불 가까이 앉아 손으로 무언가를 쓰다듬고 있었다. 피에르는 자세히 바라보다가 병사 곁에 앉아 꼬리를 흔드는 잿빛 도는 푸른 털의 개를 알아보았다.

“아, 이 녀석이 왔구나?” 피에르가 말했다. “그럼 플라……” 그는 말을 시작했지만 끝맺지 않았다.

갑자기 동시에 수많은 기억이 그의 상상 속에서 깨어났다. 나무 아래 앉아 있던 플라톤이 자신에게 보낸 눈길, 그곳에서 들린 총성, 개의 울음, 자기 곁을 달려 지나간 프랑스군 두 사람의 죄지은 얼굴, 총구를 내리고 연기가 나던 총, 그리고 이 숙영지에 카라타예프가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피에르는 카라타예프가 살해당했다는 것을 막 깨달으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어째서인지 키예프의 자기 집 베란다에서 아름다운 폴란드 여인과 함께 보낸 어느 여름날 저녁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날의 사건들을 연결하거나 결론을 내리지 않은 채 피에르는 눈을 감았다. 여름 시골의 광경은 물놀이의 추억과 액체처럼 진동하는 구체의 모습과 뒤섞였다. 그는 물속으로 가라앉았고 물이 머리 위로 닫혔다.

해가 뜨기 전, 외침과 크고 빠르게 이어지는 총성이 그를 깨웠다. 프랑스군 병사들이 그의 곁을 지나 달리고 있었다.

“카자크다!” 그들 가운데 하나가 소리쳤다. 잠시 뒤 러시아인 무리가 피에르를 에워쌌다.

피에르는 오랫동안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주위에서는 동료들이 기뻐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형제들이여! 소중한 벗들! 사랑하는 이들이여!” 늙은 병사들은 울면서 카자크와 경기병들을 끌어안고 외쳤다.

경기병과 카자크들이 포로들 주위에 몰려들어 누구는 옷을, 누구는 장화를, 또 누구는 빵을 내놓았다. 피에르는 그들 사이에 앉아 흐느끼며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는 가장 먼저 다가온 병사를 끌어안고 울며 입을 맞췄다.

돌로호프는 무너진 집의 문간에 서서 무장해제된 프랑스인 무리가 지나가게 했다. 프랑스인들은 벌어진 모든 일에 흥분하여 자기들끼리 큰 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러나 채찍으로 장화를 가볍게 툭툭 치면서 불길한 기운이 서린 차갑고 유리 같은 눈으로 그들을 지켜보는 돌로호프 곁을 지날 때는 입을 다물었다. 맞은편에는 돌로호프의 카자크가 서서 포로의 수를 세고 백 명마다 문에 분필로 금을 그었다.

“몇 명이지?” 돌로호프가 카자크에게 물었다.

“두 번째 백 명입니다.” 카자크가 대답했다.

“Filez, filez!”* 돌로호프는 프랑스인들에게서 배운 이 말을 계속했다. 포로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그의 눈은 잔혹한 빛을 번뜩였다.

* “어서 가, 어서 가!”

데니소프는 모자를 벗은 음울한 얼굴로, 정원에 파놓은 구덩이를 향해 페탸 로스토프의 시신을 운반하는 카자크들 뒤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