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 / 제13권 1812년 / 제1장
《전쟁과 평화》 · 제13권 1812년

제1장

《전쟁과 평화》 제13권 1장 삽화

인간의 정신은 사건의 원인을 완전하게 파악할 수 없지만, 그 원인을 찾으려는 욕구는 인간의 영혼에 심어져 있다. 그리고 각각 따로 떼어 놓으면 원인처럼 보일 수 있는 조건들의 무수함과 복잡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이해할 수 있어 보이는 원인의 첫 번째 근사치를 붙잡고 “이것이 원인이다!”라고 말한다. 인간의 행동을 관찰 대상으로 삼는 역사적 사건에서 가장 먼저 나타나는 원시적인 근사치는 신들의 의지였고, 그다음에는 가장 두드러진 위치에 선 사람들, 곧 역사의 영웅들의 의지였다. 그러나 어떤 역사적 사건이든 그 본질—그 사건에 참여하는 사람들 전체의 활동—을 파고들기만 하면, 역사적 영웅의 의지가 대중의 행동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지 자체가 끊임없이 지배받고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든 저런 식으로 이해하든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서방 민족들이 동방으로 이동한 것은 나폴레옹이 원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과,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 사이에는, 지구가 정지해 있고 행성들이 그 주위를 돈다고 주장한 사람들과 지구를 무엇이 떠받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지구와 다른 행성들의 운동을 지배하는 법칙이 있음을 인정한 사람들 사이만큼 큰 차이가 있다. 모든 원인의 근원인 단 하나의 원인을 제외하면 역사적 사건의 원인은 없으며 있을 수도 없다. 그러나 사건을 지배하는 법칙은 존재한다. 그 가운데 일부는 우리가 알고 있으며, 또 일부는 이해할 수 없음을 의식할 뿐이다. 어떤 한 사람의 의지에서 원인을 찾으려는 시도를 완전히 포기할 때에만 이 법칙들을 발견할 수 있다. 사람들이 지구가 고정되어 있다는 관념을 버린 뒤에야 행성 운동의 법칙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과 같다.

역사가들은 보로디노 전투와 적의 모스크바 점령, 화재에 의한 모스크바 파괴 다음으로 1812년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러시아군이 랴잔 길에서 칼루가 길로 옮겨 타루티노 진영에 이른 일, 곧 크라스나야 파흐라강을 가로지른 이른바 측면 행군이라고 본다. 그들은 이 천재적 위업의 영예를 여러 사람에게 돌리며 누구에게 그 공이 돌아가야 하는지를 두고 다툰다. 프랑스인을 포함한 외국 역사가들조차 이 측면 행군을 말할 때 러시아 지휘관들의 천재성을 인정한다. 하지만 군사 저술가들과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왜 이 측면 행군을 러시아를 구하고 나폴레옹을 파멸시킨 어느 한 사람의 심오한 구상으로 여기는지는 이해하기 어렵다. 우선 이 이동에서 심오함과 천재성이 어디에 있는지 알기 어렵다. 공격받고 있지 않을 때 군대에 가장 좋은 위치는 군수품이 가장 많은 곳이라는 사실을 알아보는 데는 그리 많은 정신적 노력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머리가 둔한 열세 살 소년조차 1812년 모스크바에서 퇴각한 군대에 가장 좋은 위치가 칼루가 길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역사가들이 무슨 추론으로 이 기동이 심오한 것이었다는 결론에 이르는지는 이해할 수 없다. 더구나 그들이 왜 이 기동을 러시아를 구하고 프랑스군을 파멸시키도록 계산된 것으로 보는지는 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이 측면 행군에 다른 상황이 앞서거나 동반하거나 뒤따랐다면 러시아군에는 파멸을, 프랑스군에는 구원을 가져올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군의 처지가 실제로 그 행군 이후 좋아지기 시작했다 하더라도, 그 행군이 원인이었다는 결론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 측면 행군은 러시아군에 어떤 이점도 주지 못했을 뿐 아니라, 다른 상황에서는 러시아군을 파멸로 이끌 수도 있었다. 모스크바가 불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뮈라가 러시아군을 놓치지 않았다면? 나폴레옹이 무기력하게 머물러 있지 않았다면? 크라스나야 파흐라에서 러시아군이 베니히센과 바클라이의 조언대로 전투를 벌였다면? 프랑스군이 러시아군이 파흐라강 너머로 행군하는 동안 공격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타루티노에 접근한 나폴레옹이 스몰렌스크에서 러시아군을 공격할 때 보인 기세의 십분의 일만으로도 공격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프랑스군이 페테르부르크로 진군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 가운데 어느 하나만 일어났어도 구원을 가져온 측면 행군은 파멸을 가져올 수 있었다.

세 번째이자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이 측면 행군을 어느 한 사람에게 돌릴 수 없으며 누구도 그것을 미리 내다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일부러 외면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것은 필리에서의 퇴각과 마찬가지로 어느 누구에게도 전체 모습으로 떠오른 것이 아니라, 끝없이 많고 서로 몹시 다른 상황들에서 순간순간, 한 걸음 한 걸음, 사건 하나하나를 거쳐 생겨났다. 모든 일이 이루어져 과거가 된 뒤에야 비로소 전체 모습으로 보였다.

필리 회의에서 러시아 지휘관들의 마음을 지배한 생각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한 가지, 곧 니즈니 길을 따라 곧장 퇴각하는 것이었다. 회의 참석자 대다수가 그런 퇴각에 찬성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며, 무엇보다 회의 뒤 총사령관과 군수 부문 책임자 란스코이 사이에 오간 널리 알려진 대화가 증명한다. 란스코이는 군대의 보급품 대부분이 오카강을 따라 툴라 현과 랴잔 현에 저장되어 있으며, 니즈니로 퇴각하면 초겨울에는 건널 수 없는 넓은 오카강 때문에 군대가 보급품과 떨어지게 된다고 총사령관에게 알렸다. 이것이 전에는 가장 자연스러워 보였던 길, 곧 니즈니노브고로드로 곧장 퇴각하는 길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음을 처음으로 알려 준 계기였다. 군대는 랴잔 길을 따라 보급품에 더 가까운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 뒤 프랑스군이 무기력하게 지내 러시아군의 종적마저 놓친 일, 툴라의 무기고 안전에 대한 염려, 특히 보급품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이점 때문에 군대는 툴라 길을 향해 더욱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파흐라강 너머에서 강행군으로 툴라 길에 옮겨 간 러시아 지휘관들은 포돌스크에 머무를 생각이었으며 타루티노 진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수없이 많은 상황과, 한동안 러시아군과의 접촉을 잃었던 프랑스군의 재등장, 전투를 벌이려는 계획, 무엇보다 칼루가 현의 풍부한 보급품 때문에 아군은 더욱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했다. 보급품이 놓인 길들 사이에 있는 타루티노로 가기 위해 툴라 길에서 칼루가 길로 건너간 것이다. 모스크바 포기가 언제 결정되었는지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언제 누구에 의해 타루티노로 이동하기로 결정되었는지도 정확히 말할 수 없다. 서로 다르고 무수한 힘들의 결과로 군대가 그곳에 도착하고 나서야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 이동을 원했고 오래전부터 그 결과를 내다보았다고 스스로 확신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