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 / 제12권 1812년 / 제6장
《전쟁과 평화》 · 제12권 1812년

제6장

《전쟁과 평화》 제12권 6장 삽화

로스토프를 만난 뒤 모스크바에 도착한 마리야 공작 영애는 그곳에서 가정교사와 함께 있는 조카와, 보론네시의 말빈체바 아주머니에게 가는 방법을 일러 준 안드레이 공작의 편지를 발견했다. 아버지가 병상에 있을 때부터 그녀를 괴롭혔고, 아버지가 죽은 뒤, 특히 로스토프를 만난 뒤에는 더욱 심해진 유혹과도 같은 감정은 여행 준비와 오라버니에 대한 걱정, 새집에 자리 잡는 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일, 조카의 교육을 보살피는 일에 눌려 잠잠해졌다. 그녀는 슬펐다. 이제 조용한 환경에서 한 달을 보내고 나자, 러시아의 파멸과 한데 얽혀 마음에 새겨진 아버지의 죽음을 갈수록 더 깊이 느꼈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가까운 사람인 오라버니가 맞닥뜨린 위험을 생각하면 마음이 동요했고 끊임없이 괴로웠다. 자신은 늘 감당할 능력이 없다고 여겼던 조카의 교육도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영혼 깊은 곳에는 평온이 있었다. 로스토프와의 만남으로 마음속에서 막 깨어나려던 개인적인 꿈과 희망을 억눌렀다는 자각에서 오는 평온이었다.

그 야회 다음 날, 총독 부인은 말빈체바 부인을 찾아와 아주머니와 자신의 계획을 의논했다. 현재 상황에서는 정식 약혼을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물론이지만, 그래도 젊은 두 사람을 만나게 해 서로를 알아가도록 할 수는 있다고 말했다. 말빈체바 부인은 찬성했고, 총독 부인은 마리야가 있는 자리에서 로스토프 이야기를 꺼내 그를 칭찬하고 마리야 공작 영애의 이름이 나오자 그가 어떻게 얼굴을 붉혔는지 들려주었다. 그러나 마리야 공작 영애가 느낀 것은 기쁨이라기보다 고통이었다. 마음의 평온이 깨지고 욕망과 의심, 자책과 희망이 다시 깨어났다.

로스토프가 방문하기 전 이틀 동안 마리야 공작 영애는 그에게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줄곧 생각했다. 처음에는 그가 아주머니를 만나러 왔을 때 응접실에 내려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깊은 상중인 자신이 손님을 맞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그가 자신을 위해 해 준 일을 생각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무례하다고 여겼다. 다음에는 아주머니와 총독 부인이 자신과 로스토프를 두고 어떤 뜻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눈길과 말이 때로는 그 추측을 뒷받침하는 듯했다. 그러면 그녀는 사악한 본성을 지닌 자기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스스로 타일렀다. 아직 깊은 상복을 입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그들이 잊고 그런 중매를 꾀한다면, 그것은 자신과 아버지의 기억을 모욕하는 일이 될 터였다. 그를 만나러 내려간다고 가정하면, 마리야 공작 영애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자신은 무슨 말을 할지 상상했다. 그 말들은 때로는 부당할 만큼 차갑게 느껴졌고, 때로는 지나치게 많은 뜻을 담은 듯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자기가 느끼는 당혹감에 압도되어 그를 보는 순간 마음을 들킬까 두려웠다.

그러나 일요일 예배가 끝난 뒤 하인이 응접실에 로스토프 백작이 찾아왔다고 알렸을 때, 공작 영애는 전혀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두 뺨에 희미한 홍조가 번지고 눈에는 새롭고 찬란한 빛이 켜졌을 뿐이었다.

“아주머니께서는 그분을 만나 보셨나요?”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가 겉으로 이토록 침착하고 자연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자신도 이해하지 못했다.

로스토프가 방으로 들어오자 공작 영애는 손님이 아주머니에게 인사할 시간을 주려는 듯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다가 니콜라이가 그녀를 향해 돌아서는 순간 고개를 들고 빛나는 눈으로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 품위와 우아함이 넘치는 몸짓으로 기쁘게 미소 지으며 반쯤 일어나 가늘고 섬세한 손을 내밀고는, 처음으로 깊고 새로운 여인의 울림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응접실에 있던 부리엔 양은 어리둥절할 만큼 놀라 마리야 공작 영애를 바라보았다. 노련한 교태의 명수인 그녀 자신도 마음을 끌고 싶은 남자를 만났을 때 그보다 더 훌륭하게 처신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검은 옷이 저분에게 특별히 잘 어울리는 걸까, 아니면 내가 모르는 사이 정말 훨씬 아름다워진 걸까? 무엇보다 저 재치와 우아함이라니!’ 부리엔 양은 생각했다.

그 순간 마리야 공작 영애에게 생각할 여유가 있었다면, 자기 안에서 일어난 변화에 부리엔 양보다 더 놀랐을 것이다. 그토록 소중하고 사랑하는 얼굴을 알아본 순간부터 새로운 생명력이 그녀를 사로잡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말하고 행동하게 했다. 로스토프가 들어온 순간부터 그녀의 얼굴은 갑자기 변모했다. 마치 조각하고 채색한 등불 안에 불이 켜져, 전에는 어둡고 투박하고 무의미하게 보였던 등갓의 복잡하고 정교하며 예술적인 세공이 뜻밖의 눈부신 아름다움으로 갑자기 드러난 것 같았다. 그녀가 겪어 온 순수하고 영적인 내면의 고뇌가 처음으로 겉에 나타났다. 그 모든 내면의 노력, 자신에 대한 불만, 고통, 선을 향한 갈망, 온유함, 사랑과 자기희생이 이제는 빛나는 두 눈과 섬세한 미소와 부드러운 얼굴의 모든 윤곽에서 찬란히 빛났다.

로스토프는 마치 그녀의 일생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처럼 이 모든 것을 분명히 보았다. 눈앞의 존재는 자신이 전에 만난 누구와도 전혀 다르고 더 훌륭하며, 무엇보다 자기 자신보다 훨씬 훌륭하다고 느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아주 단순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들은 전쟁을 이야기하며 다른 모든 사람처럼 자기도 모르게 그 일에 대한 슬픔을 과장했고, 지난번 만남을 이야기했는데 니콜라이는 화제를 바꾸려 애썼다. 또 총독의 친절한 부인과 니콜라이의 친척들, 마리야 공작 영애의 친척들을 이야기했다.

그녀는 오라버니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아주머니가 안드레이를 언급하자 곧 대화의 방향을 돌렸다. 러시아의 불행은 어느 정도 꾸며 낸 태도로 이야기할 수 있었지만, 오라버니는 그녀의 마음에 너무 가까이 있었으므로 그에 관해 가볍게 말할 수도, 말하고 싶지도 않은 것이 분명했다. 니콜라이는 평소 그답지 않은 세심한 관찰력으로 마리야 공작 영애 성품의 온갖 미묘한 빛깔을 알아차렸고, 모든 것이 그녀가 아주 유별나고 비범한 존재라는 그의 확신을 굳혀 주었다. 사람들이 공작 영애에 관해 말하거나 그녀를 생각하기만 해도 니콜라이는 얼굴을 붉히고 당황했다. 공작 영애도 그의 이름이 나오면 그랬다. 그러나 막상 그녀 앞에서는 아주 편안해서 미리 준비한 말이 아니라 순간순간 떠오르는, 상황에 꼭 맞는 말을 했다.

짧은 방문 도중 대화가 끊기자 니콜라이는 아이들이 있을 때 흔히 그러듯 안드레이 공작의 어린 아들에게로 몸을 돌렸다. 아이를 어루만지며 경기병이 되고 싶으냐고 물었다. 그는 아이를 무릎에 앉혀 놀아 주다가 마리야 공작 영애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부드럽고 행복하면서도 수줍은 눈길로, 사랑하는 남자의 품에 안긴 사랑하는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니콜라이도 그 눈길을 알아차렸고, 그 뜻을 이해한 듯 기쁨으로 얼굴을 붉히며 선량하고 장난스러운 태도로 아이에게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상중이어서 마리야 공작 영애는 사교계에 나가지 않았고, 니콜라이도 그녀를 다시 방문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총독 부인은 중매를 계속하면서, 마리야 공작 영애가 그를 칭찬한 말을 니콜라이에게, 니콜라이가 그녀를 칭찬한 말을 마리야 공작 영애에게 전하고는, 니콜라이에게 공작 영애를 향한 마음을 밝히라고 끈질기게 권했다. 이를 위해 총독 부인은 미사 전에 주교의 집에서 두 젊은이가 만나도록 자리를 마련했다.

로스토프는 총독 부인에게 마리야 공작 영애에게 어떤 고백도 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그 자리에 가겠다고 약속했다.

틸지트에서 모든 사람이 옳다고 여기는 것은 옳다는 사실을 스스로 의심하려 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제도 로스토프는 자기 나름의 정의감에 따라 삶을 정리하려는 노력과 주어진 상황에 순종하려는 마음 사이에서 짧지만 진실한 투쟁을 벌인 끝에 후자를 택했다. 그는 자신을 어디론가 저항할 수 없이 끌고 가는 힘에 몸을 맡겼다. 소냐에게 약속한 뒤 마리야 공작 영애에게 자기 감정을 밝히는 것은 자신이 비열하다고 여기는 짓임을 알았다. 그리고 자신은 결코 비열하게 행동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지금 상황의 힘과 자신을 이끄는 사람들에게 몸을 맡기는 것은 그릇된 일을 하지 않는 것일 뿐 아니라, 이제껏 살면서 한 어떤 일보다도 중요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그는 알고 있었다. 아니, 마음 깊은 곳에서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마리야 공작 영애를 만난 뒤에도 그의 생활은 겉으로 전과 다름없이 흘러갔지만, 예전의 모든 오락은 그에게 매력을 잃었고 그는 자주 그녀를 생각했다. 그러나 사교계에서 만난 모든 젊은 아가씨를 생각하던 방식으로 그녀를 생각하지는 않았으며, 오랫동안, 한때는 황홀하게 소냐를 생각하던 방식으로도 생각하지 않았다. 거의 모든 마음씨 바른 젊은이들이 그러듯 그는 그 아가씨들을 하나같이 장래의 아내로 상상하고, 결혼 생활의 모든 조건에 맞춰 보곤 했다. 흰 실내복, 찻상 앞의 아내, 아내의 마차, 어린아이들, 어머니와 아버지, 그들과 아내의 관계 따위를 그려 보았고, 그런 미래의 광경은 그에게 즐거움을 주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약혼시키려 하는 마리야 공작 영애를 두고는 장래의 결혼 생활을 전혀 그려 볼 수 없었다. 그려 보려고 하면 어울리지 않고 거짓된 광경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그를 두렵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