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 / 제8권 1811~1812년 / 제5장
《전쟁과 평화》 · 제8권 1811~1812년

제5장

《전쟁과 평화》 제8권 5장 삽화

보리스는 페테르부르크에서 부유한 혼처를 얻는 데 성공하지 못해 같은 목적을 품고 모스크바로 왔다. 모스크바에서 그는 가장 부유한 두 상속녀인 줄리와 마리야 공작 영애 사이에서 망설였다. 마리야 공작 영애는 못생겼는데도 줄리보다 더 매력적으로 보였지만, 보리스는 까닭도 모른 채 그녀에게 구애하기가 어색했다. 늙은 공작의 명명 축일에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마리야 공작 영애는 그의 감상적인 대화 시도에 아무렇게나 대답했고, 그가 하는 말을 전혀 듣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반대로 줄리는 보리스의 관심을 자기 특유의 방식으로 선뜻 받아들였다.

줄리는 스물일곱 살이었다. 형제들이 죽은 뒤 아주 부유해졌다. 이제는 누가 보아도 못생겼지만 자신은 예전만큼 아름다울 뿐 아니라 훨씬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아주 부유한 상속녀가 되었다는 사실과, 나이가 들수록 남자들에게 덜 위험한 존재가 되어 그들이 아무 의무도 짊어지지 않고 더 자유롭게 어울리며 그녀의 만찬과 야회와 집에 모이는 활기찬 일행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이 이 착각을 더욱 굳혀 주었다. 10년 전이라면 열일곱 살 처녀가 있는 집에 날마다 드나들 경우 그 처녀의 평판을 해치고 자신도 책임져야 할까 두려워했을 남자도 이제는 날마다 대담하게 찾아와, 줄리를 혼기가 찬 처녀가 아니라 성별 없는 지인처럼 대했다.

그해 겨울 카라긴가의 집은 모스크바에서 가장 즐겁고 손님이 많이 모이는 곳이었다. 격식을 갖춘 야회와 만찬 외에도 주로 남자들인 많은 사람이 날마다 모여 자정에 저녁을 먹고 새벽 세 시까지 머물렀다. 줄리는 무도회와 산책과 연극을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옷은 언제나 최신 유행이었다. 그런데도 모든 것에 환멸을 느낀 듯 보였고, 누구에게나 우정도 사랑도 삶의 어떤 기쁨도 믿지 않으며 오직 ‘저세상’에서만 평안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사랑하는 남자를 잃었거나 그에게 잔인하게 속은 처녀처럼 커다란 실망을 겪은 사람의 어조를 취했다. 실제로 그런 일은 전혀 없었지만 사람들은 줄리를 그렇게 보았고, 그녀 자신도 인생에서 몹시 고통받았다고 믿게 되었다. 이 우울함은 줄리가 즐기는 데도, 그 집을 찾는 젊은이들이 유쾌하게 시간을 보내는 데도 방해가 되지 않았다. 방문객은 누구나 여주인의 우울한 기분에 마땅한 경의를 표한 뒤 사교계 소문과 춤, 지적인 놀이와 카라긴가에서 유행하던 각운 맞추기(*bouts rimés*)를 즐겼다. 보리스를 비롯한 몇몇 젊은이만 줄리의 우울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줄리는 그들과 세상 모든 것의 허무를 두고 오랫동안 은밀히 이야기하며 슬픈 그림과 격언과 시로 가득한 앨범을 보여 주었다.

줄리는 보리스에게 특히 다정했다. 그가 일찍부터 삶에 환멸을 느낀 것을 안타까워하며, 자신처럼 많은 고통을 겪은 사람이 줄 수 있는 우정의 위안을 건네고 앨범을 보여 주었다. 보리스는 앨범에 나무 두 그루를 그리고 이렇게 썼다. “시골의 나무들이여, 그대들의 어두운 가지가 내게 침울함과 우울을 드리운다.”

다른 쪽에는 무덤을 그리고 이렇게 썼다.

죽음은 구원을 주고 죽음은 평온하다. 아! 고통을 피할 다른 안식처는 없다. (*La mort est secourable et la mort est tranquille.* *Ah! contre les douleurs il n’y a pas d’autre asile.*)*

* 죽음은 구원을 주고 죽음은 평온하다. 아! 고통을 피할 다른 안식처는 없다.

줄리는 매혹적이라고 말했다.

“우울한 미소에는 그토록 매혹적인 무언가가 있어요.” 줄리는 책에서 베낀 구절을 한마디도 바꾸지 않고 보리스에게 말했다. “그것은 어둠 속의 한 줄기 빛이며, 슬픔과 절망 사이에 드리운 그늘이고, 위안의 가능성을 보여 주지요.”

보리스는 답으로 다음 구절을 썼다.

지나치게 예민한 영혼의 독이 든 양식이여, 그대 없이는 내게 행복이 불가능하리니, 다정한 우울이여, 아, 와서 나를 위로해 다오. 와서 어두운 은둔의 고통을 달래고, 내가 흘러내림을 느끼는 이 눈물에 은밀한 달콤함을 섞어 다오. (*Aliment de poison d’une âme trop sensible,* *Toi, sans qui le bonheur me serait impossible,* *Tendre mélancholie, ah, viens me consoler,* *Viens calmer les tourments de ma sombre retraite,* *Et mêle une douceur secrète* *A ces pleurs que je sens couler.*)*

* 지나치게 예민한 영혼의 독이 든 양식이여, 그대 없이는 내게 행복이 불가능하리니, 다정한 우울이여, 아, 와서 나를 위로해 다오. 와서 어두운 은둔의 고통을 달래고, 내가 흘러내림을 느끼는 이 눈물에 은밀한 달콤함을 섞어 다오.

줄리는 보리스를 위해 하프로 더없이 슬픈 야상곡을 연주했다. 보리스는 《가엾은 리자》를 소리 내어 읽어 주다가 북받치는 감정 때문에 여러 번 낭독을 멈추었다.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 만나면 줄리와 보리스는 무관심한 사람들의 세계에서 서로를 이해하는 유일한 영혼인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카라긴가를 자주 방문한 안나 미하일로브나는 어머니와 카드놀이를 하면서 줄리의 지참금이 얼마인지 조심스럽게 캐물었다. 줄리는 펜자에 영지 두 곳과 니제고로드의 숲을 받게 되어 있었다. 안나 미하일로브나는 아들과 부유한 줄리를 하나로 묶은 세련된 슬픔을 감동과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사랑하는 줄리, 아가씨는 언제나 매력적이고 우울하군요.” 안나 미하일로브나가 줄리에게 말했다. 어머니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보리스는 이 집에서 영혼의 안식을 얻는다고 해요. 그 아이는 너무나 많은 실망을 겪었고 몹시 예민하답니다.” 아들에게는 말했다. “아, 얘야, 요즘 내가 줄리를 얼마나 사랑하게 되었는지 말로 다 할 수 없구나. 누가 그 아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니? 천사 같은 존재야! 아, 보리스, 보리스!” 그녀는 말을 멈췄다가 계속했다. “그 아이 어머니가 얼마나 가여운지 몰라. 오늘 펜자에서 온 장부와 편지를 보여 주었단다. 그곳에 엄청난 영지가 있는데도 가엾게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 사람들이 얼마나 속이는지!”

보리스는 어머니의 말을 들으며 거의 알아차릴 수 없게 미소 지었다. 어머니의 순진한 외교술을 부드럽게 비웃었지만 그녀가 하는 말을 귀담아들었고, 때로는 펜자와 니제고로드 영지에 관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줄리는 우울한 숭배자에게서 청혼을 받은 지 오래되었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줄리 자신과, 결혼을 향한 그녀의 열렬한 갈망과, 꾸며 낸 태도에 대한 은밀한 혐오감, 그리고 진정한 사랑의 가능성을 포기한다는 데 대한 두려움이 여전히 보리스를 붙잡았다. 휴가는 끝나 가고 있었다. 그는 날마다, 온종일 카라긴가에서 지냈으며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내일 청혼하리라고 자신에게 말했다. 그러나 줄리 곁에서 거의 언제나 분을 바른 붉은 얼굴과 턱, 촉촉한 두 눈, 우울에서 부자연스러운 결혼의 환희로 즉시 넘어갈 준비가 늘 되어 있는 표정을 보면 결정적인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상상 속에서는 이미 자신을 펜자와 니제고로드 영지의 소유자로 여기고 거기서 나오는 수입의 용도까지 나누어 두었는데도 그랬다. 줄리는 보리스의 망설임을 보았고 때로는 자신이 그에게 혐오스러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자의 자기기만은 즉시 위안을 마련해 주었고, 보리스가 사랑 때문에 수줍어할 뿐이라고 자신에게 말했다. 그래도 우울은 짜증으로 바뀌기 시작했고, 보리스가 떠나기 얼마 전 줄리는 확실한 행동 계획을 세웠다. 보리스의 휴가가 끝나려 할 때 아나톨 쿠라긴이 모스크바에, 당연히 카라긴가 응접실에도 나타났다. 줄리는 갑자기 우울을 버리고 명랑해져 쿠라긴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얘야.” 안나 미하일로브나가 아들에게 말했다. “믿을 만한 곳에서 들었는데 바실리 공작이 아들을 줄리와 결혼시키려고 모스크바로 보냈다는구나. 나는 줄리를 너무 사랑해서 그 아이가 가여울 것 같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얘야?”

자신이 웃음거리가 되고, 줄리를 위해 한 달 내내 힘겹게 우울한 봉사를 한 것이 헛수고가 되며, 마음속으로 이미 나누고 유용하게 쓸 곳까지 정해 둔 펜자 영지의 모든 수입이 다른 사람, 특히 저 바보 아나톨의 손에 들어간다고 생각하자 보리스는 괴로웠다. 그는 청혼하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카라긴가로 갔다. 줄리는 명랑하고 태평한 태도로 그를 맞아 어제 무도회가 얼마나 즐거웠는지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고 언제 떠나는지 물었다. 보리스는 일부러 사랑을 말하러 왔고 다정하게 굴 생각이었지만, 여자들의 변덕스러움과 그들이 얼마나 쉽게 슬픔에서 기쁨으로 돌아서며 기분은 오직 누가 구애하느냐에 달렸다는 이야기를 짜증스럽게 하기 시작했다. 줄리는 기분이 상해 여자에게는 변화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고 같은 일이 되풀이되면 누구든 싫증 난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아가씨에게 권하고 싶은 것은…….” 보리스는 그녀를 찌르려는 마음으로 말을 시작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모스크바를 떠나 애쓴 일을 헛수고로 만들 수도 있다는 괴로운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일은 그가 결코 허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문장 중간에서 멈추고 불쾌하게 짜증 난 채 망설이는 줄리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당신과 다투려고 이곳에 온 것은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보리스는 계속해도 되는지 확인하려고 줄리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짜증은 갑자기 완전히 사라졌고, 불안하게 간청하는 두 눈이 탐욕스러운 기대를 품고 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자주 만나지 않을 방법은 언제든 마련할 수 있어.’ 보리스는 생각했다. ‘일을 시작했으니 끝내야 한다!’ 얼굴을 뜨겁게 붉히고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당신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아시잖습니까!”

더 말할 필요는 없었다. 줄리의 얼굴은 승리와 자기만족으로 빛났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때에 하는 말, 곧 자신을 사랑하며 지금껏 다른 어떤 여자도 자신보다 더 사랑한 적이 없다는 말을 보리스에게 모두 하게 했다. 펜자 영지와 니제고로드 숲을 대가로 그것을 요구할 수 있음을 알았고, 요구한 것을 받아 냈다.

약혼한 두 사람은 이제 자신들에게 침울함과 우울을 드리우는 나무를 언급하지 않았다. 페테르부르크에 꾸밀 화려한 집의 배치를 계획하고 사람들을 방문하며 성대한 결혼식을 위한 모든 것을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