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 / 제8권 1811~1812년 / 제1장
《전쟁과 평화》 · 제8권 1811~1812년

제1장

《전쟁과 평화》 제8권 1장 삽화

안드레이 공작이 나타샤와 약혼한 뒤, 피에르는 뚜렷한 이유도 없이 갑자기 예전처럼 계속 살아갈 수 없다고 느꼈다. 은인이 자신에게 밝혀 준 진리를 굳게 믿었고, 그토록 열렬히 몰두해 온 내면의 인간을 완성하는 일에서 행복을 느꼈지만, 안드레이와 나타샤의 약혼과 거의 동시에 소식이 전해진 요시프 알렉세예비치의 죽음 뒤에는 그런 삶의 의욕이 모두 사라졌다. 삶의 앙상한 뼈대만 남았다. 그의 집과, 이제 어느 대단히 높은 인물의 총애를 받는 화려한 아내와, 페테르부르크의 모든 사람과 맺은 친분과, 따분한 격식뿐인 궁정 업무였다. 그런 삶이 갑자기 피에르에게 뜻밖에도 혐오스럽게 느껴졌다. 그는 일기를 쓰지 않고 형제들과의 교제를 피했으며 다시 클럽에 나가고 술을 많이 마시기 시작했다. 독신 남자들의 무리와 또다시 어울려 살다 보니 엘렌 백작부인이 엄한 말을 해야 할 필요를 느낄 정도가 되었다. 피에르는 아내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고 그녀의 명예를 손상하지 않으려고 모스크바로 떠났다.

모스크바에 도착해, 빛이 바랬거나 바래 가는 공작 가문의 노부인들이 여전히 수많은 시종과 함께 사는 자신의 거대한 집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피에르는 편안함을 느꼈다. 마차를 타고 시내를 지나며 황금빛 성상 덮개 앞에 무수한 촛불이 타오르는 이베르 성모 성상 예배당과, 수레가 지나간 흔적 없이 눈 덮인 크렘린 광장과, 시브체프 브라조크의 썰매 마부들과 초라한 오두막들을 보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어디로도 서두르지 않으며 느긋하게 여생을 마쳐 가는 오래된 모스크바 사람들, 모스크바의 노부인들, 모스크바의 무도회, 영국 클럽을 보자 그는 고요한 항구에 돌아온 듯했다. 모스크바에서 피에르는 오래된 실내복을 입은 것처럼 평온하고 편안하고 따뜻하고 지저분한 기분을 느꼈다.

노파에서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모스크바 사교계는 언제나 자리를 마련해 두고 기다렸던 오랜 손님처럼 피에르를 맞았다. 모스크바 사교계에서 피에르는 가장 상냥하고 친절하며 지적이고 명랑하고 너그러운 괴짜이자, 무심하면서도 호인이며 옛 러시아 유형의 귀족이었다. 그의 지갑은 모두에게 열려 있었으므로 언제나 비어 있었다.

자선 공연, 형편없는 그림과 조각상, 자선 단체, 집시 합창단, 학교, 회비를 모아 여는 만찬, 술잔치, 프리메이슨, 교회, 책을 막론하고 그가 거절하는 사람이나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에게서 거액을 빌려 간 친구 두 명이 그를 보호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모든 것을 남에게 주어 버렸을 것이다. 그가 빠지는 클럽의 만찬이나 야회는 한 번도 없었다. 마르고 포도주 두 병을 마시고 소파의 자기 자리에 털썩 앉기만 하면 사람들이 그를 에워쌌고 이야기와 논쟁과 농담이 시작되었다. 다툼이 벌어지면 그의 다정한 미소와 때맞춰 던지는 농담이 양쪽을 화해시켰다. 피에르가 없는 프리메이슨 만찬은 따분하고 음울했다.

독신 남자들의 만찬이 끝난 뒤, 함께 어딘가로 놀러 가자는 흥겨운 일행의 간청에 못 이겨 피에르가 상냥하고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면 젊은이들 사이에서 기쁨과 승리의 함성이 터졌다. 무도회에서는 상대가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춤을 추었다. 미혼이든 기혼이든 젊은 여자들은 피에르를 좋아했다. 그가 누구에게도 구애하지 않으면서 모두에게 똑같이 상냥했기 때문이며, 특히 저녁 식사 뒤에는 더욱 그러했다. 사람들은 그를 두고 “매력적인 분이야. 성별이 없는 사람 같아(Il est charmant; il n’a pas de sexe).”*라고 말했다.

* “그는 매력적이다. 성별이 없다.”

피에르는 모스크바에서 좋은 성품으로 여생을 보내는 수백 명의 퇴임한 궁정 시종관 가운데 하나였다.

7년 전 외국에서 처음 돌아왔을 때, 자신은 아무것도 찾거나 계획할 필요가 없고 이미 오래전에 인생의 틀이 만들어져 영원히 정해졌으며 아무리 몸부림쳐도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리라는 말을 들었다면 그는 얼마나 몸서리쳤을까! 그런 말을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한때는 진심으로 러시아에 공화국을 세우기를 열망하지 않았던가? 그다음에는 자신이 나폴레옹이 되기를, 또 철학자가 되기를, 그다음에는 전략가이자 나폴레옹의 정복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던가? 죄 많은 인류를 새롭게 하고 자신을 가장 높은 완성의 경지로 끌어올릴 가능성을 보았고 그것을 열렬히 바라지 않았던가? 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농노들을 해방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 모든 것 대신 지금 그는 부정한 아내를 둔 부유한 남편이자 먹고 마시기를 좋아하는 퇴임한 궁정 시종관이었다. 조끼 단추를 풀어 헤치고 정부를 조금 욕하기 좋아하는 모스크바 영국 클럽 회원이며 모스크바 사교계 모두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7년 전에 그토록 멸시했던 바로 그런 모스크바의 퇴임 궁정 시종관 가운데 하나라는 생각을 오랫동안 받아들이지 못했다.

때로는 자신이 이런 생활을 잠시만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러나 자신처럼 이 생활과 클럽에 잠시만 발을 들인다며 머리카락과 이가 온전히 남은 채 들어왔다가 머리카락도 이도 하나 남지 않은 뒤에야 떠난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생각하면 소스라쳤다.

자존심이 솟는 순간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 예전에 멸시했던 다른 퇴임 궁정 시종관들과 자신은 전혀 다르고 별개의 사람으로 느껴졌다. 그들은 공허하고 어리석으며 자기 처지에 만족하는 사람들이지만 ‘나는 여전히 불만을 느끼고 인류를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어쩌면 이 동료들도 모두 나처럼 몸부림치며 새롭고 자신만의 인생길을 찾았으나, 나처럼 환경과 사회와 혈통이라는, 인간이 저항할 수 없는 원초적인 힘에 떠밀려 지금의 처지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겸허해지는 순간이면 그는 이렇게 혼잣말했다. 모스크바에서 얼마 동안 지내자 운명을 함께하는 동료들을 더는 멸시하지 않고, 자신을 가엾게 여기듯 그들을 좋아하고 존중하며 가엾게 여기기 시작했다.

피에르는 이제 절망과 우울과 삶에 대한 혐오가 갑작스럽게 덮치는 고통을 겪지는 않았다. 하지만 전에 그런 격렬한 발작으로 나타났던 병은 내면으로 파고들어 한순간도 그를 떠나지 않았다. ‘무엇 때문에? 왜? 세상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당혹스러워하며 자신에게 물었고, 자기도 모르게 삶의 현상이 지닌 의미를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경험을 통해 그런 물음에는 답이 없음을 알았으므로 서둘러 생각을 떨쳐 내고 책을 집어 들거나 클럽 또는 아폴론 니콜라예비치의 집으로 달려가 시내 소문을 주고받았다.

‘자기 몸 말고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고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여자 가운데 하나인 엘렌을 사람들은 지성과 세련됨의 극치로 여기며 숭배한다.’ 피에르는 생각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위대할 때는 모두가 그를 멸시했지만, 이제 그가 가련한 광대가 되자 프란츠 황제는 불법적인 혼인으로 자기 딸을 그에게 주려 한다. 에스파냐 사람들은 가톨릭 성직자들을 통해 6월 14일 프랑스인들에게 거둔 승리를 하느님께 찬양하고, 프랑스인들도 가톨릭 성직자들을 통해 같은 6월 14일 에스파냐 사람들을 물리친 것을 찬양한다. 내 프리메이슨 형제들은 이웃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피로 맹세하면서도 가난한 이들을 위한 모금에는 1루블씩도 내지 않는다. 아스트라이아 지부는 ‘만나를 찾는 이들’ 지부에 맞서 음모를 꾸미고, 진짜 스코틀랜드식 양탄자와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 헌장을 두고 야단법석을 떤다. 그 헌장의 의미는 작성한 사람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모두 모욕을 용서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법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그 법을 기려 모스크바에 마흔 번 마흔 개의 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바로 어제 탈영병 하나가 채찍질을 당해 죽었고, 사랑과 용서라는 바로 그 법을 섬기는 사제는 처형되기 전 병사에게 입 맞출 십자가를 내주었다.’ 피에르는 이렇게 생각했다. 모두가 받아들이는 이 보편적인 기만은 아무리 익숙해져도 매번 새로운 일처럼 그를 놀라게 했다. ‘나는 이 기만과 혼란을 이해하지만 내가 보는 것을 어떻게 모두에게 말할 수 있을까? 말해 보려 했지만 그들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나와 똑같이 이해하면서도 보지 않으려고 애쓸 뿐이라는 것을 늘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원래 이럴 수밖에 없는 모양이군! 하지만 나는,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는 생각했다. 피에르에게는 많은 사람, 특히 러시아인들이 지닌 불행한 능력이 있었다. 선과 진실의 가능성을 보고 믿으면서도 삶의 악과 거짓을 너무나 뚜렷이 보아 그 삶에 진지하게 참여할 수 없는 능력이었다. 그가 보기에는 모든 활동 분야가 악과 기만에 얽혀 있었다. 무엇이 되려고 하든, 무슨 일을 하든 그 안의 악과 거짓이 그를 밀어내며 모든 활동의 길을 가로막았다. 그런데도 살아야 했고 할 일을 찾아야 했다. 풀 수 없는 이런 문제들의 무게를 견디기에는 너무나 끔찍했으므로 그는 그것들을 잊기 위해 온갖 오락에 자신을 내맡겼다. 온갖 사교 모임에 드나들고 술을 많이 마셨으며 그림을 사고 건축에 손을 댔다. 무엇보다도 책을 읽었다.

피에르는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읽고 또 읽었다. 집에 돌아와 시종들이 아직 겉옷을 벗겨 주는 동안에도 책을 집어 들고 읽기 시작했다. 독서에서 잠으로, 잠에서 클럽 응접실의 소문으로, 소문에서 술잔치와 여자들에게로, 술잔치에서 다시 소문과 독서와 술로 옮겨 갔다. 술은 갈수록 육체적 필요인 동시에 정신적 필요가 되었다. 의사들은 그의 비대한 몸에 술이 위험하다고 경고했지만 그는 많이 마셨다. 커다란 입에 기계적으로 포도주 몇 잔을 부어 넣어 몸속에 기분 좋은 온기가 돌고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며 어떤 생각이든 깊이 파고들지 않고 피상적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때에야 마음이 완전히 편안해졌다. 한두 병을 비운 뒤에야 전에는 자신을 두렵게 한 지독하게 엉킨 삶의 실타래가 생각만큼 무섭지 않다는 희미한 느낌이 들었다. 저녁이나 밤 식사 뒤 머리가 윙윙거리는 가운데 이야기를 나누거나 남의 말을 듣거나 책을 읽을 때도 그 실타래의 한 부분은 언제나 의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술기운 아래에서는 자신에게 말했다. ‘상관없어. 풀 수 있을 거야. 해답도 준비되어 있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어. 나중에 모두 생각해 내겠어!’ 그러나 그 ‘나중’은 오지 않았다.

아침에 빈속이 되면 예전의 모든 물음이 전과 다름없이 풀 수 없고 두려운 모습으로 나타났다. 피에르는 서둘러 책을 집어 들었고, 누군가 찾아오면 기뻐했다.

때때로 피에르는 전쟁터에서 적의 포화를 받으며 참호에 들어간 병사들이 할 일이 없을 때 위험을 더 쉽게 견디려고 애써 무언가 할 일을 찾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을 떠올렸다. 피에르에게는 모든 사람이 그런 병사처럼 보였다. 어떤 이는 야심에, 어떤 이는 카드에, 어떤 이는 법률 제정에, 어떤 이는 여자에, 어떤 이는 장난감에, 어떤 이는 말에, 어떤 이는 정치에, 어떤 이는 운동에, 어떤 이는 술에, 어떤 이는 국정에 빠져 삶을 피하려 했다. ‘하찮은 것도 없고 중요한 것도 없어. 모두 똑같아. 그저 저마다 할 수 있는 대로 그것에서 자신을 구하면 돼.’ 피에르는 생각했다. ‘그것을 보지만 않으면 돼. 그 끔찍한 그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