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 / 제3권 1805년 / 제5장
《전쟁과 평화》 · 제3권 1805년

제5장

《전쟁과 평화》 제3권 5장 삽화

모두 헤어졌지만, 침대에 들자마자 잠든 아나톨을 제외하고는 그날 밤 누구도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저 낯선 사람이 정말 내 남편이 되는 것일까? 그는 아주 친절해. 그래, 친절하다는 것이 가장 중요해.’ 마리야 공작 영애는 생각했다. 그러자 좀처럼 느껴 본 적 없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녀는 주위를 돌아보기가 무서웠다. 어두운 구석의 가리개 뒤에 누군가 서 있는 것 같았다. 그 누군가는 바로 그, 악마였고, 흰 이마와 검은 눈썹과 붉은 입술을 지닌 그 남자이기도 했다.

그녀는 종을 울려 하녀를 부르고 자기 방에서 함께 자 달라고 했다.

부리엔 양은 그날 저녁 온실 안을 오랫동안 오갔다. 누군가를 헛되이 기다리며, 때로는 그 누군가에게 미소 짓고 때로는 자신이 타락했다고 꾸짖는 ‘가엾은 어머니’의 상상 속 말을 떠올리며 스스로 눈물을 북돋웠다.

작은 공작부인은 침상이 엉망으로 정돈되었다고 하녀에게 투덜거렸다. 엎드릴 수도 옆으로 누울 수도 없었다. 어떤 자세를 취해도 거북하고 불편했다. 아나톨이 나타나면서 자신이 이렇지 않았고 모든 것이 가볍고 즐거웠던 시절을 생생하게 떠올렸기에, 이제 몸의 짐은 그 어느 때보다 무겁게 그녀를 짓눌렀다. 그녀는 실내복과 잠자리 모자를 쓴 채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졸리고 머리가 헝클어진 카티는 무거운 깃털 요를 세 번째로 두드리고 뒤집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온통 울퉁불퉁하고 움푹 팼다고 내가 말했잖아!” 작은 공작부인이 되풀이했다. “나도 기꺼이 잠들고 싶단 말이야. 그러니 내 잘못이 아니야!”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아이처럼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늙은 공작도 잠들지 못했다. 반쯤 잠든 티혼은 그가 화가 나서 방 안을 오가며 코웃음 치는 소리를 들었다. 늙은 공작은 딸을 통해 자신이 모욕당한 듯 느꼈다. 그 모욕은 자신이 아니라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다른 사람, 곧 딸에 관한 일이었기에 더욱 날카로웠다. 그는 이 모든 일을 숙고하여 무엇이 옳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결정하겠다고 계속 자신에게 말했지만, 그러기는커녕 점점 더 흥분하기만 했다.

‘처음 나타난 남자를 보고는 아버지도 다른 모든 것도 잊어버렸어. 위층으로 뛰어가 머리를 꾸미고 꼬리를 흔들며 평소와는 딴사람이 되었지! 아버지를 내던질 수 있어 기쁜 모양이야! 게다가 내가 알아차릴 줄 알았어. 흥…… 흥…… 흥! 저 멍청이가 부리엔만 바라보는 것을 내가 모를 줄 아나? 저 여자를 내보내야겠어. 그런데 딸은 어째서 그것을 알아차릴 자존심조차 없단 말인가? 자기 자신을 위한 자존심이 없다면 적어도 나를 생각해서라도 있어야지! 저 얼간이가 딸에게는 아무 관심도 없고 부리엔만 바라본다는 사실을 보여 줘야 해. 아니, 그 애에게는 자존심이 없어…… 하지만 내가 보여 주겠어…….’

늙은 공작은 아나톨이 부리엔 양에게 수작을 걸려 한다는 것과 딸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면 마리야 공작 영애의 자존심이 상하고, 자신의 목적, 곧 딸과 헤어지지 않는 일이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 생각으로 마음을 달랜 뒤 티혼을 불러 옷을 벗기게 했다.

‘대체 무슨 악마가 저자들을 이리 데려온 거야?’ 티혼이 메마른 늙은 몸과 희끗희끗한 가슴 위로 잠옷을 입혀 주는 동안 그는 생각했다. ‘내가 초대한 적도 없어. 얼마 남지도 않은 내 삶을 방해하러 온 거야.’

“빌어먹을 놈들!” 잠옷에 아직 머리가 가려진 채 그가 중얼거렸다.

티혼은 주인이 때때로 생각을 소리 내어 말하는 습관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잠옷 밖으로 나온 얼굴에 노여움과 추궁하는 빛이 떠올랐어도 한결같은 표정으로 대했다.

“잠자리에 들었느냐?” 공작이 물었다.

훌륭한 시종들이 모두 그렇듯 티혼은 주인의 생각이 어느 쪽으로 흐르는지를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 질문이 바실리 공작과 그 아들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두 분 모두 잠자리에 드셨고 불도 끄셨습니다, 공작님.”

“못된 것들…… 못된 것들…….” 공작은 빠르게 말하고, 슬리퍼에 발을 넣고 실내복 소매에 팔을 꿰더니 자신이 자는 긴 의자로 갔다.

아나톨과 부리엔 양은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가엾은 어머니’가 나타나기 전까지 이어지는 자신들의 연애 이야기 첫 부분을 서로 완전히 이해했다. 은밀히 할 말이 많다는 것을 알았기에 아침부터 단둘이 만날 기회를 찾고 있었다. 마리야 공작 영애가 평소 시각에 아버지의 방으로 갔을 때, 부리엔 양과 아나톨은 온실에서 만났다.

마리야 공작 영애는 유난히 떨리는 마음으로 서재 문 앞에 다가갔다. 그날 자신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모두가 아는 것뿐 아니라, 자신이 그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까지도 모두가 아는 것 같았다. 그녀는 티혼의 얼굴에서도, 복도에서 뜨거운 물을 들고 가다 마주쳐 깊이 허리를 굽혀 인사한 바실리 공작의 시종 얼굴에서도 그것을 읽었다.

그날 아침 늙은 공작은 딸을 대할 때 더없이 다정하고 세심했다. 마리야 공작 영애는 아버지의 그 애써 조심하는 표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산술 문제를 이해하지 못해 아버지의 메마른 두 손이 짜증스럽게 주먹을 쥐고, 그가 의자에서 일어나 딸에게서 멀어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할 때 그의 얼굴에 나타나는 바로 그 표정이었다.

그는 격식을 차려 딸을 대하며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너에 관한 제안을 받았다.” 그가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바실리 공작이 내 아름다운 눈을 보려고 자기 제자를 데리고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은 너도 짐작했으리라 생각한다.” 볼콘스키 공작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나톨을 ‘제자’라고 불렀다. “어젯밤 너를 두고 제안이 들어왔다. 너도 내 원칙을 아니 이 문제를 네게 맡기겠다.”

“그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아버지?” 공작 영애는 창백해졌다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어떻게 이해하느냐고!” 아버지가 화를 내며 외쳤다. “바실리 공작은 네가 며느릿감으로 마음에 들어 제자를 대신해 청혼한 것이다. 그렇게 이해하면 돼! ‘어떻게 이해하느냐’라니!…… 그래서 네게 묻는 거야!”

“아버지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공작 영애가 속삭였다.

“내가? 내가? 내가 무슨 상관이냐? 나는 빼고 생각해. 결혼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것을 알고 싶은 거다.”

공작 영애는 아버지가 이 일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는 때는 지금뿐이며 이 순간을 놓치면 영영 기회가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눈길을 받고 있으면 생각할 수 없고 오직 습관대로 복종하게 되리라고 느껴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저는 오직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싶습니다. 하지만 제 소망을 말씀드려야 한다면…….” 그녀는 말을 끝낼 틈도 없었다. 늙은 공작이 가로막았다.

“훌륭하구나!” 그가 외쳤다. “그자는 지참금과 함께 너를 데려가고, 부리엔 양까지 덤으로 데려가겠지. 그 여자가 아내 노릇을 하고 너는…….”

공작은 말을 멈췄다. 자신의 말이 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보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고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했다.

“됐다, 됐어. 농담을 한 것뿐이야!” 그가 말했다. “이것만 기억해라, 공작 영애야. 나는 처녀에게 선택할 완전한 권리가 있다는 원칙을 지킨다. 네게 자유를 주마. 다만 네 평생의 행복이 네 결정에 달려 있다는 것만 기억해라. 내 생각은 하지 마라!”

“하지만 저는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말할 필요 없어! 그자는 명령을 받으면 너든 누구든 결혼하겠지. 하지만 너에게는 선택할 자유가 있다…… 네 방으로 가서 생각한 뒤 한 시간 후에 돌아와 그 사람 앞에서 내게 대답해라. 예인지 아니오인지. 네가 기도하리라는 것은 안다. 그래, 원한다면 기도해라. 하지만 잘 생각해 보는 편이 낫다. 가거라! 예냐 아니냐, 예냐 아니냐, 예냐 아니냐!” 공작 영애가 안개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서재를 나간 뒤에도 그는 계속 외쳤다.

그녀의 운명은 결정되었고 행복하게 결정되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부리엔 양에 관해 한 말은 끔찍했다. 물론 사실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끔찍했고, 그녀는 그 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보거나 듣지 못한 채 온실을 똑바로 지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귀에 익은 부리엔 양의 속삭임에 정신이 들었다. 눈을 들자 두 걸음 앞에서 아나톨이 프랑스 여인을 끌어안고 무언가 속삭이는 것이 보였다. 잘생긴 얼굴에 경악한 표정을 띤 아나톨은 마리야 공작 영애를 바라보았지만, 아직 그녀를 보지 못한 부리엔 양의 허리에서 팔을 곧바로 떼지는 않았다.

‘누구지? 왜? 잠깐만!’ 아나톨의 얼굴은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마리야 공작 영애는 말없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침내 부리엔 양이 비명을 지르고 달아났다. 아나톨은 이 이상한 사건을 함께 웃자고 권하기라도 하듯 유쾌한 미소를 지으며 마리야 공작 영애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러고는 어깨를 으쓱한 뒤 자기 방으로 이어지는 문으로 갔다.

한 시간 뒤 티혼이 마리야 공작 영애를 늙은 공작에게 부르러 왔다. 바실리 공작도 그곳에 있다고 덧붙였다. 티혼이 왔을 때 마리야 공작 영애는 자기 방 소파에 앉아 흐느끼는 부리엔 양을 품에 안고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고 있었다. 평소의 고요한 빛을 온전히 되찾은 공작 영애의 아름다운 두 눈은 부리엔 양의 예쁜 얼굴을 부드러운 애정과 연민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에요, 공작 영애님. 저는 영원히 공작 영애님의 사랑을 잃고 말았어요!” 부리엔 양이 말했다.

“어째서요?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당신을 사랑해요.” 마리야 공작 영애가 말했다. “그리고 당신의 행복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겠어요.”

“하지만 저를 경멸하시겠지요. 그렇게 순결한 분은 정념에 이토록 휩쓸리는 일을 절대 이해하지 못하실 거예요. 아, 가엾은 우리 어머니만이…….”

“나는 아주 잘 이해해요.” 마리야 공작 영애는 슬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진정해요, 내 사랑. 나는 아버지께 가 볼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방을 나갔다.

바실리 공작은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다리 위에 높이 올려놓고 코담뱃갑을 손에 든 채 앉아 있었다. 마음속 깊이 감동한 나머지 자신의 감수성을 후회하면서도 우습게 여기는 듯, 얼굴에는 짙은 감격의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마리야 공작 영애가 들어오자 그는 서둘러 코담배를 한 꼬집 집어 들었다.

“아, 사랑하는 아이, 사랑하는 아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두 손을 잡으며 말을 꺼냈다. 그러고는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내 아들의 운명이 그대 손에 달렸소. 내가 언제나 딸처럼 사랑해 온 착하고 다정한 마리, 사랑하는 아이가 결정해 주시오!”

그는 뒤로 물러섰고 눈에는 진짜 눈물 한 방울이 맺혔다.

“흥…… 흥…….” 볼콘스키 공작이 코웃음을 쳤다. “공작이 자기 제자, 아니 아들을 대신해 네게 청혼하고 있다. 아나톨 쿠라긴 공작의 아내가 되고 싶으냐, 아니냐? 예인지 아니오인지 대답해라.” 그가 외쳤다. “그러면 나 역시 내 의견을 말할 권리를 갖겠다. 그래, 내 의견, 오직 내 의견만을 말이다.” 볼콘스키 공작은 애원하는 바실리 공작의 눈길에 답하며 그를 향해 덧붙였다. “예냐, 아니냐?”

“제 소망은 아버지를 결코 떠나지 않고, 제 삶을 아버지의 삶과 결코 떼어 놓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결혼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녀는 아름다운 두 눈으로 바실리 공작과 아버지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허튼소리! 말도 안 되는 소리! 허튼소리, 허튼소리, 허튼소리!” 볼콘스키 공작은 얼굴을 찡그리고 딸의 손을 잡으며 외쳤다. 그는 딸에게 입 맞추지 않고 이마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살짝 댔을 뿐이었으며, 딸이 얼굴을 찡그리고 소리를 낼 만큼 손을 세게 눌렀다.

바실리 공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랑하는 아이, 이 순간을 나는 결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해야겠소. 하지만 사랑하는 아이, 이토록 착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움직일 작은 희망도 우리에게 주지 않겠소? ‘어쩌면’이라고 말해 주시오…… 앞날은 아주 기니까. ‘어쩌면’이라고 말해 주시오.”

“공작님, 제가 말씀드린 것이 제 마음의 전부입니다. 영광스럽게 생각하지만, 저는 결코 공작님의 아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좋아, 그럼 이것으로 끝났군, 이 친구! 만나서 정말 반가웠네. 아주 반가웠어! 방으로 돌아가거라, 공작 영애야. 가거라!” 늙은 공작이 말했다. “자네를 만나서 정말, 정말 반가웠네.” 그는 바실리 공작을 껴안으며 되풀이했다.

‘나의 소명은 다른 것이야.’ 마리야 공작 영애는 생각했다. ‘내 소명은 다른 종류의 행복, 사랑과 자기희생의 행복으로 행복해지는 것이야.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가엾은 아멜리를 행복하게 해 주겠어. 그 여자는 그를 그토록 뜨겁게 사랑하고, 그토록 깊이 뉘우치고 있어. 두 사람의 혼사가 이루어지도록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겠어. 그가 부자가 아니라면 내가 재산을 주고, 아버지와 안드레이 오라버니에게 부탁하겠어. 그 여자가 그의 아내가 되면 나는 정말 행복할 거야. 그녀는 너무도 불행하고, 이국땅에서 홀로 의지할 데도 없어! 오, 하느님, 자신을 그토록 잊을 수 있었다니 그를 얼마나 열렬히 사랑하는 것일까! 어쩌면 나도 똑같이 행동했을지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