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 / 제3권 1805년 / 제2장
《전쟁과 평화》 · 제3권 1805년

제2장

《전쟁과 평화》 제3권 2장 삽화

1805년 11월, 바실리 공작은 네 지방을 순회 시찰해야 했다. 그는 그 기회에 오랫동안 돌보지 않은 자기 영지들을 둘러보고, 아들 아나톨이 소속된 연대에 들러 그를 데려온 다음, 부유한 노인의 딸과 혼담을 맺기 위해 니콜라이 볼콘스키 공작을 찾아갈 수 있도록 이 일정을 스스로 마련했다. 그러나 집을 떠나 새로운 일들에 착수하기 전에 바실리 공작은 피에르와의 일을 매듭지어야 했다. 피에르는 요즘 온종일 집, 곧 자신이 머무는 바실리 공작의 집에서 지냈고, 엘렌 앞에서는 연인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듯 우스꽝스러울 만큼 흥분하여 어리석게 굴었지만, 아직 그녀에게 청혼하지는 않았다.

‘다 좋은데, 이제는 일을 매듭지어야 해.’ 어느 날 아침 바실리 공작은 슬픈 듯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자신에게 그토록 큰 신세를 진 피에르가—‘뭐, 그건 그렇다 치고’—이 일에서는 그다지 올바르게 처신하지 않는다고 느꼈다. ‘젊음과 경솔함 때문이겠지…… 그래, 하느님께서 보살피시기를.’ 그는 자신의 너그러운 마음을 흐뭇하게 음미하며 생각했다. ‘하지만 결말을 내야 해. 모레가 렐랴의 명명일이니 두세 사람을 초대하자. 그래도 그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아듣지 못한다면 내가 나설 일이야. 그래, 내 일이야. 나는 그 애 아버지니까.’

안나 파블로브나의 야회와, 엘렌과 결혼하는 것은 재앙이니 그녀를 피하고 떠나야 한다고 결심했던 그 잠 못 이룬 밤으로부터 여섯 주가 지났다. 하지만 피에르는 그 결심에도 불구하고 바실리 공작의 집을 떠나지 못했다. 사람들 눈에는 자신이 날마다 엘렌과 더욱 밀접하게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 그녀에 대해 예전에 품었던 생각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끔찍한 일이기는 해도 자신의 운명을 그녀의 운명과 결합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두려운 마음으로 느꼈다. 어쩌면 스스로 벗어날 수도 있었겠지만, 전에는 좀처럼 연회를 열지 않던 바실리 공작이 이제는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저녁 모임을 열었다. 모두의 즐거움을 망치고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다면 피에르는 반드시 참석해야 했다. 바실리 공작은 드물게 집에 있는 때면 지나가다가 피에르의 손을 잡아 아래로 끌어당기거나, 깨끗이 면도한 주름진 뺨을 무심한 듯 내밀어 입 맞추게 하고는 “내일 보세”, “저녁 식사 때 꼭 있게, 아니면 자네를 못 볼 테니”, “자네 때문에 집에 남아 있는 거야” 따위의 말을 했다. 그러나 바실리 공작이 말 그대로 피에르를 위해 집에 남아 있을 때에도 그와 두어 마디조차 거의 나누지 않았지만, 피에르는 그를 실망시킬 수 없다고 느꼈다. 그는 날마다 똑같은 말을 자신에게 되풀이했다. ‘이제는 그녀를 제대로 알고, 그녀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 결론을 내려야 해. 전에는 내가 잘못 판단한 것인가, 아니면 지금 잘못 판단하는 것인가? 아니, 그녀는 어리석지 않아. 훌륭한 아가씨야.’ 그는 때때로 이렇게 생각했다. ‘그녀는 실수하는 법이 없고 어리석은 말도 하지 않아. 말수는 적지만 무슨 말을 하든 언제나 분명하고 소박해. 그러니 어리석지 않아. 당황한 적도 없고 지금도 당황하지 않으니 나쁜 여자일 리도 없어!’ 그는 엘렌과 함께 있을 때 자주 어떤 문제를 논하거나 생각을 소리 내어 말하기 시작했는데, 그녀는 언제나 짤막하지만 적절한 말로 대답해 관심이 없음을 드러내거나, 말없는 눈길과 미소로 응답했다. 그 눈길과 미소는 다른 무엇보다도 확실하게 그녀가 피에르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모든 논의는 그 미소에 비하면 터무니없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듯한 그녀의 태도는 옳았다.

엘렌은 언제나 피에르에게만 보내는 환하고 신뢰 어린 미소로 말을 걸었다. 그 미소에는 평소 얼굴을 밝히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보내는 미소보다 더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피에르는 모두가 자신이 한마디를 하고 어떤 경계를 넘기만을 기다린다는 것을 알았으며, 조만간 자신이 그 선을 넘으리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 무서운 발걸음을 생각할 때마다 이해할 수 없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자신이 그 두려운 낭떠러지로 점점 더 가까이 끌려가던 한 달 반 동안, 피에르는 수없이 자신에게 말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결단력이 필요해. 설마 내게 결단력이 없는 것인가?’

그는 결정을 내리고 싶었지만, 이 일에서는 자신에게 있다고 알고 있었고 실제로도 지니고 있던 의지력이 없다는 사실을 경악하며 느꼈다. 피에르는 자신이 완전히 결백하다고 느낄 때에만 강해지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안나 파블로브나의 집에서 코담뱃갑 위로 몸을 숙였다가 욕망에 압도된 그날 이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그 욕망에 대한 죄책감이 그의 의지를 마비시켰다.

엘렌의 명명일에 바실리 공작의 집에는 그의 아내가 말했듯 ‘우리끼리만’ 모인 작은 일행이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이 친구들과 친척들은 모두 그날 저녁 젊은 아가씨의 운명이 결정되리라는 암시를 받아 두었다. 손님들은 저녁 식탁에 앉았다. 한때 아름다웠던, 풍만하고 위엄 있는 쿠라긴 공작부인이 상석에 앉았다. 양옆에는 더 중요한 손님들인 늙은 장군과 그의 아내, 안나 파블로브나 셰레르가 자리했다. 반대편 끝에는 젊고 덜 중요한 손님들과 가족들이 앉았고, 피에르와 엘렌도 나란히 그곳에 자리했다. 바실리 공작은 저녁을 먹지 않고 유쾌한 기분으로 식탁 둘레를 돌아다니며 이 손님 옆에 앉았다가 저 손님 옆에 앉았다. 그는 피에르와 엘렌만 빼고 모두에게 무심하면서도 기분 좋은 말을 한마디씩 건넸다. 두 사람의 존재는 아예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그는 모임 전체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밀랍 초는 환하게 타올랐고, 은식기와 수정 잔이 반짝였으며, 숙녀들의 의상과 남자들 견장의 금실과 은실도 빛났다. 붉은 제복을 입은 하인들이 식탁 둘레를 오갔고, 접시와 칼과 유리잔이 부딪치는 소리는 여러 대화가 활기차게 뒤섞인 웅성거림과 한데 어우러졌다. 식탁 한쪽 끝에서는 늙은 시종장이 늙은 남작부인에게 열렬히 사랑한다고 장담하는 소리와 그 말을 듣고 웃는 소리가 들렸고, 다른 쪽에서는 어느 마리야 빅토로브나인가 하는 여인이 겪은 불행에 관한 이야기가 들렸다. 식탁 가운데에서는 바실리 공작이 모두의 관심을 끌었다. 그는 익살맞은 미소를 띠고 숙녀들에게 지난 수요일 제국평의회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주고 있었다. 페테르부르크의 신임 군사총독 세르게이 쿠지미치 뱌즈미티노프가 군중에 있는 알렉산드르 황제로부터 자신에게 보내진, 당시 유명했던 칙서를 받아 낭독한 일이었다. 황제는 그 칙서에서 사방으로부터 백성의 충성 맹세를 받고 있으며 페테르부르크의 충성 맹세가 특히 기쁘고, 그런 국민의 수장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그들에게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힘쓰겠다고 했다. 칙서는 “세르게이 쿠지미치, 사방으로부터 내게 보고가 들어오기를……”이라는 말로 시작했다.

“그래서 ‘세르게이 쿠지미치’보다 한마디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는 건가요?” 한 숙녀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한 치도 더 못 갔지요.” 바실리 공작은 웃으며 대답했다. “‘세르게이 쿠지미치…… 사방으로부터…… 사방으로부터…… 세르게이 쿠지미치…….’ 가엾은 뱌즈미티노프는 그 이상 나아갈 수가 없었답니다! 칙서를 몇 번이고 처음부터 다시 읽었지만 ‘세르게이’라고 말하기만 하면 흐느끼고, ‘쿠-지-미치’에서 눈물을 흘리고, ‘사방으로부터’는 울음에 파묻혀 더 읽을 수 없었지요. 또다시 손수건을 꺼내고, 또다시 ‘세르게이 쿠지미치, 사방으로부터……’ 그러고는 눈물, 마침내 다른 사람에게 읽어 달라고 할 때까지 말입니다.”

“쿠지미치…… 사방으로부터…… 그러고는 눈물.” 누군가가 웃으며 되풀이했다.

“심술궂게 굴지 마세요.” 안나 파블로브나는 식탁 끝에서 위협하듯 손가락을 치켜들고 외쳤다. “우리의 친애하는 뱌즈미티노프는 얼마나 훌륭하고 뛰어난 분인데요…….”

모두가 한바탕 크게 웃었다. 귀빈들이 앉은 식탁 상석에서는 모두 기분이 들떠 갖가지 흥분된 감정에 젖어 있는 듯했다. 오직 피에르와 엘렌만이 식탁 아랫자리 가까이 나란히 앉아 말없이 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세르게이 쿠지미치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자신들의 감정이 부끄러워 억누른 미소가 빛났다. 나머지 사람들이 아무리 웃고 말하고 농담하며 라인 포도주와 소테 요리와 얼음과자를 즐기고, 아무리 젊은 두 사람을 바라보지 않으려 하며 그들에게 무심하고 관심 없는 듯 행동해도, 이따금 두 사람에게 던지는 눈길을 보면 세르게이 쿠지미치 이야기와 웃음과 음식은 모두 꾸며 낸 핑계일 뿐이고, 그 모임의 온 관심이 피에르와 엘렌에게 향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바실리 공작은 세르게이 쿠지미치가 흐느끼는 모습을 흉내 내는 동시에 딸 쪽을 흘끗 바라보았다.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은 분명히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래…… 잘되어 가는군. 오늘 다 결정될 거야.’ 안나 파블로브나는 ‘우리의 친애하는 뱌즈미티노프’를 대신해 그를 나무랐고, 잠깐 피에르를 바라본 그녀의 눈에서 바실리 공작은 미래의 사위와 딸의 행복에 대한 축하를 읽었다. 늙은 공작부인은 옆에 앉은 노부인에게 포도주를 권하면서 슬픈 한숨을 내쉬고 딸을 노여운 눈으로 흘겨보았다. 그 한숨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그래요, 이 젊은것들이 저토록 대담하고 보란 듯이 행복해할 때가 왔으니, 이제 당신과 내게 남은 일은 달콤한 포도주나 홀짝이는 것뿐이군요, 친구.’ ‘내가 지금 늘어놓는 이 모든 말은 얼마나 터무니없는가!’ 한 외교관은 행복한 연인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것이 행복이구나!’

그 사교계를 하나로 묶던 하찮고 사소하고 인위적인 관심사들 사이로, 건강하고 잘생긴 젊은 남녀가 서로에게 이끌리는 소박한 감정이 들어왔다. 이 인간적인 감정은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고 그들의 꾸며 낸 잡담 위로 높이 솟아올랐다. 농담은 김이 빠지고 소식은 흥미를 잃었으며, 활기는 억지로 꾸며 낸 것이 분명했다. 손님들뿐 아니라 시중을 드는 하인들까지도 그것을 느끼는 듯했다. 그들은 자신의 할 일을 잊고 환하게 빛나는 얼굴의 아름다운 엘렌과, 붉고 넓적하며 행복하지만 불안한 피에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촛불의 빛마저 오직 그 행복한 두 얼굴에만 모이는 듯했다.

피에르는 자신이 이 모든 것의 중심임을 느꼈고, 그 느낌은 기쁘면서도 당혹스러웠다. 그는 어떤 일에 완전히 몰두한 사람과도 같았다. 아무것도 똑똑히 보거나 듣거나 이해하지 못했다. 이따금 현실 세계에서 떨어져 나온 생각과 인상만이 뜻밖에 머릿속을 스쳐 갔다.

‘그러니까 이제 모든 것이 끝난 거구나!’ 그는 생각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이 어떻게 일어났지? 어쩌면 이렇게 빨리! 이제 알겠어. 그녀만을 위해서도, 나만을 위해서도 아니라 모두를 위해서 반드시 이렇게 되어야만 하는 거야. 모두가 그것을 기다리고 있고, 그렇게 되리라고 너무도 확신하니 나는, 나는 그들을 실망시킬 수 없어. 하지만 어떻게 되는 거지? 모르겠어. 그래도 반드시 그렇게 될 거야!’ 피에르는 눈앞 가까이에 있는 눈부신 어깨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러다가 문득 무엇 때문인지도 모른 채 부끄러움을 느끼곤 했다. 모든 사람의 관심을 끌고 행운아로 여겨지는 것이, 그리고 이렇게 볼품없는 얼굴로 엘렌을 차지한 파리스와도 같은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 거북했다. ‘하지만 틀림없이 언제나 이런 식이고, 또 그래야만 하는 모양이야!’ 그는 자신을 달랬다. ‘게다가 내가 무슨 일을 해서 이렇게 된 거지? 어떻게 시작된 거야? 나는 바실리 공작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왔어. 그때는 아무 일도 없었지. 그런데 내가 그의 집에 머물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었겠어? 그 뒤 나는 그녀와 카드놀이를 했고, 그녀의 손가방을 주워 주었으며, 함께 마차를 타고 외출했어. 어떻게 시작되어 언제 이 모든 일이 생긴 거지?’ 그런데 지금 그는 약혼자로서 그녀 곁에 앉아 그녀의 가까움과 숨결과 움직임과 아름다움을 보고 듣고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아름다운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 유별나게 아름다운 자기 자신인 것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모두가 자신을 그렇게 바라보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는 모두의 찬사에 우쭐해 가슴을 펴고 머리를 들며 자신의 행운을 기뻐했다. 그때 갑자기 귀에 익은 목소리가 같은 말을 두 번째로 되풀이하는 것이 들렸다. 그러나 피에르는 생각에 너무 깊이 빠져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볼콘스키에게서 마지막으로 소식을 받은 것이 언제인지 묻고 있네.” 바실리 공작이 세 번째로 되풀이했다. “이 친구, 어쩌면 그렇게 정신을 놓고 있나.”

바실리 공작이 미소 지었고, 피에르는 모두가 자신과 엘렌을 보며 미소 짓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 모두 알고 있다 한들 어떻단 말인가?’ 피에르는 생각했다. ‘그게 뭐 어때서? 사실인걸!’ 그리고 자신도 온화하고 어린아이 같은 미소를 지었고, 엘렌도 미소 지었다.

“언제 편지를 받았나? 올뮈츠에서 온 것이었나?” 바실리 공작은 어떤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그것을 정말 알고 싶다는 듯 다시 물었다.

‘이런 하찮은 일을 어떻게 말하거나 생각할 수 있지?’ 피에르는 생각했다.

“예, 올뮈츠에서 왔습니다.” 그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저녁 식사가 끝나자 피에르는 자신의 짝과 함께 다른 사람들을 따라 응접실로 갔다. 손님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엘렌에게 작별 인사도 하지 않고 떠났다. 어떤 이들은 그녀의 중요한 일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는 듯 잠깐 다가와 인사한 뒤, 배웅하지 말라며 서둘러 떠났다. 외교관은 침통한 침묵을 지킨 채 응접실을 나섰다. 그는 피에르의 행복과 견주어 자신의 외교관 생활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떠올렸다. 늙은 장군은 아내가 다리 상태를 묻자 투덜거렸다. ‘아, 이 늙은 바보 같으니.’ 그는 생각했다. ‘엘렌 공작 영애는 쉰 살이 되어도 여전히 아름다울 텐데.’

“축하드려도 될 것 같군요.” 안나 파블로브나는 늙은 공작부인에게 속삭이고 힘껏 입 맞추었다. “두통만 없었어도 더 오래 남았을 텐데요.”

늙은 공작부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딸의 행복을 질투하는 마음이 그녀를 괴롭혔다.

손님들이 작별 인사를 하는 동안 피에르는 엘렌과 함께 그들이 앉아 있던 작은 응접실에 오랫동안 단둘이 남아 있었다. 지난 여섯 주 동안에도 그녀와 단둘이 남은 적은 많았지만, 사랑을 고백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제는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느꼈지만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디딜 결심을 할 수 없었다. 그는 부끄러웠다. 엘렌 곁에서 자신이 다른 누군가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듯했다. ‘이 행복은 네 것이 아니야.’ 마음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속삭였다. ‘이 행복은 네 안에 있는 것을 지니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야.’

그러나 무슨 말이든 해야 했기에 그는 모임이 만족스러웠는지부터 물었다. 엘렌은 평소처럼 소박하게, 이번 명명일이 지금까지 보낸 명명일 가운데 가장 즐거운 날 중 하나였다고 대답했다.

가까운 친척 몇 사람은 아직 떠나지 않고 큰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바실리 공작이 힘없는 걸음으로 피에르에게 다가왔다. 피에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시간이 늦었다고 말했다. 바실리 공작은 피에르가 방금 한 말이 너무도 이상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엄하고 의아한 눈길을 보냈다. 그러나 곧 엄한 표정이 사라졌다. 그는 피에르의 손을 아래로 끌어당겨 다시 앉히고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 렐랴?” 그는 즉시 딸을 향해 물었다. 어릴 때부터 자식을 귀여워해 온 부모라면 자연스럽게 지니게 마련인, 습관적이고 무심한 애정이 담긴 어조였지만, 바실리 공작은 다른 부모들을 흉내 내어 그 말투를 익혔을 뿐이었다.

그러고는 다시 피에르 쪽으로 돌아섰다.

“세르게이 쿠지미치—사방으로부터—” 그는 조끼의 맨 위 단추를 풀며 말했다.

피에르는 미소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지금 바실리 공작의 관심사가 세르게이 쿠지미치 이야기가 아님을 자신이 안다는 것을 드러냈고, 바실리 공작도 피에르가 그것을 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갑자기 무언가를 중얼거리고는 가 버렸다. 피에르에게는 공작마저 당황한 듯 보였다. 이 노련한 사교계 인사가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에 피에르는 마음이 움직였다. 그는 엘렌을 바라보았고, 그녀 역시 당황한 듯했다. 그녀의 눈길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자, 이건 당신 탓이에요.’

‘그 한 걸음을 내디뎌야 하지만 할 수 없어, 할 수가 없어!’ 피에르는 생각했다. 그러고는 다시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인 세르게이 쿠지미치 이야기를 꺼내, 제대로 듣지 못했는데 무엇이 우스운지 물었다. 엘렌은 자신도 듣지 못했다며 미소 지었다.

바실리 공작이 응접실로 돌아왔을 때, 그의 아내인 공작부인은 나이 든 부인과 피에르에 관해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물론 더없이 훌륭한 혼처이지요. 하지만 행복이란, 이 친구야…….”

“혼인은 하늘에서 맺어 주는 법이지요.” 나이 든 부인이 대답했다.

바실리 공작은 숙녀들의 말을 듣지 못한 듯 지나가 방 저편 구석의 소파에 앉았다. 그는 눈을 감고 꾸벅꾸벅 조는 듯했다. 머리가 앞으로 떨어졌다가 그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알린,” 그가 아내에게 말했다. “가서 저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고 오시오.”

공작부인은 문으로 다가가 위엄 있고 무심한 태도로 그 앞을 지나면서 작은 응접실 안을 흘끗 들여다보았다. 피에르와 엘렌은 여전히 전과 똑같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직 그대로예요.” 그녀가 남편에게 말했다.

바실리 공작은 얼굴을 찡그리며 입을 비틀었다. 뺨이 떨리고, 얼굴에는 그에게 특유한 거칠고 불쾌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몸을 한번 떨쳐 내듯 움직인 뒤 일어나 머리를 뒤로 젖히고, 단호한 걸음으로 숙녀들 곁을 지나 작은 응접실로 들어갔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기쁨에 차 피에르에게 다가갔다. 그의 얼굴이 너무도 평소답지 않게 의기양양해서, 그것을 본 피에르는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바실리 공작이 말했다. “내 아내가 모든 것을 말해 주었네!” 그는 한 팔로 피에르를, 다른 팔로 딸을 껴안았다. “사랑하는 아이야…… 렐랴…… 정말 기쁘구나.”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자네 아버지를 사랑했네…… 그리고 이 애는 자네에게 좋은 아내가 되어 줄 걸세…… 하느님께서 자네들을 축복하시기를!”

그는 딸을 껴안은 뒤 다시 피에르를 끌어안고, 악취 나는 입으로 그에게 입 맞추었다. 그의 뺨은 실제로 눈물에 젖었다.

“여보, 이리 와요!” 그가 소리쳤다.

늙은 공작부인이 들어와 함께 울었다. 나이 든 부인도 손수건을 쓰고 있었다. 피에르는 사람들의 입맞춤을 받았고, 자신도 아름다운 엘렌의 손에 몇 번이나 입 맞추었다. 잠시 뒤 두 사람은 다시 단둘이 남았다.

‘이 모든 일은 반드시 일어나야 했고 달리 될 수 없었어.’ 피에르는 생각했다. ‘그러니 좋은지 나쁜지 묻는 것은 소용없어. 확정되었으니 좋은 일이야. 이제 오래도록 괴롭히던 의심에서 벗어났으니까.’ 피에르는 말없이 약혼녀의 손을 잡고 오르내리는 아름다운 가슴을 바라보았다.

“엘렌!” 그는 소리 내어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이런 때에는 늘 특별한 말을 하는 법인데.’ 그는 생각했지만,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떠올릴 수 없었다. 그는 엘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얼굴이 붉어졌다.

“아, 그걸 벗으세요…… 그걸요…….” 그녀는 그의 안경을 가리키며 말했다.

피에르는 안경을 벗었다. 갓 안경을 벗은 사람의 눈이 으레 그렇듯 그의 눈에는 낯선 표정이 떠올랐고, 그에 더해 두려움과 의문이 담겨 있었다. 그는 몸을 숙여 그녀의 손에 입 맞추려 했다. 그러나 엘렌은 재빠르고 거의 난폭하게 머리를 움직여 그의 입술을 가로막고 자기 입술을 맞댔다. 불쾌할 만큼 흥분한 모습으로 변한 그녀의 얼굴에 피에르는 충격을 받았다.

‘이제는 너무 늦었어. 이미 끝난 일이야. 게다가 나는 그녀를 사랑해.’ 피에르는 생각했다.

“*Je vous aime!*”* 그는 이런 때 해야 할 말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은 너무도 힘없이 들려 스스로 부끄러웠다.

* “당신을 사랑합니다.”

여섯 주 뒤 두 사람은 결혼했다.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피에르는 이름난 미인 아내와 수백만 루블의 행복한 소유자가 되어, 새로 호화롭게 꾸민 베주호프 백작의 거대한 페테르부르크 저택에 자리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