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바실리 공작은 일부러 계획을 궁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더구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해칠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그저 출세해 온 사교계 인사였고, 출세하는 일이 습관이 되어 버린 사람이었다. 그 자신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지만 삶의 온 관심을 이루는 갖가지 계책과 방책이, 그가 마주치는 상황과 사람들에 따라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저절로 생겨났다. 그의 머릿속에는 그런 계획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 수십 가지나 있었는데, 어떤 것은 막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고, 어떤 것은 성취를 눈앞에 두었으며, 또 어떤 것은 무너져 가는 중이었다. 이를테면 그는 속으로 ‘이 사람은 지금 영향력이 있으니 그의 신임과 우정을 얻어, 그를 통해 특별 하사금을 받아 내야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또 ‘피에르는 부자이니 그를 꾀어 내 딸과 결혼시키고, 내게 필요한 4만 루블을 빌려야겠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지위 있는 사람을 만나면 본능적으로 그 사람이 쓸모 있으리라는 것을 알아차렸고, 아무런 사전 계획도 없이 첫 기회를 붙잡아 그의 신임을 얻고, 아첨하고, 가까워진 끝에 마침내 부탁을 꺼냈다.
모스크바에는 피에르가 바로 곁에 있었으므로, 바실리 공작은 당시 국무참사관의 관등이 따르던 시종관 자리를 그에게 마련해 주고는, 자신과 함께 페테르부르크로 가서 자기 집에 머물라고 우겼다. 그는 겉으로는 무심한 듯하면서도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피에르를 딸과 결혼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했다. 만일 미리 계획을 세웠더라면 그는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 없었을 것이며, 신분이 자기보다 높든 낮든 모든 사람을 대할 때 그토록 꾸밈없는 친밀함을 보이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자기보다 부유하고 권세 있는 사람들에게 이끌렸으며, 사람을 이용하기에 가장 알맞은 순간을 붙잡는 데 드문 재주가 있었다.
뜻밖에 베주호프 백작이자 부자가 된 피에르는, 얼마 전까지 누리던 고독과 근심 없는 자유가 사라지고 온갖 일에 둘러싸여 정신없이 지내느라 침대에 누워서야 겨우 혼자가 될 수 있었다. 그는 서류에 서명하고,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도 분명치 않은 관청에 출두하고, 총지배인에게 이것저것 묻고, 모스크바 근교 영지를 찾아가고, 전에는 그의 존재조차 알려 하지 않다가 이제 그가 만나 주지 않으면 모욕과 슬픔을 느낄 수많은 사람을 맞아야 했다. 사업가와 친척과 지인을 막론하고 이 여러 사람은 모두 젊은 상속자에게 더없이 다정하고 아첨하는 태도를 보였으며, 하나같이 피에르의 고귀한 성품을 굳게 믿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끊임없이 “백작님의 남다른 선량함이라면”이라든가 “백작님의 훌륭한 마음씨로는”, “백작님 자신이 그토록 명예로운 분이시니”, “그분도 백작님만큼 현명했더라면” 따위의 말을 들었다. 그러다 보니 피에르는 자신의 유별난 선량함과 비범한 지성을 진심으로 믿기 시작했다. 더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늘 자기가 정말로 아주 선량하고 현명하다고 여겨 왔기에 더욱 그랬다. 전에는 그에게 심술궂고 노골적으로 적대하던 사람들조차 이제는 온순하고 다정해졌다. 장례식이 끝난 뒤, 허리가 길고 머리카락을 인형처럼 머리에 착 붙인 화난 맏공작 영애가 피에르의 방으로 찾아왔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자주 얼굴을 붉히며, 지난날 서로 오해했던 일이 몹시 유감스럽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이 받은 충격을 생각하면 이제 그에게 무엇을 부탁할 권리도 없다고 느끼지만,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고 그토록 많은 것을 희생한 이 집에 몇 주만 더 머물도록 허락해 달라는 부탁만은 하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이 말을 하며 눈물을 참지 못했다. 조각상처럼 보이던 공작 영애가 이토록 달라질 수 있다는 데 감동한 피에르는, 무엇을 용서해 달라는지도 모른 채 그녀의 손을 잡고 용서를 빌었다. 그날부터 맏공작 영애는 피에르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져 그를 위해 줄무늬 목도리를 뜨기 시작했다.
“날 생각해서라도 그렇게 해 주게, 친구. 어쨌든 그 애도 고인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으니까.” 바실리 공작은 공작 영애에게 이익이 돌아가도록 작성된 증서를 피에르에게 내밀며 말했다.
바실리 공작은 상감 장식 서류가방 사건에서 자신이 맡았던 몫을 가엾은 공작 영애가 입 밖에 내지 않게 하려면, 3만 루블짜리 어음이라는 뼈다귀를 던져 줄 필요가 있다고 결론 내렸다. 피에르는 증서에 서명했고, 그 뒤로 공작 영애는 한층 더 상냥해졌다. 아래 두 공작 영애도 그에게 다정해졌다. 특히 막내인, 점이 있는 예쁜 공작 영애는 피에르를 만날 때마다 미소를 짓고 스스로도 당황하여, 자주 그까지 어쩔 줄 모르게 했다.
모두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은 피에르에게 너무도 자연스러워 보였고, 누군가가 자신을 싫어한다면 오히려 너무도 부자연스럽게 여겨졌을 것이기에, 그는 주위 사람들의 진심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들이 진실한지 아닌지를 스스로 물어볼 겨를도 없었다. 그는 늘 바빴고, 언제나 가볍고 유쾌한 도취 상태에 빠져 있는 듯했다. 자신이 어떤 중요하고 보편적인 움직임의 중심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모두가 끊임없이 그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으며, 그가 그것을 하지 않으면 많은 사람을 슬프게 하고 실망시키지만 이것저것 해내기만 하면 모든 일이 잘되리라는 느낌이었다. 그는 요구받은 대로 했지만, 그 행복한 결과는 언제나 미래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 무렵 피에르의 일과 피에르 자신을 누구보다도 완전히 장악한 사람은 바실리 공작이었다. 그는 베주호프 백작이 죽은 뒤부터 이 젊은이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온갖 일에 짓눌려 지치고 고통받으면서도, 옛 친구의 아들이며 그토록 막대한 재산의 소유자인 이 의지할 데 없는 젊은이를 운명의 변덕과 사기꾼들의 계략에 내맡길 수 없어 순전히 연민 때문에 보살피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베주호프 백작이 죽은 뒤 모스크바에 머문 며칠 동안 그는 피에르를 부르거나 직접 찾아가 지치면서도 확신에 찬 어조로 해야 할 일을 일러 주었다. 그때마다 이렇게 덧붙이는 듯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일이 산더미 같지만 순전히 자네를 딱하게 여겨 수고하는 것이며, 내가 제안하는 방법밖에는 달리 길이 없다는 것도 자네는 잘 알고 있네.’
“그래, 이 친구야, 내일이면 마침내 떠나는 거야.” 어느 날 바실리 공작은 눈을 감고 피에르의 팔꿈치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이미 오래전에 합의되어 이제는 바꿀 수 없는 일을 말하는 듯한 어조였다. “내일 출발하니 내 마차에 자네 자리도 마련해 두었네. 정말 기쁘군. 이곳의 중요한 일은 이제 모두 정리되었고, 나는 진작 떠났어야 했어. 재상에게서 받은 것이 여기 있네. 내가 자네를 위해 부탁했는데, 자네는 외교단에 이름을 올리고 시종관이 되었어. 이제 외교관의 길이 자네 앞에 열려 있네.”
지친 듯 확신에 찬 어조로 이 말이 전해졌지만, 오랫동안 자신의 진로를 생각해 온 피에르는 무언가 의견을 내고 싶었다. 그러나 바실리 공작은 특별한 설득이 필요한 다급한 경우에 쓰는, 깊고 낮게 달래는 특유의 목소리로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 어조는 상대가 그의 말을 끊는 것을 아예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친구야, 나는 내 자신을 위해, 내 양심을 편하게 하려고 한 일이니 고마워할 것 없네.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아 불평한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지 않은가. 게다가 자네는 자유로운 몸이니 내일이라도 그만둘 수 있어. 페테르부르크에 가면 모든 것을 직접 보게 될 걸세. 이런 끔찍한 기억에서 벗어날 때도 진작 지났어.” 바실리 공작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래, 얘야. 그리고 내 시종은 자네 마차에 타면 되겠군. 아! 하마터면 잊을 뻔했네.” 그가 덧붙였다. “자네도 알다시피, 이 친구야, 자네 아버지와 나는 결산할 것이 좀 있었네. 그래서 랴잔 영지에서 받을 몫을 받아 내가 보관하고 있네. 자네에게는 필요 없을 테니까. 장부는 나중에 함께 살펴보세.”
바실리 공작이 말한 ‘랴잔 영지에서 받을 몫’이란, 피에르의 농민들에게서 거둔 수천 루블의 공납금으로서 공작이 자기 몫으로 챙긴 돈이었다.
페테르부르크에서도 피에르는 모스크바에서와 똑같이 온화하고 다정한 분위기에 둘러싸였다. 그는 바실리 공작이 마련해 준 직책, 아니 정확히는 지위를 거절할 수 없었다. 실제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지인과 초대와 사교상의 의무가 너무도 많아, 그는 모스크바에서보다 더욱 심한 혼란과 분주함을 느꼈고, 언제나 눈앞에 있으면서도 결코 손에 닿지 않는 어떤 좋은 일을 계속 기다리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예전의 독신자 시절 친구들 가운데 상당수는 더 이상 페테르부르크에 없었다. 근위대는 전선으로 떠났고, 돌로호프는 사병으로 강등되었으며, 아나톨은 지방 어디엔가 있는 군대에 있었고, 안드레이 공작은 외국에 나가 있었다. 그래서 피에르는 예전처럼 마음에 드는 방식으로 밤을 보낼 수도, 자신보다 나이가 많고 존경하는 친구와 허물없는 대화를 나누며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그의 시간은 온통 만찬과 무도회로 채워졌고, 주로 바실리 공작의 집에서 공작의 아내인 몸집이 큰 공작부인과 아름다운 딸 엘렌과 함께 보냈다.
안나 파블로브나 셰레르도 다른 사람들처럼, 피에르를 대하는 사교계의 태도가 달라졌음을 그에게 보여 주었다.
예전에는 안나 파블로브나 앞에서 말을 할 때마다, 자신이 하는 말이 부적절하고 눈치 없고 어울리지 않는다고 피에르는 늘 느꼈다. 머릿속에서 생각할 때에는 재치 있어 보이던 말도 입 밖에 내는 순간 어리석게 변하는 반면, 이폴리트의 가장 어리석은 말은 오히려 재치 있고 적절하게 들리는 듯했다. 그러나 이제 피에르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 훌륭했다. 안나 파블로브나가 직접 그렇게 말하지 않을 때에도, 그가 겸손해할까 보아 말을 삼키고 있을 뿐 사실은 그렇게 말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피에르는 알아볼 수 있었다.
1805년에서 1806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이 시작될 무렵, 피에르는 안나 파블로브나가 늘 보내는 분홍색 초대장 한 장을 받았다. 거기에는 이런 문구가 덧붙어 있었다. “언제나 바라보기만 해도 즐거운 아름다운 엘렌도 이곳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그 문장을 읽었을 때 피에르는 처음으로, 다른 사람들이 이미 알아차린 어떤 관계가 자신과 엘렌 사이에 생겨났음을 느꼈다. 그 생각은 자신이 다할 수 없는 어떤 의무가 지워지는 듯하여 그를 불안하게 했고, 한편으로는 흥미로운 가정처럼 여겨져 기쁘게도 했다.
안나 파블로브나의 야회는 전과 같았다. 다만 이번에 손님들에게 선보인 새로운 인물은 모르테마르가 아니라, 베를린에서 막 돌아와 알렉산드르 황제의 포츠담 방문과 두 고귀한 군주가 인류의 적에 맞서 정의의 대의를 지키고자 깨어질 수 없는 동맹을 맹세한 일에 관한 최신의 세부 소식을 전하는 외교관이었다. 안나 파블로브나는 약간 우울한 표정으로 피에르를 맞았다. 그 우울함은 베주호프 백작의 죽음으로 이 젊은이가 최근 입은 상실과 관련된 것이 분명했다. 모두가 피에르에게, 거의 알지도 못했던 아버지의 죽음으로 그가 몹시 슬퍼하고 있음을 확인해 주는 것을 끊임없이 자신의 의무로 여겼다. 그녀의 우울함은 지극히 존귀하신 마리야 표도로브나 황후 폐하를 언급할 때 보이던 지극히 장엄한 우울함과 꼭 같았다. 피에르는 그것을 영광스럽게 여겼다. 안나 파블로브나는 평소의 솜씨를 발휘해 응접실 안의 여러 무리를 배치했다. 바실리 공작과 장군들이 속한 큰 무리에는 외교관이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또 다른 무리는 찻상 둘레에 모였다. 피에르는 앞쪽 무리에 끼고 싶었다. 그러나 전장의 지휘관처럼 흥분한 상태에서, 수천 가지 새롭고 기발한 생각이 떠오르지만 그것을 모두 실행하기에는 시간이 모자란 안나 파블로브나는 피에르를 보자 손가락으로 그의 소매를 건드리며 말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오늘 저녁 백작님을 위해 생각해 둔 일이 있답니다.” 그녀는 엘렌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사랑하는 엘렌, 당신을 무척이나 아끼는 가엾은 우리 노부인에게 친절을 베풀어 줘요. 가서 십 분만 말벗이 되어 주세요. 그리고 너무 따분하지 않도록, 여기 친애하는 백작님이 함께 가 달라는 부탁을 거절하지 않으실 거예요.”
아름다운 엘렌은 노부인에게로 갔지만, 안나 파블로브나는 피에르를 붙잡았다. 마지막으로 꼭 필요한 지시를 내려야 한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정말 더없이 아름답지 않나요?” 그녀는 위풍당당한 미녀가 미끄러지듯 멀어지는 쪽을 가리키며 피에르에게 말했다. “게다가 몸가짐은 또 얼마나 훌륭한지! 그렇게 젊은 아가씨에게 저토록 세심한 분별력과 완벽하게 노련한 태도라니! 모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지요. 저 아가씨를 얻는 남자는 행복할 거예요! 세상 물정에 가장 어두운 남자라도 그녀와 함께라면 사교계에서 가장 눈부신 지위를 차지할 테니까요. 그렇지 않나요? 백작님의 의견을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러고는 안나 파블로브나가 피에르를 놓아주었다.
피에르는 엘렌의 완벽한 몸가짐에 관한 그녀의 말에 진심으로 동의했다. 그가 엘렌을 생각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그녀의 아름다움과 사교계에서 말없이 품위를 드러내는 놀라운 솜씨에 관해서였다.
구석에 자리 잡은 노부인은 두 젊은이를 맞아 주었지만, 엘렌을 무척 아낀다는 사실은 감추려는 듯했고 오히려 안나 파블로브나를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녀는 이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묻기라도 하듯 조카딸을 바라보았다. 그들을 두고 떠나면서 안나 파블로브나는 다시 피에르의 소매를 건드리며 말했다. “이제는 우리 집이 따분하다고 다시 말씀하시지 않겠지요.” 그러고는 엘렌을 흘끗 바라보았다.
엘렌은 자신을 보고도 매혹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노부인은 기침을 하고 침을 삼킨 뒤, 엘렌을 만나 아주 기쁘다고 프랑스어로 말했다. 그러고는 똑같은 환영의 말과 똑같은 시선으로 피에르를 대했다. 따분하고 자꾸 끊기는 대화 도중 엘렌은 누구에게나 보여 주는 아름답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피에르 쪽으로 돌아보았다. 피에르는 그 미소에 너무 익숙했고, 그에게는 너무도 의미가 없어서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았다. 마침 노부인은 피에르의 아버지 베주호프 백작이 소장했던 코담뱃갑 수집품에 관해 이야기하며 자기 코담뱃갑을 보여 주고 있었다. 엘렌 공작 영애는 뚜껑에 그려진 노부인의 남편 초상화를 보여 달라고 했다.
“아마 비네스의 작품일 겁니다.” 피에르는 유명한 세밀화가의 이름을 대며 말했다. 그는 다른 탁자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들으려 애쓰면서 코담뱃갑을 집으려고 탁자 위로 몸을 기울였다.
그는 엘렌의 뒤로 돌아가려고 자리에서 반쯤 일어섰지만, 노부인이 엘렌의 등 너머로 코담뱃갑을 건네주었다. 엘렌은 길을 내주려고 몸을 앞으로 숙이고 미소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날 저녁에도 여느 야회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당시 유행하던 앞뒤가 깊게 파인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피에르에게 언제나 대리석처럼 보였던 그녀의 가슴은 너무도 가까이 있어서, 근시인 그의 눈으로도 입술 가까이에 있는 목과 어깨의 생생한 매력을 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머리를 조금만 숙이면 닿을 정도였다. 그는 그녀의 몸에서 전해지는 온기와 향수 냄새와 움직일 때 코르셋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느꼈다. 그는 이제 드레스와 한데 어우러져 완전한 전체를 이루는 대리석 같은 아름다움을 본 것이 아니라, 옷에 가려져 있을 뿐인 그녀 몸의 모든 매력을 보았다. 한번 그것을 보고 나자 더는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속임수를 간파하고 나면 다시는 그 환상에 빠질 수 없는 것과 같았다.
‘그러니까 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여태 알아차리지 못했나요?’ 엘렌의 표정은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내가 여자라는 걸 몰랐나요? 그래요, 나는 누구의 것이든 될 수 있는 여자예요. 당신의 것이 될 수도 있지요.’ 그 순간 피에르는 엘렌이 자신의 아내가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하며 다른 길은 있을 수 없다고 느꼈다.
그는 그녀와 함께 제단 앞에 서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 사실을 확실히 알았다. 그것이 어떻게, 언제 이루어질지는 몰랐고, 심지어 좋은 일일지도 알지 못했다. 까닭은 모르지만 나쁜 일이 되리라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리라는 것만은 알았다.
피에르는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들고는, 지금까지 날마다 그래 왔듯 그녀를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진 아득한 미녀로 다시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럴 수 없었다. 안개 너머로 초원의 풀숲을 바라보며 나무라고 여겼던 사람이, 그것이 풀숲임을 한번 알아본 뒤 다시 나무로 볼 수 없는 것과 같았다. 그녀는 무서울 만큼 가까이 있었다. 이미 그에게 힘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제 두 사람 사이에는 피에르 자신의 의지라는 장벽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자, 이제 여러분끼리 이 아늑한 구석에 계시게 해 드리지요.” 안나 파블로브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서는 아주 편안해 보이네요.”
피에르는 자신이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는지 불안하게 되짚어 보며 얼굴을 붉힌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자신이 알듯이 모두가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조금 뒤 그가 큰 무리로 다가가자 안나 파블로브나가 말했다. “페테르부르크 저택을 새로 꾸미고 계신다면서요?”
사실이었다. 건축가가 그렇게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고, 피에르는 이유도 모른 채 페테르부르크의 거대한 저택을 개축하고 있었다.
“잘하셨어요. 하지만 바실리 공작 댁에서는 나가지 마세요. 공작 같은 친구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지요.” 그녀는 바실리 공작을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는 그 점을 잘 알고 있답니다. 그렇지 않나요? 게다가 백작님은 아직 아주 젊으세요. 조언이 필요하답니다. 늙은 여자의 특권을 행사한다고 화내지는 마세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여자들이 자신의 나이를 말하고 나면 늘 그러듯,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결혼하시면 사정이 달라지겠지만요.” 그녀는 두 사람을 하나로 묶듯 한꺼번에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피에르는 엘렌을 보지 않았고, 엘렌도 그를 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무서울 만큼 그에게 가까이 있었다. 피에르는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얼굴을 붉혔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일어난 일을 생각하느라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아무 일도 없었다. 그는 그저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여자, 사람들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말할 때 무심코 “그래, 예쁘지”라고 대답하곤 했던 그 여자가 자신의 것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달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여자는 어리석어. 내 입으로도 어리석다고 말했잖아.’ 그는 생각했다. ‘그 여자가 내 안에 불러일으키는 감정에는 무언가 불쾌하고,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어. 오빠 아나톨이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도 아나톨을 사랑해서 큰 추문이 벌어졌으며, 그래서 아나톨이 멀리 보내졌다고 들었어. 이폴리트는 그녀의 오빠고…… 바실리 공작은 그녀의 아버지야…… 좋지 않아…….’ 그는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동안에도 그 생각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피에르는 자신이 미소 짓고 있음을 깨달았다. 동시에 또 다른 생각의 흐름이 솟아났다는 것도 느꼈다. 그녀의 천박함을 생각하면서도, 그녀가 어떻게 자기 아내가 되고 어떻게 자기를 사랑하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지를 꿈꾸었으며, 지금까지 그녀에 대해 생각하고 들은 모든 것이 거짓일 수도 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그는 다시 그녀를 바실리 공작의 딸로 보지 않고, 회색 드레스에 가려져 있을 뿐인 그녀의 온몸을 마음속에 그렸다. ‘하지만 아니야! 왜 이런 생각이 전에는 한 번도 떠오르지 않았지?’ 그러고는 이 결혼에는 부자연스럽고, 자신이 보기에는 불명예스러운 무언가가 있을 테니 불가능하다고 다시 자신에게 말했다. 그는 그녀의 예전 말과 눈길,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사람들의 말과 눈길을 떠올렸다. 안나 파블로브나가 그의 저택 이야기를 하며 보인 말과 눈길을 떠올렸고, 바실리 공작과 다른 사람들이 보낸 그와 같은 수천 가지 암시를 떠올렸다. 그러자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든 이미, 명백히 잘못되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겠다고 약속해 버린 것은 아닌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바로 그런 확신을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는 순간에도, 마음의 다른 한쪽에서는 온전한 여성미를 지닌 엘렌의 모습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