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 / 제1에필로그 1813-1820년 / 제4장
《전쟁과 평화》 · 제1에필로그 1813-1820년

제4장

《전쟁과 평화》 제1에필로그 4장 삽화

민족들의 홍수는 정상적인 물길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대운동의 파도가 약해지고 고요해진 표면에는 소용돌이가 생겼다. 홍수를 가라앉힌 것이 자신들이라고 생각하는 외교관들이 그 위에 떠 있었다.

그러나 잔잔한 바다는 갑자기 다시 요동했다. 외교관들은 자기들의 의견 차이가 자연의 힘이 새롭게 밀려드는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군주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리라고 예상하고 상황을 해결할 수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들이 솟아오른다고 느낀 파도는 예상한 방향에서 오지 않았다. 전과 똑같은 지점, 곧 파리에서 다시 솟아올랐다. 서쪽에서 일어난 운동의 마지막 역류였다. 겉보기에 극복할 수 없는 외교적 난관을 해결하고 그 역사 시기의 군사적 운동을 끝낸 역류였다.

프랑스를 황폐하게 만든 사람이 어떤 음모도 없이 병사도 없이 홀로 프랑스로 돌아왔다. 보초라면 누구나 그를 체포할 수 있었지만 기이한 우연으로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모두가 전날 저주했고 한 달 뒤 다시 저주할 사람을 황홀하게 맞았다.

마지막 집단 행동을 정당화하려면 여전히 이 사람이 필요했다.

그 행동이 이루어졌다.

마지막 역할이 연기되었다. 배우는 의상을 벗고 분과 물감을 씻어내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제 더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 뒤 몇 해 동안 그는 섬에서 홀로 자신을 위해 애처로운 희극을 연기했다. 정당화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데도 음모와 거짓말로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고, 보이지 않는 손이 행동을 이끌던 동안 사람들이 힘으로 잘못 알았던 것이 무엇인지를 온 세상에 보여주었다.

무대 감독은 연극을 끝내고 배우의 옷을 벗긴 뒤 우리에게 그를 보여준다.

“너희가 믿은 것을 보라! 이자가 그 사람이다! 이제 너희를 움직인 것이 이자가 아니라 나였음을 알겠느냐?”

그러나 운동의 힘에 얼이 빠진 사람들은 오랫동안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향한 반대 운동의 수장으로 섰던 알렉산드르 1세의 삶에서는 더욱 큰 일관성과 불가피성이 보인다.

다른 이들을 그늘에 가리며 동쪽에서 서쪽으로 향한 운동의 수장으로 선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했는가?

정의감과 유럽의 일에 대한 공감이 필요했다. 그러나 사소한 이해관계에 무뎌지지 않은 멀리서의 공감이어야 했다. 그에게 협력한 당시 군주들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해야 했고, 온화하고 매력적인 인격과 나폴레옹에게 품은 개인적 원한이 필요했다. 이 모든 것이 알렉산드르 1세에게 있었다. 이 모든 것은 그의 삶에 일어난 무수한 이른바 우연들, 곧 교육과 초기 자유주의와 그를 둘러싼 조언자들, 아우스터리츠와 틸지트와 에르푸르트가 마련했다.

민족 전쟁 동안 그는 필요하지 않았으므로 아무 활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럽 전체의 전쟁이 필요해지자 정해진 순간 자기 자리에 나타나 유럽의 민족들을 결합하고 목표로 이끌었다.

목표는 이루어졌다. 1815년의 마지막 전쟁이 끝난 뒤 알렉산드르는 가능한 모든 권력을 쥐었다. 그는 그 권력을 어떻게 사용했는가?

유럽의 평정자 알렉산드르 1세는 젊은 시절부터 오직 민중의 행복만 추구했고 조국에서 자유주의적 개혁을 시작한 사람이었다. 이제 최대의 권력을 가진 듯하여 민중의 행복을 이룰 가능성도 얻은 때, 유배된 나폴레옹은 권력을 지켰더라면 인류를 어떻게 행복하게 했을지에 관한 유치하고 거짓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사명을 완수하고 자기 위에 놓인 하느님의 손길을 느낀 알렉산드르 1세는 갑자기 그처럼 보이는 권력이 보잘것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권력에서 돌아서서 자기가 경멸하는 하찮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주며 다만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우리에게가 아니라, 우리에게가 아니라, 오직 당신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소서!…… 나도 그대들과 똑같은 인간이다. 인간으로 살며 내 영혼과 하느님을 생각하게 해주시오.”

태양과 에테르의 각 원자는 그 자체로 완전한 구체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이해를 넘어설 만큼 거대한 전체의 한 부분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각 개인은 자기 안에 고유한 목적들을 지니면서도,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보편적 목적에 봉사하도록 그 목적들을 부여받는다.

꽃에 내려앉은 벌이 아이를 쏘았다. 아이는 벌을 무서워하고 벌은 사람을 쏘려고 존재한다고 단언한다. 시인은 꽃받침에서 꿀을 빠는 벌을 찬미하며, 벌은 꽃의 향기를 빨아들이려고 존재한다고 말한다. 양봉가는 벌이 꽃가루를 모아 벌집으로 나르는 것을 보고 꿀을 모으려고 존재한다고 말한다. 벌집의 생활을 더 자세히 연구한 다른 양봉가는 벌이 어린 벌들을 먹이고 여왕벌을 기르려고 꽃가루를 모으며 종족을 이어가려고 존재한다고 말한다. 식물학자는 수꽃의 꽃가루를 묻힌 채 암술로 날아간 벌이 암술을 수정시키는 것을 알아차리고 여기에서 벌이 존재하는 목적을 본다. 식물의 이동을 관찰한 또 다른 사람은 벌이 이 일을 돕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벌의 목적이 여기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벌의 궁극적 목적은 첫 번째나 두 번째 또는 인간의 정신이 알아볼 수 있는 어떤 과정으로도 다 설명되지 않는다. 인간의 지성이 이런 목적을 발견하며 높이 올라갈수록 궁극적 목적은 이해 밖에 있음이 더욱 분명해진다.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은 벌의 삶과 다른 생명의 발현 사이의 관계뿐이다. 역사적 인물과 민족의 목적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