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녀가 나가자마자 그는 일어나 문에 고리를 걸고, 아까 라주미힌이 가져왔다가 제 손으로 다시 묶어 놓은 옷 보따리를 풀고 옷을 입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갑자기 완전히 평온해진 듯했다. 아까와 같은 얼빠진 헛소리도 없었고, 요즈음 내내 그랬던 것 같은 공황의 두려움도 없었다. 그것은 어떤 이상하고 느닷없는 평온의 첫 순간이었다. 그의 동작은 정확하고 또렷했으며, 거기에는 굳은 의도가 내비쳤다. '오늘 안에, 오늘 안에!…'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기야 그는 자기가 아직 허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평온에까지, 움직이지 않는 하나의 관념에까지 다다른 극도의 정신적 긴장이 그에게 힘과 자신을 주었다. 어쨌든 그는 거리에서 쓰러지지는 않으리라고 기대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새것으로 차려입고 나서 그는 탁자에 놓인 돈을 바라보다가, 잠깐 생각하고는 주머니에 넣었다. 돈은 이십오 루블이었다. 라주미힌이 옷값으로 쓴 십 루블에서 나온 구리 오 코페이카짜리 거스름돈도 전부 챙겼다. 그런 다음 조용히 고리를 벗기고 방에서 나와 계단을 내려가서, 활짝 열린 부엌을 들여다보았다. 나스타샤가 그에게 등을 돌린 채 몸을 숙이고 주인집 사모바르에 바람을 넣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하기야 그가 나가리라고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일 분 뒤 그는 이미 거리에 있었다.
여덟 시쯤이었고 해가 지고 있었다. 무더위는 여전했다. 그러나 그는 이 악취 나고 먼지투성이인, 도시에 감염된 공기를 탐욕스럽게 들이마셨다. 머리가 조금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그의 충혈된 눈과 여위고 누렇게 창백한 얼굴에서 어떤 사나운 기운이 갑자기 번뜩였다. 그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했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가 아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이 모든 것을 오늘 안에, 단번에, 지금 당장 끝내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 그렇게는 살고 싶지 않으니까.' 어떻게 끝낸다는 것인가? 무엇으로 끝낸다는 것인가? 그것에 대해서는 그는 아무 생각도 없었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생각을 쫓아냈다. 생각이 그를 괴롭혔던 것이다. 그는 다만 모든 것이 이렇게든 저렇게든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느끼고 알 뿐이었다.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그는 절망적이고 꿈쩍도 않는 자신감과 결단을 담아 되풀이했다.
오랜 버릇대로, 예전에 산책하던 익숙한 길을 따라 그는 곧장 센나야 쪽으로 향했다. 센나야에 이르기 전, 작은 잡화점 앞 포석 위에 검은 머리의 젊은 손풍금 연주자가 서서 몹시 감상적인 로망스를 돌리고 있었다. 그는 제 앞 인도에 서 있는 열다섯쯤 된 처녀에게 반주를 맞춰 주고 있었는데, 처녀는 아가씨처럼 크리놀린을 받쳐 입고 망토를 걸치고 장갑을 끼고 불꽃 빛깔 깃털을 꽂은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다. 하나같이 낡고 닳아빠진 것들이었다. 거리의, 갈라졌으되 제법 듣기 좋고 힘 있는 목소리로 처녀는 가게에서 이 코페이카짜리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로망스를 뽑아내고 있었다. 라스콜니코프는 두세 명의 구경꾼 곁에 걸음을 멈추고 잠시 듣다가, 오 코페이카를 꺼내 처녀의 손에 놓아 주었다. 처녀는 가장 감상적이고 높은 음에서 노래를 뚝 끊었다. 칼로 자르듯이. 그러고는 손풍금 연주자에게 날카롭게 외쳤다. “됐어!” 그러고는 둘 다 다음 가게 쪽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당신은 거리의 노래를 좋아합니까?” 라스콜니코프가 갑자기, 손풍금 옆에 나란히 서 있던 이미 젊지 않은 한 행인에게 말을 건넸다. 한가로이 거니는 사람처럼 보이는 이였다. 그는 흠칫 라스콜니코프를 바라보고 놀랐다. “나는 좋아합니다.” 라스콜니코프가 말을 이었는데, 전혀 거리의 노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 않은 낯빛이었다. “나는 춥고 어둡고 축축한 가을 저녁에, 반드시 축축한 저녁이라야 하는데,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다 창백하게 푸르고 병든 얼굴을 하고 있을 때 손풍금에 맞춰 노래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아니면 더 좋기로는, 젖은 눈이 바람도 없이 곧장 아래로 떨어질 때 말이지요, 아시겠습니까? 그리고 그 사이로 가스등이 번쩍일 때…”
“모르겠습니다만… 실례하겠습니다…” 신사는 그 질문에도, 라스콜니코프의 이상한 낯빛에도 겁을 먹고 중얼거리고는 길 건너편으로 옮겨 갔다.
라스콜니코프는 곧장 걸어서, 그때 리자베타와 이야기를 나누던 소시민 부부가 장사하던 센나야의 그 모퉁이로 나왔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없었다. 자리를 알아보고 그는 걸음을 멈추어 둘러보고는, 곡물 창고 입구에서 하품을 하고 있는 붉은 루바시카 차림의 젊은 사내를 향해 돌아섰다.
“여기 모퉁이에서 소시민 한 사람이 아낙하고, 그러니까 제 아내하고 장사를 하지요?”
“별의별 사람이 다 장사합지요.” 사내가 위에서 아래로 라스콜니코프를 훑어보며 대답했다.
“이름이 뭡니까?”
“세례 받은 대로 부르지요.”
“자네도 자라이스크 사람 아닌가? 어느 현인가?”
사내가 다시 라스콜니코프를 바라보았다.
“저희는요, 각하, 현이 아니라 군입니다요. 그리고 다닌 건 형이고 저는 집에 앉아 있었으니 모릅니다요. 용서하십시오, 각하, 너그러이 봐주십시오.”
“저 위가 밥집인가?”
“술집입지요. 당구도 있고요. 공주님들도 계시고요… 얼씨구!”
라스콜니코프는 광장을 가로질러 갔다. 저쪽 모퉁이에 빽빽한 사람들의 무리가 서 있었는데 죄다 농부들이었다. 그는 가장 빽빽한 한가운데로 파고들어 얼굴들을 들여다보았다. 어쩐지 그는 아무하고나 말을 붙이고 싶은 마음에 끌렸다. 그러나 농부들은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저희끼리 무리 지어 무언가를 떠들어 대고 있었다. 그는 잠시 서 있다가 생각에 잠기더니, 인도를 따라 오른쪽으로, 브 거리 쪽으로 걸어갔다. 광장을 지나자 그는 골목으로 들어섰다.
그는 전에도 이 짧은 골목을 지나다녔다. 꺾어지는 모양을 하고 광장에서 사도바야로 이어지는 골목이었다. 요즈음 그는 속이 뒤집힐 때면 오히려 이런 곳들을 죄다 쏘다니고 싶어 했다. '더 뒤집히라고.' 그런데 지금은 아무 생각 없이 들어선 것이었다. 거기에는 큰 건물 하나가 있는데 전부가 선술집과 그 밖의 먹고 마시는 업소로 채워져 있었다. 거기서 여자들이 쉴 새 없이 뛰어나왔는데, 「이웃에 다니는」 차림이었다.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옷 한 벌만 걸친 차림 말이다. 두세 곳에서는 그들이 인도에 무리 지어 몰려 있었는데, 주로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어귀였다. 계단 두 칸을 내려가면 갖가지 몹시 흥겨운 업소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그중 한 곳에서는 바로 지금 온 거리가 울리도록 소란과 떠들썩함이 벌어지고 있었고, 기타가 퉁겨지고 노래가 불리고 아주 즐거웠다. 큰 무리의 여자들이 입구에 몰려 있었는데, 더러는 계단에 앉고 더러는 인도에 앉고 더러는 서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곁의 포석 위에서는 담배를 문 취한 병사가 큰 소리로 욕을 해 대며 비틀거리고 있었는데, 어디론가 들어가려는 듯하면서도 어디였는지 잊어버린 듯했다. 누더기를 걸친 자 하나가 또 다른 누더기를 걸친 자와 욕지거리를 주고받았고, 죽은 듯이 취한 누군가는 길을 가로질러 뒹굴고 있었다. 라스콜니코프는 여자들의 큰 무리 앞에 멈춰 섰다. 그들은 쉰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무명 원피스에 염소 가죽 신을 신고 머리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더러는 마흔이 넘었고 더러는 열일곱쯤이었는데, 거의 다 눈두덩이 멍들어 있었다.
어쩐지 그는 저 아래에서 들려오는 노래와 이 모든 소란과 떠들썩함에 마음이 끌렸다… 거기서는 웃음과 새된 소리 가운데 흥겨운 가락의 가느다란 가성과 기타에 맞춰 누군가가 뒤축으로 박자를 찍으며 필사적으로 춤을 추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입구에 몸을 숙인 채 유심히, 침울하게, 생각에 잠겨 귀를 기울였고, 호기심을 품고 인도에서 현관 안을 들여다보았다.
나의 어여쁜 파수꾼 나리 공연히 나를 때리지 마오
가느다란 목소리가 그렇게 흘러나왔다. 라스콜니코프는 무엇을 부르는지 알아들으려는 마음이 끔찍하게 간절해졌다. 마치 바로 거기에 모든 일이 걸려 있기라도 한 것처럼.
'들어가 볼까? 웃어 대는군! 취해서. 그런데 나도 취해 버릴까?' 그는 생각했다.
“안 들어오세요, 고운 나리?” 여자들 가운데 하나가 제법 낭랑하고 아직 그리 쉬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젊었고 무리 가운데 유일하게 역겹지 않기까지 했다.
“야, 예쁘구나!” 그가 몸을 일으켜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녀는 미소 지었다. 칭찬이 몹시 마음에 든 것이다.
“나리도 무척 잘생기셨어요.” 그녀가 말했다.
“어쩌면 저리 말랐담!” 또 하나가 굵은 소리로 한마디 했다. “병원에서 나오셨나?”
“장군댁 따님인가 싶더니만 코는 죄다 들창코로구나!” 술기운이 도는 농부 하나가 갑자기 다가와 말을 끊었다. 아르먀크를 풀어헤치고 능글맞게 웃는 상판이었다. “야, 신나는구나!”
“왔으면 들어가지!”
“들어가고말고! 꿀맛이지!”
그러고는 곤두박질치듯 아래로 내려갔다.
라스콜니코프는 발길을 옮겼다.
“이봐요, 나리!” 아까 그 처녀가 뒤에서 소리쳤다.
“왜?”
그녀는 부끄러워했다.
“고운 나리, 저야 언제든 나리와 시간을 나누면 기쁘겠지만 지금은 어쩐지 나리 앞에서 염치가 서질 않네요. 마음씨 좋은 기사님, 저한테 한잔할 육 코페이카만 주세요!”
라스콜니코프는 손에 잡히는 대로 꺼냈다. 오 코페이카짜리 세 닢이었다.
“아이고, 마음씨 좋으신 나리!”
“이름이 뭐냐?”
“두클리다를 찾으세요.”
“원, 저건 또 무슨 짓이람.” 무리 가운데 하나가 두클리다를 향해 고개를 저으며 불쑥 한마디 했다. “저렇게 조르는 건 나는 도무지 모르겠어. 나 같으면 부끄러워서 땅속으로 꺼질 것 같은데…”
라스콜니코프는 호기심을 품고 말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서른쯤 된 얽은 얼굴의 여자로, 온통 멍이 들고 윗입술이 부어 있었다. 그녀는 조용하고 진지하게 말하고 나무랐다.
'어디였더라,' 라스콜니코프는 더 걸어가며 생각했다. '어디서 읽었더라. 사형을 선고받은 어떤 자가 죽기 한 시간 전에 말하기를, 아니 생각하기를, 만일 자기가 어딘가 높은 곳에, 바위 위에, 그것도 두 발만 겨우 디딜 만큼 좁은 자리에 살아야 한다면, 그리고 사방이 낭떠러지와 대양과 영원한 어둠과 영원한 고독과 영원한 폭풍이라면, 그렇게 한 아르신 넓이의 공간에 서서 평생을, 천 년을, 영원을 버텨야 한다면, 그래도 지금 죽는 것보다는 그렇게 사는 편이 낫겠다고 했다지. 살기만 한다면, 살고 살고 또 살기만 한다면! 어떻게 살든 상관없다, 살기만 한다면!… 이 무슨 진실인가! 하느님, 이 얼마나 진실인가! 인간은 비열한 존재다! 그리고 인간을 그 때문에 비열하다고 부르는 자 또한 비열하다.' 그는 일 분쯤 뒤에 덧붙였다.
그는 다른 거리로 나섰다. '오! 「수정궁」! 아까 라주미힌이 「수정궁」 이야기를 했지. 그런데 내가 무엇을 하려던 거였더라? 아, 읽는 것! 조시모프가 신문에서 읽었다고 했지…'
“신문 있소?” 그는 몇 개의 방으로 된 아주 널찍하고 깔끔하기까지 한 술집으로 들어서며 물었다. 하기야 방들은 제법 비어 있었다. 두세 명의 손님이 차를 마시고 있었고, 안쪽 방 하나에서는 네 사람쯤 되는 무리가 앉아 샴페인을 마시고 있었다. 라스콜니코프에게는 그들 가운데 자메토프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기야 멀어서 잘 알아볼 수는 없었다.
'그래, 있으라지!' 그는 생각했다.
“보드카 드릴깝쇼?” 심부름꾼이 물었다.
“차를 가져오게. 그리고 신문을 가져오게, 지난 것으로, 한 닷새치쯤 연달아서. 술값을 얹어 주지.”
“알겠습니다요. 오늘 치는 여기 있습니다요. 보드카도 드릴깝쇼?”
지난 신문과 차가 나왔다. 라스콜니코프는 자리를 잡고 찾기 시작했다. '이즐레르—이즐레르—아스텍—아스텍—이즐레르—바르톨라—마시모—아스텍—이즐레르… 아, 젠장! 아, 여기 잡보란이 있군. 계단에서 굴러떨어짐—소시민 하나가 술로 타 죽음—페스키에 화재—페테르부르크 구에 화재—또 페테르부르크 구에 화재—또 페테르부르크 구에 화재—이즐레르—이즐레르—이즐레르—이즐레르—마시모… 아, 여기 있다…'
그는 마침내 찾던 것을 찾아내 읽기 시작했다. 글줄이 눈앞에서 튀었으나 그는 그래도 「소식」을 끝까지 다 읽고, 이어지는 호수에서 뒤이은 속보를 탐욕스럽게 찾기 시작했다. 종이장을 넘기는 그의 손이 경련 같은 조급함으로 떨렸다. 갑자기 누군가가 그의 옆에, 그의 탁자에 앉았다. 그가 들여다보니—자메토프였다. 바로 그 자메토프가 바로 그 모습으로, 반지를 끼고 사슬 줄을 늘어뜨리고 검고 곱슬곱슬한 머리에 기름을 발라 가르마를 타고, 멋 부린 조끼에 얼마쯤 낡은 프록코트를 입고 싱싱하지 못한 속옷을 받쳐 입은 채였다. 그는 유쾌했다. 적어도 아주 유쾌하고 서글서글하게 웃고 있었다. 거무스름한 얼굴이 마신 샴페인 때문에 얼마쯤 달아올라 있었다.
“아니! 여기 계셨습니까?” 그는 의아해하면서, 그러면서도 백 년을 알고 지낸 듯한 말투로 입을 뗐다. “어제만 해도 라주미힌이 당신이 아직 정신이 없다고 했는데요. 이거 이상한데! 사실 나도 당신한테 갔었습니다…”
라스콜니코프는 그가 다가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신문을 밀쳐 놓고 자메토프 쪽으로 돌아앉았다. 그의 입술에는 비웃음이 걸려 있었고, 그 비웃음 속에는 어떤 새로운, 성마른 조급함이 내비쳤다.
“오셨던 건 알고 있소.” 그가 대답했다. “들었소. 양말을 찾으셨다지… 그런데 아시오, 라주미힌이 당신한테 홀딱 반해 있더군. 당신과 함께 라비자 이바노브나한테 다녀왔다고 하던데, 그때 당신이 애를 써서 화약 중위한테 눈짓을 보내는데 그가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던 그 여자 말이오. 기억하시오? 어떻게 못 알아들을 수가 있는지—뻔한 일인데… 안 그렇소?”
“그런데 그 친구 참 난폭하더군요!”
“화약 말이오?”
“아니요, 당신 친구 라주미힌 말입니다…”
“자메토프 씨, 당신은 살기 좋겠구려. 재미난 곳에 관세도 없이 들어가니 말이오! 방금 당신한테 샴페인을 따라 준 건 누구요?”
“그건 우리가… 마신 겁니다. 따라 주다니요!”
“사례금이지! 뭐든 누리시는군!” 라스콜니코프가 웃었다. “괜찮소, 마음씨 좋은 소년, 괜찮소!” 그는 자메토프의 어깨를 툭 치며 덧붙였다. “나는 심술로 하는 말이 아니라 「악의로 그런 게 아니라 온통 사랑으로, 장난으로」 하는 말이오. 당신네 그 일꾼이 미치카를 두들기면서 한 말 그대로요, 그 노파 사건 말이오.”
“그건 어떻게 아십니까?”
“내가 당신보다 더 많이 알지도 모르지.”
“참 이상한 분이시군요… 아직 많이 편찮으신 게 분명합니다. 공연히 나오셨어요…”
“내가 이상해 보이오?”
“예. 그런데 무슨 신문을 읽고 계셨습니까?”
“신문이오.”
“화재 기사가 많이 나오지요…”
“아니, 나는 화재 이야기가 아니오.” 여기서 그는 수수께끼처럼 자메토프를 바라보았다. 비웃는 웃음이 다시 그의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아니, 나는 화재 이야기가 아니오.” 그는 자메토프에게 눈짓을 하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실토해 보시오, 사랑스러운 젊은이, 내가 무엇을 읽고 있었는지 끔찍하게 알고 싶지 않소?”
“전혀 알고 싶지 않습니다. 그냥 물어본 겁니다. 묻지도 못합니까? 왜 자꾸…”
“이보시오, 당신은 교육받은 사람이오, 문학을 아는 사람이오, 안 그렇소?”
“김나지야 육 학년까지 다녔습니다.” 자메토프가 얼마쯤 위엄을 갖추어 대답했다.
“육 학년! 아이고 내 참새 같으니! 가르마를 타고 반지를 끼고—부자로군! 이런, 어여쁜 소년일세!” 여기서 라스콜니코프는 자메토프의 얼굴에 대고 곧장 신경질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자메토프는 몸을 뒤로 물렸는데, 기분이 상했다기보다 몹시 놀란 것이었다.
“참 이상하시군요!” 자메토프가 아주 진지하게 되풀이했다. “아직도 헛소리를 하시는 것 같은데요.”
“헛소리? 거짓말 마라, 참새야!… 그래 내가 이상하다고? 그런데 내가 궁금하지 않소, 응? 궁금하지?”
“궁금합니다.”
“그럼 내가 무엇을 읽었는지,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 말할까? 저것 보시오, 내가 신문을 얼마나 많이 가져오라고 했는지! 수상하지 않소?”
“말씀해 보시지요.”
“귀를 쫑긋 세웠소?”
“쫑긋이라니 무슨 말입니까?”
“쫑긋이 무슨 말인지는 나중에 말하고, 지금은, 나의 가장 사랑스러운 이여, 당신에게 밝히겠소… 아니, 이게 낫겠군. 「자백하겠소」… 아니, 이것도 아니군. 「진술하겠소, 그리고 당신이 그것을 받아 적으시오」—이게 맞소! 그러니까 진술하겠소. 내가 읽은 것은, 관심을 둔 것은… 찾은 것은… 뒤진 것은—” 라스콜니코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뜸을 들였다. “뒤진 것은—그리고 그러려고 여기 들른 것인데—관리의 미망인인 노파의 살해 사건이오.” 그는 마침내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제 얼굴을 자메토프의 얼굴에 극도로 가까이 붙인 채였다. 자메토프는 꼼짝도 않고 제 얼굴을 그의 얼굴에서 물리지도 않고 똑바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중에 자메토프에게 가장 이상하게 여겨진 것은, 둘 사이에 꼭 일 분 동안 침묵이 이어졌고 꼭 일 분 동안 둘이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읽었다고 해서 그게 뭐 어떻다는 겁니까!” 그가 의아함과 조급함에 갑자기 소리쳤다. “나하고 무슨 상관입니까! 그게 뭐가 어쨌다는 거지요?”
“바로 그 노파요.” 라스콜니코프가 자메토프의 외침에도 꿈쩍 않고 같은 속삭임으로 말을 이었다. “기억하시오, 사무소에서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을 때 내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던, 바로 그 노파 말이오. 자, 이제 아시겠소?”
“무슨 말씀입니까? 뭘… 「알겠느냐」는 겁니까?” 자메토프가 거의 불안에 질려 말했다.
라스콜니코프의 꿈쩍 않던 진지한 얼굴이 한순간에 달라지더니, 갑자기 그는 아까와 똑같은 신경질적인 웃음을 다시 터뜨렸다. 마치 제 스스로는 도무지 자신을 억누를 힘이 없다는 듯이. 그리고 한순간에 그에게, 느낌까지 더없이 또렷하게 얼마 전의 한 순간이 떠올랐다. 그가 도끼를 들고 문 뒤에 서 있었고 도끼는 튀어 오르고 있었고 저들은 문 밖에서 욕을 하며 밀어붙이고 있었는데, 그때 갑자기 저들에게 소리치고 싶고, 저들과 욕을 주고받고 싶고, 혀를 내밀어 보이고 싶고, 저들을 놀리고 싶고, 웃고 싶고, 웃어 대고, 웃어 대고, 웃어 대고 싶었던 그 순간이.
“당신은 미치광이거나 아니면…” 자메토프가 말하다가 멈췄다.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어떤 생각에 별안간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아니면? 「아니면」 뭐요? 자, 뭐요? 자, 말해 보시오!”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메토프가 발끈해서 대답했다. “전부 헛소리입니다!”
둘 다 입을 다물었다. 느닷없는 발작 같은 웃음이 터진 뒤 라스콜니코프는 갑자기 생각에 잠겨 서글퍼졌다. 그는 탁자에 팔꿈치를 괴고 손으로 머리를 받쳤다. 자메토프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린 듯했다. 침묵이 제법 오래 이어졌다.
“차를 왜 안 드십니까? 식습니다.” 자메토프가 말했다.
“응? 뭐요? 차?… 그럽시다…” 라스콜니코프는 잔에서 한 모금 마시고 빵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그러다 문득 자메토프를 바라보고는 전부 기억해 낸 듯, 몸을 한번 털어 낸 듯했다. 그의 얼굴은 그 순간 처음의 비웃는 표정을 되찾았다. 그는 계속 차를 마셨다.
“요즘 이런 사기가 많이 생겨났습니다.” 자메토프가 말했다. “얼마 전에도 「모스크바 통보」에서 읽었는데, 모스크바에서 위조 화폐범 일당을 통째로 잡았다더군요. 결사가 하나 통째로요. 채권을 위조했답니다.”
“오, 그건 벌써 오래된 일이오! 나는 한 달 전에 읽었소.” 라스콜니코프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래, 당신이 보기엔 그게 사기꾼이오?” 그가 웃으며 덧붙였다.
“사기꾼이 아니고 뭡니까?”
“그게? 그건 어린애요, 풋내기지 사기꾼이 아니오! 그런 일에 오십 명이 통째로 모인다니! 그게 될 법이나 한 일이오? 그런 일은 사흘도 길지. 그것도 저마다 서로를 자기 자신보다 더 믿을 수 있어야 가능한 일이오! 그런데 하나가 취해서 입만 놀리면 전부 가루가 되는 거요! 풋내기들! 믿을 수 없는 자들을 고용해서 사무소에서 채권을 바꾸게 한다니. 그런 일을 처음 만난 자에게 맡긴단 말이오? 자, 풋내기들로 그럭저럭 되었다고 칩시다. 저마다 백만씩 바꿔 냈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다음은? 평생을? 저마다 평생 서로에게 매여 사는 거요! 차라리 목을 매는 게 낫지! 게다가 바꿀 줄도 몰랐소. 사무소에서 바꾸다가 오천을 받는데 손이 떨린 거요. 사천까지는 세고 다섯 번째 천은 세지도 않고 그냥 믿고 받았소. 얼른 주머니에 넣고 달아나려고. 그래서 의심을 산 거요. 바보 하나 때문에 전부 터져 버린 거지! 그래, 그런 식으로 될 법한 일이오?”
“손이 떨린 것 말입니까?” 자메토프가 받았다. “아니요, 그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니요, 저는 그건 있을 수 있다고 아주 확신합니다. 어떤 때는 못 버티는 법이지요.”
“그걸 못 버틴다고?”
“그럼 당신은 버티겠습니까? 아니요, 저라면 못 버팁니다! 백 루블 사례금을 받자고 그런 끔찍한 일을 하러 간다니! 위조 채권을 들고—어디로 간답니까?—그런 일로 이골이 난 은행 사무소로 간다니. 아니요, 저라면 당황할 겁니다. 당신은 당황하지 않겠습니까?”
라스콜니코프는 갑자기 다시 「혀를 내밀고」 싶어 끔찍하게 못 견딜 지경이 되었다. 오한이 순간순간 등줄기를 타고 지나갔다.
“나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요.” 그가 에둘러 말을 꺼냈다. “나라면 이렇게 바꾸겠소. 첫 번째 천을 세되 네 번쯤은 이 끝 저 끝에서 세고, 지폐 한 장 한 장을 들여다보고 나서 다음 천을 집겠소. 그것을 세기 시작해서 중간쯤까지 세다가, 오십 루블짜리를 하나 꺼내서 빛에 비춰 보고, 뒤집어서 또 빛에 비춰 보겠소. 가짜가 아닌가 하고. 「제가 겁이 나서요. 제 친척이 얼마 전에 이런 식으로 이십오 루블을 잃었거든요.」 그러고는 거기서 사연을 늘어놓겠소. 그리고 세 번째 천을 세기 시작하다가—아니 잠깐만, 아무래도 두 번째 천에서 일곱 번째 백을 잘못 센 것 같은데, 아무래도 미심쩍은데, 하고는 세 번째를 내던지고 다시 두 번째로 돌아가겠소. 그런 식으로 다섯 천을 전부. 그리고 다 끝냈을 때 다섯 번째와 두 번째에서 지폐를 한 장씩 꺼내 다시 빛에 비춰 보고 다시 미심쩍다고, 「죄송하지만 바꿔 주십시오」라고 하겠소. 그렇게 사무원이 진땀을 뺄 때까지 몰아붙여서, 나를 어떻게 떨쳐 낼지 모를 지경으로 만들겠소. 마침내 전부 끝내고 나가서 문을 열고—아니 잠깐 죄송합니다, 하고는 다시 돌아와 무언가를 물어보고 설명을 하나 더 듣겠소. 나라면 이렇게 하겠소!”
“어휴, 무서운 말씀을 하시는군요!” 자메토프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건 전부 말뿐이고, 실제로는 틀림없이 발이 걸려 넘어질 겁니다. 제 생각으로는 당신과 나뿐 아니라 닳고 닳은 필사적인 사람이라도 제 자신을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예를 들지요. 우리 구역에서 노파가 살해되었지요. 그자로 말하자면 꽤나 필사적인 대가리인 것 같고, 대낮에 온갖 위험을 무릅썼고, 오직 기적으로 빠져나갔는데—그래도 손이 떨린 겁니다. 털어 낼 줄을 몰랐고 버티지 못했지요. 정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라스콜니코프는 모욕이라도 당한 듯했다.
“알 수 있다고! 그럼 어디 지금 가서 그자를 잡아 보시오!” 그가 자메토프를 고약하게 부추기며 소리쳤다.
“뭐, 잡을 겁니다.”
“누가? 당신이? 당신이 잡는다고? 헛걸음만 하실 거요! 당신들한테 중요한 건 결국 이것뿐이지. 그자가 돈을 쓰느냐 안 쓰느냐. 돈이 없던 자가 갑자기 쓰기 시작한다, 그러니 그자가 아니겠느냐? 그런 걸로는 이만한 어린애도 마음만 먹으면 당신들을 속여 넘길 거요!”
“바로 그겁니다. 그자들이 다 그렇게 한다는 것 말입니다.” 자메토프가 대답했다. “죽이기는 꾀바르게 죽이고 목숨까지 걸어 놓고는, 곧바로 술집에서 잡히지요. 돈을 쓰는 데서 잡히는 겁니다. 다 당신처럼 꾀바른 것은 아니니까요. 당신이라면 물론 술집에는 안 가시겠지요?”
라스콜니코프는 미간을 찌푸리고 자메토프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당신은 입맛이 도신 모양인데, 내가 그 경우에 어떻게 했을지 알고 싶은 거요?” 그가 언짢게 물었다.
“알고 싶습니다.” 상대가 단단하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말하는 것도 바라보는 것도 어쩐지 지나치게 진지해지고 있었다.
“몹시?”
“몹시요.”
“좋소. 나라면 이렇게 했을 거요.” 라스콜니코프가 다시 갑자기 제 얼굴을 자메토프의 얼굴에 가까이 붙이고, 다시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다시 속삭임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상대가 몸을 떨 정도였다. “나라면 이렇게 했을 거요. 돈과 물건을 챙겨서 거기서 나오자마자, 어디에도 들르지 않고, 곧장 어디든 인적이 없고 울타리만 있고 사람이 거의 없는 곳으로 가겠소. 채마밭이라든가 그런 곳으로. 그리고 미리, 그 안마당에서 눈여겨 봐 두었을 거요. 일 푸드나 일 푸드 반쯤 되는 돌 하나를, 어딘가 구석에, 울타리 옆에, 어쩌면 집을 지을 때부터 놓여 있었을 돌을 말이오. 그 돌을 들어 올리면—그 밑에는 오목한 자리가 있을 거요—그 오목한 자리에 물건과 돈을 전부 넣겠소. 넣고 나서 돌을 전에 놓여 있던 모양 그대로 도로 얹고, 발로 꾹 눌러 놓고 그냥 가 버리겠소. 그리고 일 년이고 이 년이고 삼 년이고 꺼내지 않겠소. 자, 그럼 어디 찾아보시오! 있었는데 어디론가 사라진 거지!”
“당신은 미치광이입니다.” 자메토프가 어쩐지 그도 거의 속삭이듯 말하고는, 어쩐지 갑자기 라스콜니코프에게서 몸을 물렸다. 상대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끔찍하게 창백해졌다. 윗입술이 떨리며 튀어 올랐다. 그는 자메토프에게 되도록 가까이 몸을 숙이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은 채 입술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삼십 초쯤이 흘렀다. 그는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으나 자신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 무서운 말이, 그때의 문고리처럼 그의 입술 위에서 튀어 올랐다. 곧, 곧 튀어나올 참이었다. 곧, 이제 놓아 주기만 하면, 곧, 이제 발음하기만 하면!
“그런데 만일 노파와 리자베타를 죽인 것이 나라면?” 그가 갑자기 말했다. 그러고는—정신이 들었다.
자메토프가 흠칫 그를 바라보고 식탁보처럼 하얘졌다. 그의 얼굴이 웃음으로 일그러졌다.
“그게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그가 겨우 들리게 말했다.
라스콜니코프가 악의를 담아 그를 노려보았다.
“실토하시오, 당신은 믿었소? 그렇지? 그렇지 않소?”
“전혀 아닙니다! 이제는 어느 때보다도 더 믿지 않습니다!” 자메토프가 서둘러 말했다.
“드디어 걸렸군! 참새를 잡았어. 그러니까 전에는 믿었다는 거군. 지금 「어느 때보다도 더 믿지 않는다」니 말이오?”
“전혀 아니라니까요!” 자메토프가 눈에 띄게 당황해서 소리쳤다. “당신이 나를 겁준 것은 이리로 끌고 오려던 것이었습니까?”
“그러니까 믿지 않는다? 그럼 그때 내가 사무소에서 나갔을 때 당신들끼리 무슨 이야기를 시작했소? 그리고 내가 정신을 잃고 쓰러진 뒤에 화약 중위가 왜 나를 심문했소? 여봐라!” 그가 일어서서 모자를 집으며 심부름꾼에게 소리쳤다. “얼마냐?”
“모두 삼십 코페이카입니다요.” 상대가 달려오며 대답했다.
“자, 여기 술값으로 이십 코페이카 더 받아라. 이것 보시오, 돈이 이렇게 많소!” 그는 지폐를 쥔 떨리는 손을 자메토프에게 내밀었다. “빨간 것, 파란 것, 이십오 루블이오. 어디서 났겠소? 그리고 새 옷은 또 어디서 났겠소? 내게 일 코페이카도 없었다는 건 알고 있잖소! 주인 여자한테는 벌써 물어보셨겠지… 자, 이만하면 됐소! 이제 그만하지! 안녕히… 더없이 기분 좋게!…”
그는 어떤 사나운 히스테리의 감각에 온몸을 떨며 나왔다. 그 감각 속에는 그러면서도 견딜 수 없는 쾌감의 몫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침울했고 끔찍하게 지쳐 있었다. 그의 얼굴은 무슨 발작을 겪고 난 뒤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피로가 빠르게 커져 갔다. 그의 힘은 이제 첫 번째 충격에, 첫 번째 자극하는 감각에 갑자기 솟구쳤다가, 그 감각이 약해지는 만큼 똑같이 빠르게 약해졌다.
한편 혼자 남은 자메토프는 같은 자리에 오래도록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라스콜니코프는 뜻하지 않게 저 알려진 한 지점에 관한 그의 생각을 전부 뒤집어 놓았고, 그의 의견을 최종적으로 굳혀 놓았다.
'일리야 페트로비치는 멍청이다!' 그는 마침내 그렇게 결론지었다.
라스콜니코프가 거리로 나가는 문을 열자마자, 바로 그 현관 계단에서 갑자기 들어오던 라주미힌과 마주쳤다. 둘은 한 걸음 앞까지도 서로를 보지 못해서 하마터면 머리를 부딪칠 뻔했다. 얼마 동안 그들은 서로를 눈으로 훑었다. 라주미힌은 더없이 놀라워하고 있었으나, 갑자기 분노가, 진짜 분노가 그의 눈에서 무섭게 번뜩였다.
“여기 있었구나!” 그가 목청껏 소리쳤다. “침대에서 달아났어! 나는 소파 밑까지 뒤졌단 말이다! 다락에도 올라가 봤어! 너 때문에 나스타샤를 때릴 뻔했다고… 그런데 여기 있었구나! 로지카! 이게 무슨 뜻이냐? 전부 사실대로 말해! 실토해! 듣고 있나?”
“그건 너희 모두가 죽도록 지겨워졌다는 뜻이고, 나는 혼자 있고 싶다는 뜻이야.” 라스콜니코프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혼자? 아직 걷지도 못하면서, 아직 상판이 무명처럼 창백하고 숨도 가쁘면서! 바보 같으니!… 「수정궁」에서 뭘 했어? 당장 실토해!”
“놔.” 라스콜니코프가 말하고 지나가려 했다. 이것이 라주미힌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그는 그의 어깨를 꽉 붙들었다.
“놔? 네가 감히 「놔」라고 말해? 내가 지금 너를 어떻게 할지 알기나 해? 한 아름에 안아서 보따리처럼 묶어 겨드랑이에 끼고 집으로 데려가 자물쇠를 채워 버리겠다!”
“들어 봐, 라주미힌.” 라스콜니코프가 조용히, 보기에는 완전히 태연하게 말을 꺼냈다. “너는 내가 네 은혜를 바라지 않는다는 게 정말 보이지 않나? 그리고 그런 걸 침 뱉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무슨 신이 나나? 결국 그것을 견디기가 진심으로 힘겨운 자들에게 말이야. 그래, 너는 대체 왜 병이 나던 초에 나를 찾아냈나? 나는 어쩌면 죽는 편이 몹시 기뻤을지도 모르는데? 그래, 내가 오늘 너에게 충분히 보여 주지 않았나? 네가 나를 괴롭히고 있다고, 네가… 지겹다고! 정말이지 사람을 괴롭히는 게 그렇게 신이 나나! 장담하는데 이 모든 것이 내 회복을 진지하게 방해하고 있어. 끊임없이 나를 자극하니까. 아까 조시모프는 나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가 버렸잖나! 그러니 제발 너도 떨어져! 그리고 결국 네가 무슨 권리로 나를 힘으로 붙들어 두나? 내가 지금 완전히 온전한 정신으로 말하고 있다는 게 정말 보이지 않나? 무엇으로, 무엇으로 너에게 빌어야 하는지 가르쳐 다오, 네가 나에게 들러붙지도 않고 은혜를 베풀지도 않게 하려면? 내가 배은망덕하다고 하자, 내가 비열하다고 하자, 다만 제발 너희 모두 떨어져 다오, 떨어져! 떨어져! 떨어져!”
그는 쏟아부을 준비가 된 온갖 독을 미리부터 기뻐하며 태연하게 시작했으나, 아까 루진에게 그랬듯 미친 듯이 숨을 헐떡이며 끝맺었다.
라주미힌은 잠시 서서 생각하다가 그의 팔을 놓았다.
“그럼 악마에게나 꺼져!” 그가 조용히, 거의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 “서!” 라스콜니코프가 막 발을 떼려 하자 그가 별안간 포효했다. “내 말을 들어. 너희 모두 하나같이 수다쟁이에 허풍선이라는 것을 너에게 선언한다! 너희한테 자그마한 고통이 하나 생기면 암탉이 달걀을 품듯 그것을 품고 다니지! 그것마저 남의 작가들한테서 훔쳐 오고 말이야. 너희 안에는 독자적인 삶의 기미라고는 없어! 너희는 고래 기름 연고로 만들어졌고 피 대신 유장(乳漿)이 흐르지! 너희 가운데 아무도 나는 믿지 않아! 어떤 사정에서든 너희의 첫 번째 일은 어떻게 하면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까 하는 거야! 서-어-어!” 그는 라스콜니코프가 또 발을 떼려는 것을 알아채고 두 배의 분노로 소리쳤다. “끝까지 들어! 오늘 우리 집에 집들이로 사람들이 모이는 걸 너도 알지. 어쩌면 벌써들 와 있을 거야. 삼촌을 거기 남겨 뒀거든—방금 다녀왔어—오는 사람들을 맞으라고. 그러니 말이다, 만일 네가 바보가 아니라면, 속된 바보가, 꽉 찬 바보가, 외국어에서 옮겨 온 번역판 바보가 아니라면—봐라 로댜, 나도 인정한다, 너는 머리 좋은 녀석이지만 바보야!—그러니 말이다, 만일 네가 바보가 아니라면, 공연히 장화나 닳게 하느니 오늘 저녁 나한테 들러 앉았다 가는 편이 나을 거다. 이미 나왔으니 어쩔 수 없잖아! 푹신한 안락의자를 끌어다 주지, 주인집에 있어… 차도 있고, 사람들도 있고… 아니면 긴 의자에 눕혀 주지. 어쨌든 우리 사이에 누워는 있을 거 아냐… 조시모프도 올 거야. 들를 거지?”
“아니.”
“거-짓-말!” 라주미힌이 조바심을 내며 외쳤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너는 네 자신을 장담할 수 없어! 게다가 너는 이런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나는 천 번쯤 똑같이 사람들과 갈라섰다가 다시 돌아가 달려갔다! 부끄러워지거든—그러면 그 사람에게 돌아가는 거야! 그러니 기억해 둬. 포친코프 집, 삼 층이다…”
“라주미힌 씨, 그런 식으로 가다가는 은혜 베푸는 즐거움을 위해 아무한테나 얻어맞기까지 하겠군.”
“누구한테? 나를! 그런 공상만 해도 코를 비틀어 뽑아 버리겠다! 포친코프 집, 사십칠 호, 바부시킨이라는 관리의 집이다…”
“안 갈 거야, 라주미힌.” 라스콜니코프는 돌아서서 걸어갔다.
“내기를 걸어도 좋다, 넌 온다!” 라주미힌이 뒤에서 소리쳤다. “안 그러면 너는… 안 그러면 너를 알고 싶지도 않다! 잠깐, 여봐! 자메토프가 거기 있나?”
“있어.”
“봤어?”
“봤어.”
“얘기도 했고?”
“했어.”
“무슨 얘기? 아, 됐다, 악마에게나 가라, 말하지 마. 포친코프, 사십칠, 바부시킨, 기억해!”
라스콜니코프는 사도바야까지 걸어가 모퉁이를 돌았다. 라주미힌은 생각에 잠겨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는 손을 내젓고 건물로 들어갔으나 계단 중간에서 멈춰 섰다.
'젠장!' 그는 거의 소리를 내어 말을 이었다. '말은 조리 있게 하는데, 그런데 어쩐지… 하기야 나도 바보지! 미친 사람이라고 조리 있게 말하지 말란 법이 있나? 게다가 조시모프도 바로 그것을 겁내는 것 같았어!' 그는 손가락으로 이마를 두드렸다. '그런데 만일… 그런데 지금 저 친구를 혼자 보내도 되나? 어쩌면 물에 빠져 죽을지도… 아이고, 내가 실수를 했다! 안 되겠어!' 그러고는 라스콜니코프를 쫓아 되돌아 달려갔으나 이미 자취도 없었다. 그는 침을 뱉고 빠른 걸음으로 「수정궁」으로 돌아갔다. 자메토프를 어서 심문하려고.
라스콜니코프는 곧장 스 다리로 걸어가 한가운데 난간 앞에 서서 두 팔꿈치를 괴고 멀리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라주미힌과 헤어지고 나서 그는 어찌나 기운이 빠졌는지 여기까지 겨우 다다랐던 것이다. 그는 어디든 거리에 앉거나 눕고 싶었다. 물 위로 몸을 숙인 채 그는 저무는 해의 마지막 장밋빛 반사를, 짙어지는 땅거미 속에 검어져 가는 집들의 줄을, 왼쪽 강안 어딘가 다락방에 있는 멀리 떨어진 창 하나가 마지막 햇살이 한순간 부딪쳐 불길에 싸인 듯 번쩍이는 것을, 검어져 가는 운하의 물을 기계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물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마침내 그의 눈앞에서 어떤 붉은 원들이 빙빙 돌기 시작했고, 집들이 움직이고, 행인들이, 강안이, 마차들이—이 모든 것이 빙빙 돌며 둘레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갑자기 그는 몸을 떨었다. 어쩌면 어떤 사납고 흉한 광경 덕분에 다시 한 번 실신에서 구해진 것인지도 몰랐다. 그는 누군가가 제 곁에, 오른쪽에 나란히 섰다는 것을 느꼈다. 그가 바라보니—여자였다. 키가 크고 머리에 수건을 쓰고, 누렇고 길쭉한 여윈 얼굴에 불그레하게 꺼진 눈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으나, 분명히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고 아무도 분간하지 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녀는 오른팔을 난간에 괴고 오른발을 들어 올려 난간 너머로 넘기고, 그다음에 왼발을 넘겨 운하로 몸을 던졌다. 더러운 물이 갈라지며 한순간 제물을 삼켰으나, 일 분 뒤 물에 빠진 여자가 떠올라 물살을 따라 조용히 떠내려갔다. 머리와 발은 물속에 잠기고 등은 물 위로 나온 채, 치마는 뒤집혀 물 위로 베개처럼 부풀어 오른 채였다.
“빠졌다! 빠졌다!” 수십 개의 목소리가 외쳤다. 사람들이 달려왔고, 양쪽 강안이 구경꾼으로 늘어섰으며, 다리 위 라스콜니코프의 둘레로 사람들이 몰려들어 뒤에서 밀고 눌렀다.
“어머나, 저건 우리 아프로시니유시카잖아!” 멀지 않은 곳에서 울먹이는 여자의 외침이 들렸다. “어머나, 살려 주세요! 여러분, 건져 주세요!”
“배를! 배를!” 사람들 속에서 외쳤다.
그러나 배는 이미 필요 없었다. 순경 하나가 운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뛰어 내려가 외투와 장화를 벗어 던지고 물로 뛰어들었다. 일은 어렵지 않았다. 물에 빠진 여자가 계단에서 두 걸음 떨어진 곳으로 떠내려왔고, 그는 오른손으로 그녀의 옷을 붙들고 왼손으로는 동료가 내밀어 준 장대를 붙잡을 수 있었으며, 곧바로 여자는 건져졌다. 사람들은 그녀를 계단의 화강암 판 위에 눕혔다. 그녀는 금방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켜 재채기를 하고 코를 풀기 시작했으며, 젖은 옷을 두 손으로 뜻 없이 문질러 댔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귀신들이 보일 만큼 마셨다니까요, 여러분, 귀신들이 보일 만큼요.” 아까 그 여자의 목소리가 이제는 아프로시니유시카 곁에서 울어 댔다. “며칠 전에도 목을 매려고 해서 밧줄에서 내려놨답니다. 제가 방금 가게에 가면서 계집아이한테 옆에서 지켜보라고 맡겨 놓았더니—그새 이런 일이 났지 뭐예요! 소시민 여자예요, 나리, 우리 소시민 여자예요, 옆에 살아요, 가에서 두 번째 집이에요, 바로 여기…”
사람들이 흩어졌고 경관들은 아직 물에 빠진 여자를 데리고 부산을 떨었으며, 누군가가 사무소 이야기를 외쳤다… 라스콜니코프는 이 모든 것을 이상한 무관심과 무심함의 감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역겨워졌다. '아니, 더럽다… 물은… 그럴 값어치가 없다.'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기다릴 것이 없다. 저건 뭐지, 사무소 이야기인가… 그런데 자메토프는 왜 사무소에 없지? 사무소는 열 시까지 열려 있는데…' 그는 난간에 등을 돌리고 제 둘레를 둘러보았다.
'그래, 어떠냐! 그렇게 하자!' 그는 결연히 말하고 다리에서 발을 떼어 사무소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그의 심장은 텅 비고 먹먹했다. 그는 생각하기를 원치 않았다. 서글픔조차 지나갔고, 집에서 나올 때의 그 기운은—'모든 것을 끝내겠다!'던 그 기운은—흔적도 없었다. 완전한 무감각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래, 이것도 하나의 출구다!' 그는 운하의 강안을 조용히 맥없이 걸으며 생각했다. '어쨌든 끝내는 거다, 내가 원하니까… 그런데 이게 출구이긴 한가? 아무래도 좋다! 한 아르신 넓이의 공간은 있겠지—헤! 그런데 이 무슨 끝인가! 정말로 끝인가? 저들에게 말할까 말까? 에… 젠장! 게다가 지쳤다. 어디든 얼른 눕거나 앉았으면! 가장 부끄러운 것은 너무 어리석다는 것이다. 그것도 침이나 뱉어 주자. 흥, 무슨 어리석은 생각들이 머리에 떠오르는가…'
사무소로 가려면 계속 곧장 가다가 두 번째 모퉁이에서 왼쪽으로 꺾어야 했다. 거기서 두 걸음 거리였다. 그러나 첫 번째 모퉁이에 이르러 그는 걸음을 멈추고 생각하다가, 골목으로 꺾어 두 거리를 돌아가는 길로 들어섰다. 어쩌면 아무 목적도 없이, 어쩌면 단 일 분이라도 더 끌어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는지도 몰랐다. 그는 걸으며 땅을 보고 있었다. 갑자기 누군가가 그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이기라도 한 듯했다. 그는 고개를 들었고, 자기가 그 집 앞, 바로 그 대문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날 저녁 이후로 그는 여기 온 적도 없고 옆을 지나간 적도 없었다.
물리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욕망이 그를 끌어당겼다. 그는 건물로 들어가 대문간을 전부 지나, 그다음 오른쪽 첫 번째 입구로 들어가 낯익은 계단을 사 층까지 올라가기 시작했다. 좁고 가파른 계단은 몹시 어두웠다. 그는 층계참마다 멈춰 서서 호기심을 품고 둘러보았다. 이 층 층계참의 창에서는 창틀이 아예 떼어져 있었다. '그때는 이렇지 않았다.' 그는 생각했다. 여기가 니콜라시카와 미치카가 일하던 삼 층 집이다. '잠겼군. 문도 새로 칠했고. 그러니까 세를 놓는다는 뜻이다.' 여기가 사 층… 그리고 오 층… '여기다!' 그는 의아해졌다. 이 집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거기에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이런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잠시 망설이다가 그는 마지막 계단을 올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 집도 새로 손보고 있었고 안에는 일꾼들이 있었다. 그것이 그를 얻어맞은 것처럼 만든 듯했다. 어째서인지 그는 모든 것을 자기가 그때 두고 온 그대로, 어쩌면 시신들까지도 바닥의 같은 자리에 있는 그대로 마주하게 되리라고 그려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맨 벽뿐이고 가구는 하나도 없었다. 어쩐지 이상했다! 그는 창가로 가서 창턱에 앉았다.
일꾼은 모두 둘로 다 젊은 사내였는데, 하나는 나이가 좀 있고 다른 하나는 훨씬 어렸다. 그들은 전의 누렇고 닳아빠진 벽지 대신 연보랏빛 꽃무늬가 있는 흰 벽지를 새로 바르고 있었다. 라스콜니코프는 어째서인지 그것이 끔찍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이 새 벽지를 적의를 품고 바라보았다. 모든 것을 이렇게 바꿔 놓은 것이 아깝기라도 한 것처럼.
일꾼들은 분명히 일이 늦어진 모양이어서 지금은 서둘러 종이를 말아 놓고 집에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라스콜니코프가 나타난 것은 그들의 주의를 거의 끌지 못했다. 그들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라스콜니코프는 팔짱을 끼고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년이 아침에 나한테 왔는데 말이야.” 나이 든 쪽이 어린 쪽에게 말하고 있었다. “아주 이른 아침에, 온통 차려입고 왔지. 그래 내가 말했지. 「너 무엇 때문에 내 앞에서 레몬 흉내를 내느냐, 무엇 때문에 내 앞에서 오렌지 흉내를 내느냐?」 그러니까 그년이 「티트 바실리치, 저는 이제부터 앞으로 온전히 나리 뜻대로 있고 싶어요」 하잖아. 그래서 그렇게 된 거야! 그런데 어찌나 차려입었는지—잡지야, 그냥 잡지 그림이야!”
“그런데 아저씨, 잡지가 뭐예요?” 어린 쪽이 물었다. 그는 분명히 「아저씨」에게 배우는 중이었다.
“잡지라는 건 말이다, 이 사람아, 그런 색칠한 그림들인데, 여기 재봉사들한테 토요일마다 우편으로 외국에서 온단다. 그러니까 누가 어떻게 입어야 하는지를, 남자 쪽도 마찬가지로 여자 쪽도 말이다. 그림이란 소리지. 남자 쪽은 죄다 베케샤를 입은 걸로 그려지는데, 여자 쪽 부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 사람아, 그런 주름 장식들이 있어서 네가 나한테 전부를 준다 해도 모자랄 지경이다!”
“이 피테르에는 없는 게 없구먼요!” 어린 쪽이 신이 나서 외쳤다. “아버지 어머니 말고는 다 있어요!”
“그거 말고는 말이다, 이 사람아, 다 있지.” 나이 든 쪽이 가르치듯 매듭지었다.
라스콜니코프는 일어나 다른 방으로 갔다. 예전에 궤와 서랍장이 놓여 있던 방이었다. 가구가 없으니 방이 그에게는 끔찍하게 작아 보였다. 벽지는 그대로였다. 구석의 벽지에는 성상을 모신 감실이 서 있던 자리가 뚜렷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는 잠시 바라보다가 제 창가로 돌아왔다. 나이 든 일꾼이 곁눈으로 그를 살피고 있었다.
“무슨 볼일이신지요?” 그가 갑자기 그를 향해 물었다.
대답 대신 라스콜니코프는 일어나 현관으로 나가 초인종 줄을 잡고 당겼다. 그 초인종이었다, 그 양철 소리였다! 그는 두 번째, 세 번째로 당겼다. 그는 귀를 기울이며 기억을 떠올렸다. 예전의 그 괴롭고 무섭고 흉하던 감각이 점점 더 선명하고 생생하게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는 한 번 울릴 때마다 몸을 떨었고, 그럴수록 점점 더 기분이 좋아졌다.
“대체 뭐가 필요한 거요? 누구요, 당신은?” 일꾼이 그에게 나오며 소리쳤다. 라스콜니코프는 다시 문 안으로 들어갔다.
“집을 세내고 싶소.” 그가 말했다. “둘러보는 중이오.”
“집은 밤중에 세놓지 않소. 게다가 당신은 문지기와 함께 와야 하오.”
“바닥은 씻었군. 칠을 할 건가?” 라스콜니코프가 말을 이었다. “피는 없나?”
“무슨 피 말이오?”
“그 노파를 동생하고 같이 죽였잖소. 여기 웅덩이가 하나 있었는데.”
“당신 대체 뭐 하는 사람이오?” 일꾼이 불안해하며 소리쳤다.
“나 말이오?”
“그렇소.”
“알고 싶소?… 사무소로 갑시다. 거기서 말하지.”
일꾼들이 의아해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저희는 나갈 때가 됐습니다요, 늦었어요. 가자, 알료시카. 잠가야 해.” 나이 든 일꾼이 말했다.
“그럼 갑시다!” 라스콜니코프가 무심하게 대답하고 앞장서서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여봐라, 문지기!” 그가 대문 아래로 나오며 소리쳤다.
거리에서 건물로 들어가는 바로 그 입구에 몇 사람이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문지기 둘과 아낙 하나, 할라트를 걸친 소시민 하나, 그리고 또 누군가였다. 라스콜니코프는 곧장 그들에게 걸어갔다.
“무슨 일이시오?” 문지기 가운데 하나가 응했다.
“사무소에 다녀왔나?”
“방금 다녀왔소. 무슨 일이시오?”
“거기 사람들 있나?”
“있소.”
“부감독관도 있나?”
“한동안 있었소. 무슨 일이시오?”
라스콜니코프는 대답하지 않고 생각에 잠긴 채 그와 나란히 섰다.
“집을 보러 왔답니다.” 나이 든 일꾼이 다가오며 말했다.
“무슨 집?”
“우리가 일하는 데요. 「어째서 피를 씻어 냈느냐? 여기서 살인이 있었는데 나는 세를 얻으러 왔다」고 하잖소. 그러고는 초인종을 당기는데 하마터면 끊어 놓을 뻔했소. 그러더니 사무소로 가자고, 거기서 전부 증명하겠다고 하잖소. 달라붙어서 떨어지질 않소.”
문지기가 의아해하며 미간을 찌푸린 채 라스콜니코프를 뜯어보았다.
“그래 당신은 대체 누구요?” 그가 좀 더 위협적으로 소리쳤다.
“나는 로디온 로마노비치 라스콜니코프요. 전에 대학생이었고, 여기 골목의 실 씨 집에, 여기서 멀지 않은 십사 호에 살고 있소. 문지기한테 물어보시오… 나를 알 거요.” 라스콜니코프는 이 모든 말을 어쩐지 게으르고 생각에 잠긴 듯이, 돌아보지도 않고 어두워진 거리를 유심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집에는 왜 오셨소?”
“보려고.”
“거기 볼 게 뭐가 있다고?”
“그냥 붙들어다 사무소로 데려갈까요?” 소시민이 불쑥 끼어들었다가 입을 다물었다.
라스콜니코프는 어깨 너머로 그에게 눈을 흘겨 주의 깊게 바라보고는 아까와 똑같이 조용하고 게으르게 말했다.
“갑시다!”
“그럼 데려갑시다!” 기운을 얻은 소시민이 받았다. “저 사람이 무엇 때문에 그 일을 캐고 다니나, 속에 무슨 생각이 들었나, 응?”
“취했는지 안 취했는지야 하느님이나 알지.” 일꾼이 중얼거렸다.
“당신 대체 무슨 일이오?” 문지기가 다시 소리쳤다. 진짜로 화가 나기 시작한 것이다. “왜 달라붙는 거요?”
“사무소가 무섭나?” 라스콜니코프가 그에게 비웃듯 말했다.
“무섭기는 뭐가 무서워? 왜 달라붙느냐고?”
“건달이야!” 아낙이 소리쳤다.
“저런 자하고 무슨 말을 섞나.” 다른 문지기가 소리쳤다. 아르먀크를 풀어헤치고 허리에 열쇠를 찬 거대한 사내였다. “꺼져!… 딱 건달이구먼… 꺼져!”
그러고는 라스콜니코프의 어깨를 붙잡아 거리로 내던졌다. 그는 곤두박질칠 뻔했으나 넘어지지는 않고 몸을 바로 세우고는, 잠자코 구경꾼들을 전부 둘러보고 더 걸어갔다.
“괴상한 사람이구먼.” 일꾼이 말했다.
“요즘 사람들이 괴상해졌어.” 아낙이 말했다.
“그래도 사무소로 데려갔어야 했는데.” 소시민이 덧붙였다.
“엮일 것 없어.” 큰 문지기가 매듭지었다. “딱 건달이야! 제 발로 저러는 거지, 뻔하지. 엮이면 못 풀어… 알지!”
'그래서 갈 것인가, 말 것인가?' 라스콜니코프는 네거리 한복판 포석 위에 멈춰 서서, 누군가에게서 마지막 한마디를 기다리기라도 하듯 둘레를 둘러보며 생각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아무것도 응답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그가 딛고 선 돌처럼 먹먹하고 죽어 있었다. 그에게 죽어 있었다, 오직 그에게만… 갑자기 멀리, 그에게서 이백 걸음쯤 떨어진 거리 끝에서, 짙어지는 어둠 속에서 그는 사람들의 무리와 말소리와 외침을 분간해 냈다… 무리 가운데 어떤 마차가 서 있었다… 거리 한복판에서 불빛 하나가 어른거렸다. '무슨 일이지?' 라스콜니코프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무리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무엇에든 매달리고 있는 셈이었고, 그 생각을 하며 차갑게 웃었다. 사무소에 대해서는 이미 확실히 마음을 정해 놓았고, 이제 곧 모든 것이 끝나리라는 것을 굳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작품 해설과 번역 노트
윤문 노트
1. 단상체가 열두 구간으로 돌아왔다. 앞 두 장에서 0개였던 내적 독백이 이 장에서 폭발한다. 그것도 첫 문단부터다—'오늘 안에, 오늘 안에!'. 2부 4·5장의 침묵이 차단이었다는 것이 여기서 확인된다. 저본의 «» 표지를 그대로 따랐고, 한 곳만 예외를 두었다: 자메토프가 혼자 남아 내리는 결론 '일리야 페트로비치는 멍청이다!'는 라스콜니코프가 아닌 인물의 속말이지만, 이것은 서술자가 옮긴 속말이 아니라 인물이 스스로 내린 판결이고 한 문장으로 독립해 있어 단상체로 두었다. 2부 5장의 루진(서술자가 눈빛을 읽어 옮긴 것 → 「 」)과 갈라지는 기준이다.
2. 이 장은 세 번의 「끝내겠다」로 구성된다. 집을 나설 때 '오늘 안에 끝내야 한다', 다리 위에서 '이것도 하나의 출구다', 마지막에 '이제 곧 모든 것이 끝나리라'. 그런데 세 번 모두 무엇을 끝낸다는 것인지는 끝까지 말해지지 않는다. 원문이 кончить를 목적어 없이 되풀이하는 것을 그대로 살려 우리말에서도 목적어를 보충하지 않았다. 자수를 결심했다고 읽히게 만드는 순간 이 장의 긴장이 사라진다.
3. 「한 아르신 넓이의 공간」이 두 번 나온다. 처음에는 사형수 이야기의 인용으로(살기만 한다면 어떻게든 살겠다), 두 번째는 다리를 떠나며 자조로('한 아르신 넓이의 공간은 있겠지—헤!'). 같은 표현이 한 장 안에서 희망과 조롱으로 뒤집히는 구조이므로 두 곳 모두 같은 말로 고정했다. 아르신은 제1부 제6장, 제7장, 제2부 제2장에도 나온 단위로, 이 연재에서 계속 음차로 유지한다.
4. 「그런데 만일 노파와 리자베타를 죽인 것이 나라면?」 — 이 소설 전체의 축 가운데 하나다. 원문은 А что, если это я старуху и Лизавету убил?로, 자백이 아니라 가정문이다. 우리말에서도 가정형을 유지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и — опомнился(그러고는—정신이 들었다)의 줄표를 살렸다. 말이 튀어나온 뒤에야 의식이 따라붙는 순서가 이 문장의 전부다.
5. 돌 밑에 숨기는 방법을 그가 실제로 한 그대로 말한다. 자메토프에게 늘어놓는 이 계획은 제2부 제2장에서 그가 실제로 한 행동과 일치한다—푸드 무게의 돌, 울타리 옆, 발로 눌러 놓기까지. 두 장면의 어휘를 일부러 겹쳐 두었다(돌, 오목한 자리, 울타리, 발로 눌러). 독자만 알아차리는 겹침이므로 어떤 표시도 덧붙이지 않았다.
6. 「참새」(воробушек) — 라스콜니코프가 자메토프를 부르는 애칭이자 조롱이다. 뒤에 「참새를 잡았어」로 되돌아오므로 두 곳을 같은 말로 묶었다. 러시아어 지소 접미사의 깔보는 다정함은 우리말로 완전히 옮겨지지 않지만, 「아이고 내 참새 같으니」의 감탄 어순으로 근사치를 만들었다.
7. 거리의 노래 두 줄은 원작에 박혀 있는 그대로 옮겼다. 도스토예프스키가 1866년 본문에 인용한 당대의 거리 노랫가락으로, 「파수꾼 나리, 공연히 때리지 마오」라는 뜻이다. 라스콜니코프가 이 가사를 알아들으려고 필사적으로 귀를 기울이는 것—「마치 바로 거기에 모든 일이 걸려 있기라도 한 것처럼」—이 이 대목의 전부이므로, 가사의 내용(맞는 자가 때리는 자에게 하는 호소)을 흐리지 않고 직역했다.
8. 신문 잡보란은 나열 그대로 두었다. 이즐레르, 아스텍, 바르톨라, 마시모, 화재, 화재, 또 화재—이 무의미한 반복을 지나 마침내 「소식」에 다다르는 것이 원문의 형태다. 정리하거나 줄이면 그가 신문을 뒤지는 시간의 길이가 사라진다. 각 항목은 주에서 설명했다.
9. 일꾼 둘의 대화를 축약하지 않았다. 잡지 그림, 베케샤, 주름 장식, 「아버지 어머니 말고는 다 있다」—살인 현장에서 벌어지는 이 태평한 잡담이 이 장의 유일한 웃음이자 가장 잔인한 대목이다. 라스콜니코프는 시신이 그대로 있으리라 그리며 올라왔는데, 거기에는 벽지를 바르며 여자 이야기를 하는 두 사람이 있을 뿐이다.
10. 「건달」(выжига) — 원뜻은 태우고 남은 찌꺼기 금속으로, 닳고 닳아 일부러 시비를 걸어 이득을 보는 자를 가리킨다. 문지기가 「제 발로 저러는 거지, 엮이면 못 풀어」라고 매듭짓는 데서 뜻이 드러난다. 그를 살인자로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그가 자백하러 왔는데 세상은 그를 술 취한 시비꾼으로 밀쳐 낸다. 이 장의 가장 냉혹한 대목이므로 단어를 부드럽게 만들지 않았다.
11. 문체 지표 — 대명사가 목표선을 넘었다. 원문 38,546자 → 본문 23,728자, 비율 0.616(연재 최고). 서술부 그/그녀 밀도 1만자당 133.4회로 목표 130을 3.4 초과했다(재검선 150은 밑돎). 원인은 이 장이 라스콜니코프 혼자 움직이는 장이라는 데 있다. 앞 세 장은 방 안에서 여러 인물이 이름으로 불리며 주고받는 구조라 대명사가 적었는데, 이 장은 거리를 걷는 한 사람을 서술이 계속 따라다니므로 주어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 기준선을 지키려고 주어를 생략하면 누가 걷고 누가 보는지가 흐려지는 대목이 많아 손대지 않고 기록한다. 3부 이후 단독 이동 장에서 같은 수치가 반복되면 그때 기준 자체를 층위별로 나누는 것을 검토한다. 대화 층위 문장 평균 19.1자, 서술 층위 평균 32.3자, 단상체 층위 평균 18.1자. 단상체 25개 구간 — 연재 최다이며, 앞 두 장의 0개에서 곧바로 튀어 올랐다.
주
- 크리놀린(кринолин) — 치마를 부풀리기 위해 안에 받쳐 입던 테. 1860년대 상류층 유행이었으므로, 거리에서 노래하는 열다섯 살 소녀가 낡은 크리놀린과 망토와 장갑을 갖춰 입은 것은 「아가씨처럼」 보이려는 차림이자 그 실패의 표시다.
- 센나야(Сенная) — 건초 광장. 페테르부르크의 빈민가이자 시장으로, 제1부 제5장에서 라스콜니코프가 리자베타의 말을 엿들은 바로 그 자리다.
- 각하(ваше сиятельство) — 공작·백작에게 쓰는 최상급 경칭. 낡은 옷차림의 청년에게 이 호칭을 쓰는 것은 공손이 아니라 조롱이다.
- 아르먀크(армяк) — 농부가 입던 두꺼운 모직 겉옷.
- 두클리다(Дуклида) — 그리스계 성인명 둘키티아(Дулькития)의 민간 변형. 매춘부가 본명 대신 쓰는 이름으로 읽힌다.
- 사형수 이야기 — 빅토르 위고가 번역 소개한 것으로 알려진 일화이며,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이 1849년 세묘노프 연병장에서 총살 직전 사면을 받은 경험과 겹친다. 그는 이 모티프를 『백치』에서 다시 쓴다.
- 아르신(аршин) — 약 71센티미터.
- 수정궁(Хрустальный дворец) — 제2부 제5장 주 2 참조. 라주미힌이 「내일 저녁 데려가겠다」고 한 바로 그 술집이며, 라스콜니코프는 하루 앞당겨 혼자 온다.
- 이즐레르(Излер) — 이반 이즐레르. 페테르부르크 「광천 인공 온천」 유원지의 경영자로, 신문에 그의 공연 광고가 끊임없이 실렸다.
- 아스텍 / 바르톨라 / 마시모 — 1865~66년 유럽을 순회하던 구경거리 흥행. 「아스텍인」이라 선전된 왜소증의 남매 막시모와 바르톨라를 고대 제사장의 후예로 꾸며 전시한 것이다. 이즐레르의 광고와 함께 신문 지면을 메우던 통속적 볼거리의 상징이다.
- 페스키 / 페테르부르크 구 — 화재 기사가 연달아 실리는 구역들. 1862년 페테르부르크 대화재 이후 방화 공포가 신문의 고정 소재였다.
- 모스크바 통보(Московские ведомости) — 당시의 주요 일간지.
- 풋내기(бланбеки) — 프랑스어 blanc-bec(부리가 흰 새, 곧 애송이)의 러시아식 표기. 라스콜니코프가 프랑스어 어휘를 러시아어 어미로 굴려 쓰는 것은 대학생 말투의 표지다.
- 푸드(пуд) — 약 16.4킬로그램. 「일 푸드나 일 푸드 반」은 성인 남자가 겨우 들어 올릴 만한 무게다.
- Assez causé! — 「말은 그만하면 됐다!」는 뜻의 프랑스어. 발자크 『고리오 영감』의 보트랭이 쓰는 말버릇으로, 당시 러시아 독자에게 익숙한 인용이었다. 라스콜니코프가 자메토프와의 대면을 끝내며 이 말을 쓰는 것은 스스로를 소설 속 인물의 자리에 놓는 몸짓이다. 프랑스어 그대로 두었다.
- 포친코프 집 사십칠 호, 바부시킨 — 라주미힌이 세 번 되풀이하는 주소. 제3부 제1장에서 실제로 쓰이게 된다.
- 고래 기름 연고(спермацетная мазь) — 향유고래에서 얻은 밀랍으로 만든 연고. 「물렁하고 미끈거리는 것으로 빚어졌다」는 욕이다. 유장(сыворотка)은 우유에서 치즈를 걷어 내고 남은 묽은 물이다.
- 베케샤(бекеша) — 모피를 덧댄 남성용 외투.
- 피테르(Питер) — 페테르부르크의 서민식 약칭.
- 할라트(халат) — 실내복 겸 겉옷. 소시민 계층이 거리에서도 입고 다녔다.
- 건달(выжига) — 위 윤문 노트 10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