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 죄와 벌 · 1866

제2부 제3장

병상에 누운 라스콜니코프를 나스타시야와 라주미힌이 돌본다.
병상에 누운 라스콜니코프를 나스타시야와 라주미힌이 돌본다.

그가 앓는 동안 내내 완전히 정신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열에 들떠 헛소리를 하면서도 절반쯤은 깨어 있는 상태였고, 그래서 나중에 그는 적잖은 것들을 기억해 냈다. 어떤 때는 제 둘레로 사람들이 잔뜩 몰려들어 자기를 붙들어 어디론가 내가려 하면서 자기를 두고 몹시 다투고 서로 으르렁거리는 것 같았다. 또 어떤 때는 방 안에 저 혼자만 남고 다들 나가 버렸는데, 그들이 자기를 무서워하면서도 이따금 문을 아주 조금만 열어 들여다보고는 으름장을 놓고 저희끼리 무언가를 짜고 웃어 대며 자기를 놀리는 것 같았다. 나스타샤가 곁에 있던 것은 자주 기억났고, 또 한 사람, 아주 낯익은 듯한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아볼 수는 있었지만 그게 대체 누구인지는 도무지 짚이지 않아 그것이 안타까워 견딜 수가 없었고 울기까지 했다. 어느 때는 자기가 벌써 한 달째 누워 있는 것 같았고, 또 어느 때는 여태 같은 하루가 이어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일은—그 일만은 완전히 잊고 있었다. 대신 무언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을 잊었다는 사실만은 한순간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어서, 그것을 떠올리려 애쓰며 괴로워하고 몸부림치고 신음하다가 광포해지거나 끔찍하고 견딜 수 없는 공포에 빠지곤 했다. 그럴 때면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달아나려 했지만 늘 누군가가 힘으로 그를 눌러 앉혔고, 그러면 그는 다시 무력과 혼미 속으로 떨어졌다. 마침내 그는 완전히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것은 아침 열 시의 일이었다. 맑은 날이면 이 시각의 햇빛은 언제나 긴 띠를 이루어 그의 오른쪽 벽을 지나가며 문 옆 구석을 비추었다. 침대 곁에는 나스타샤와, 또 한 사람, 그를 몹시 호기심 어린 눈으로 뜯어보고 있는 전혀 낯선 사람이 서 있었다. 카프탄을 걸치고 턱수염을 조금 기른 젊은 사내로, 보기에 아르텔시크 같았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는 주인 여자가 내다보고 있었다. 라스콜니코프는 몸을 일으켰다.

“나스타샤, 이 사람 누구야?” 그가 사내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이고, 정신이 드셨네!” 그녀가 말했다.

“정신 드셨습니다요.” 아르텔시크도 따라 말했다.

그가 정신을 차렸다는 것을 알아채자, 문간에서 엿보고 있던 주인 여자는 곧바로 문을 닫고 몸을 숨겼다. 그녀는 본래 수줍음이 많아서 남과 말을 주고받거나 무언가를 설명하는 일을 몹시 힘들어했다. 나이는 마흔쯤이고 살이 찌고 기름졌으며 눈썹도 눈도 검었고, 살집과 게으름에서 나온 사람 좋음이 있었고, 생김새도 제법 반반했다. 다만 부끄러움을 필요 이상으로 탔다.

“당신은… 누굽니까?” 그는 이번엔 아르텔시크를 향해 캐묻기를 이어 갔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문이 다시 활짝 열리더니, 키가 커서 몸을 조금 숙인 채 라주미힌이 들어섰다.

“무슨 배 안 선실도 아니고,” 그는 들어서면서 소리쳤다. “번번이 이마를 찧는군. 이런 걸 집이라고 부르다니! 어이, 이 친구, 깨어났나? 방금 파셴카한테 들었네.”

“방금 깨어나셨어요.” 나스타샤가 말했다.

“방금 깨어나셨습니다요.” 아르텔시크가 또 히죽 웃으며 맞장구쳤다.

“그러는 댁은 대체 뉘시오?” 라주미힌이 불쑥 그를 향해 물었다. “나로 말하면, 보시다시피 브라주미힌이오. 다들 라주미힌이라고 부르지만 브라주미힌이오. 대학생이고 귀족의 아들이고, 이 사람은 내 친구요. 자, 그래 댁은 누구시오?”

“저는 저희 사무소 아르텔시크입니다요. 셸로파예프 상인 밑에 있고, 볼일이 있어 왔습지요.”

“이 의자에 앉으시오.” 라주미힌 자신은 탁자 반대편의 다른 의자에 앉았다. “잘했네, 깨어난 건 잘한 일이야.” 그는 라스콜니코프를 향해 말을 이었다. “나흘째 거의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고. 정말이지 차를 숟가락으로 떠 넣어 줬으니까. 조시모프를 두 번이나 데려왔지. 조시모프 기억나나? 자넬 꼼꼼히 살펴보더니 대번에 아무것도 아니라더군—머리에 뭔가 충격이 왔다나. 신경성 헛소리에, 먹은 게 부실해서, 맥주와 고추냉이를 너무 적게 줘서 병이 났다는 거야. 하지만 별것 아니고 지나갈 거고 삭아 없어질 거라더군. 대단한 친구야, 조시모프는! 치료도 아주 훌륭하게 시작했고. 자, 그럼 댁을 붙들고 있진 않겠소.” 그는 다시 아르텔시크를 향했다. “용건을 밝혀 주시겠소? 로댜, 잘 봐 둬. 저 사무소에서 사람이 온 게 벌써 두 번째야. 다만 먼젓번엔 이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왔었고 그 사람하곤 얘기를 끝냈지. 댁보다 먼저 온 사람은 누구요?”

“아마 그게 그저께였을 겁니다요, 그렇습지요. 알렉세이 세묘노비치라고, 그분도 저희 사무소에 계십지요.”

“그 사람이 댁보다 말귀가 좀 낫겠지, 안 그렇소?”

“예에, 그분이 확실히 좀 더 묵직하시지요.”

“기특하군. 자, 계속하시오.”

“그러니까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바흐루신 씨를 통해서—여러 번 들어 보셨을 줄로 압니다만—어머님의 부탁으로 저희 사무소를 거쳐 송금이 있었습니다요.” 아르텔시크는 곧장 라스콜니코프를 향해 말하기 시작했다. “만일 이미 정신이 돌아오셨다면 삼십오 루블을 건네 드리라는 말씀입지요. 세묜 세묘니치께서 아파나시 이바노비치로부터 어머님의 부탁에 따라 전과 같은 방식으로 통지를 받으셨으니까요. 아시겠습니까요?”

“응… 기억나… 바흐루신…” 라스콜니코프가 생각에 잠긴 채 말했다.

“들었소? 바흐루신 상인을 안다잖소!” 라주미힌이 외쳤다. “어째서 정신이 안 돌아왔다는 거요? 하기야 이제 보니 댁도 말귀가 밝은 사람이군. 좋소! 똑똑한 말은 듣기에도 좋지.”

“바로 그분입지요, 바흐루신,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어머님의 부탁이고요, 어머님이 그분을 통해 같은 방식으로 이미 한 번 보내신 적이 있으니 이번에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요 며칠 사이에 계신 곳에서 세묜 세묘니치께 통지를 하셨습지요. 삼십오 루블을 전해 드리라고, 더 나은 때를 기다리며 말씀입니다요.”

“바로 그 ‘더 나은 때를 기다리며’가 제일 잘 나왔소. ‘어머님’도 나쁘지 않고. 자, 그래 댁이 보기엔 어떻소, 이 친구가 온전한 정신이오 아니오?”

“저야 상관없습니다요. 다만 수령증만 받으면 됩지요.”

“긁적여 줄 거요! 거기 뭐요, 장부요?”

“장부입지요, 여기.”

“이리 주시오. 자, 로댜, 일어나 봐. 내가 붙들어 줄 테니 라스콜니코프라고 갈겨 줘. 펜 잡아. 지금 우리한테 돈은 당밀보다 귀하거든.”

“됐어.” 라스콜니코프가 펜을 밀어내며 말했다.

“뭐가 됐다는 거야?”

“서명 안 해.”

“에잇, 젠장, 수령증 없이 어떻게 하라고?”

“됐어… 돈은…”

“돈이 됐다고! 이봐, 그건 거짓말이야, 내가 증인이오! 걱정 마시오. 잠깐 저러는 것뿐이니까… 또 여행을 떠난 거요. 하기야 저 친군 멀쩡할 때도 저러니까… 댁은 분별 있는 사람이니, 우리가 저 친굴 이끌어 주면 되오. 말하자면 손을 잡고 끌어 주면 서명이야 할 거요. 자, 좀 일어나 보게…”

“그럼 제가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요.”

“아니, 아니, 뭐 하러 번거롭게. 댁은 분별 있는 사람 아니오… 자, 로댜, 손님 붙들지 마. 봐, 기다리고 계시잖아.” 그러면서 그는 진지하게 라스콜니코프의 손을 잡아 이끌 채비를 했다.

“놔, 내가 해…” 그는 그렇게 말하고 펜을 들어 장부에 서명했다. 아르텔시크는 돈을 내놓고 물러갔다.

“브라보! 자, 이 친구야, 뭐 좀 먹을 텐가?”

“먹을래.” 라스콜니코프가 대답했다.

“수프 있소?”

“어제 거요.” 나스타샤가 대답했다. 그녀는 그동안 내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감자하고 쌀 넣은 거?”

“감자하고 쌀 넣은 거요.”

“외워 버렸군. 수프 갖다주고 차도 주시오.”

“가져올게요.”

라스콜니코프는 이 모든 것을 깊은 놀라움과, 둔하고 까닭 모를 공포를 품고 바라보았다. 그는 잠자코 기다려 보기로 마음먹었다. 다음엔 무슨 일이 벌어질까?

'헛것을 보는 건 아닌 것 같다. 아무래도 정말인 것 같다…' 그는 생각했다.

이 분 뒤에 나스타샤가 수프를 들고 돌아와 차도 곧 나온다고 알렸다. 수프와 함께 숟가락 두 개, 접시 두 개, 그리고 소금통, 후추통, 쇠고기에 곁들일 겨자 따위 온갖 식기가 갖춰져 나왔는데, 이만큼 제대로 갖춰진 상은 이미 오래전부터 없던 일이었다. 식탁보도 깨끗했다.

“나스타슈시카, 프라스코비야 파블로브나더러 맥주 두 병쯤 내보내라 해도 나쁘지 않겠는데. 우리가 마셔야지.”

“어이구, 이 날랜 양반아!” 나스타샤가 중얼거리고는 분부를 이행하러 갔다.

라스콜니코프는 사납게, 긴장한 채로 계속 주위를 살폈다. 그사이 라주미힌은 그의 곁 소파로 옮겨 앉아 곰처럼 어설프게 왼팔로 그의 머리를 감싸 안았는데—그는 혼자서도 얼마든지 몸을 일으킬 수 있었는데도 그랬다—오른손으로는 수프 숟가락을 입에 가져다주었고, 데지 않도록 미리 몇 번씩 후후 불어 주었다. 그러나 수프는 겨우 미지근할 뿐이었다. 라스콜니코프는 한 술을, 다음에 또 한 술을, 세 술째를 게걸스레 삼켰다. 그런데 몇 술 떠먹이고 나자 라주미힌은 갑자기 손을 멈추더니, 그다음 일은 조시모프와 의논해야겠다고 선언했다.

맥주 두 병을 들고 나스타샤가 들어왔다.

“차도 마실 텐가?”

“마실래.”

“나스타샤, 차도 얼른 날라 오시오. 차는 아마 의학부 없이도 되지 싶으니까. 오, 맥주가 왔군!” 그는 제 의자로 옮겨 앉아 수프와 쇠고기를 당겨 놓고는 사흘은 굶은 사람처럼 왕성하게 먹기 시작했다.

“로댜, 나 요즘 여기서 매일 이렇게 밥을 먹는다네.” 그는 쇠고기로 가득 찬 입이 허락하는 만큼만 웅얼거렸다. “다 파셴카가, 자네 집주인 아주머니가 살림을 봐 주는 거야. 진심으로 나를 대접해 주거든. 나야 물론 우기지도 않지만 마다하지도 않지. 아, 나스타샤가 차를 가져왔군. 어지간히 날래기도 하지! 나스텐카, 맥주 좀 하려오?”

“에이, 저리 가요, 장난꾸러기 같으니!”

“차는?”

“차는 뭐, 좋지요.”

“따르시오. 가만, 내가 따라 주지. 탁자에 앉으시오.”

그는 곧바로 일을 처리해 차를 따랐고, 그다음 또 한 잔을 따르고는, 제 아침을 내팽개치고 다시 소파로 옮겨 앉았다. 아까처럼 왼팔로 병자의 머리를 감싸 안아 일으키고 찻숟가락으로 차를 떠먹이기 시작했는데, 또다시 쉴 새 없이, 유난히 정성스레 숟가락을 불어 댔다. 마치 이 후후 부는 과정에 병을 낫게 하는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요체가 들어 있기라도 한 듯이. 라스콜니코프는 잠자코 있었고 거스르지도 않았다. 남의 도움 없이도 몸을 일으켜 소파에 앉아 있을 만한 힘이 충분히 있다고 느꼈으면서도, 숟가락이나 찻잔을 쥘 만큼 손을 쓸 수 있을 뿐 아니라 어쩌면 걸을 수도 있으리라고 느꼈으면서도 그랬다. 그러나 어떤 기묘한, 거의 짐승 같은 꾀에서 그는 문득 당분간 제 힘을 숨기고 죽은 듯 엎드려 있자고, 필요하다면 아직 온전히 알아듣지 못하는 척까지 하면서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듣고 캐내자고 마음먹었다. 그렇긴 해도 역겨움만은 이겨 내지 못해서, 차를 열 술쯤 훌쩍이고는 갑자기 머리를 빼내고 변덕스럽게 숟가락을 밀치고 다시 베개에 쓰러졌다. 머리 밑에는 정말로 이제 제대로 된 베개가—깃털을 넣고 깨끗한 베갯잇을 씌운 베개가—놓여 있었다. 그것도 그는 알아채고 셈에 넣었다.

“파셴카더러 오늘 안으로 산딸기 잼을 좀 내오라고 해야겠어. 이 친구 마실 것을 만들어 줘야지.” 라주미힌은 제자리에 앉아 다시 수프와 맥주에 손을 대며 말했다.

“산딸기를 어디서 구해 온대요?” 나스타샤가 다섯 손가락을 활짝 편 위에 받침 접시를 올려놓고, 설탕을 물고 차를 걸러 마시며 물었다.

“산딸기야, 이 사람아, 가게에서 사 오면 되지. 이보게 로댜, 자네 없는 동안 여기서 한바탕 사건이 있었다네. 자네가 그 사기꾼 같은 수법으로 나한테서 달아나고 집도 안 알려 줬을 때 말이야, 어찌나 화가 치밀던지 자넬 기어이 찾아내서 처형해 버리기로 했지. 그날로 착수했다네. 걷고 또 걷고, 묻고 또 묻고! 지금 이 집은 잊어버렸더군. 하기야 애초에 기억한 적도 없지, 알지를 못했으니까. 그럼 전에 살던 집은—다섯모퉁이 근처 하를라모프 집이라는 것만 기억났어. 그 하를라모프 집을 찾고 또 찾았는데, 나중에 보니 하를라모프 집이 아니라 부흐 집이지 뭔가. 소리라는 게 그렇게 헷갈릴 때가 있다니까! 그래서 성이 났지. 성이 나서 될 대로 되라 하고 이튿날 주소국에 갔더니, 글쎄 이 사람아, 이 분 만에 자넬 찾아내더군. 자네 거기 등록돼 있어.”

“등록!”

“그럼. 그런데 코벨레프 장군은 내가 있는 동안 도무지 못 찾아내더군. 뭐, 얘기하자면 길어. 어쨌든 내가 여기 들이닥치자마자 자네 사정을 죄다 알게 됐지. 죄다, 이 사람아, 죄다, 전부 알아. 여기 이 사람도 봤고. 니코딤 포미치와도 알게 됐고, 일리야 페트로비치도 소개받았고, 문지기도, 여기 사무소 서기인 알렉산드르 그리고리예비치 자메토프 씨도, 그리고 마침내 파셴카까지—이게 화룡점정이었지. 여기 이 사람도 알아…”

“구워삶았지요.” 나스타샤가 능청스레 웃으며 중얼거렸다.

“설탕을 타서 드시지 그러오, 나스타샤 니키포로브나.”

“아이고, 이 개 같은 양반아!” 나스타샤가 갑자기 외치며 푸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게다가 난 페트로브나지 니키포로브나가 아니에요.” 웃음을 그치고 나서 그녀가 문득 덧붙였다.

“그 점 명심하겠소. 자, 그래서 말이야, 군말은 빼기로 하고—처음엔 여기다 전류를 사방에 흘려서 이 일대의 편견을 한 방에 뿌리 뽑을 작정이었지. 그런데 파셴카가 이겼어. 이 사람아, 나는 그 여자가 그렇게… 아베낭트할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 응? 자넨 어떻게 생각하나?”

라스콜니코프는 잠자코 있었지만 불안한 눈길을 한순간도 그에게서 떼지 않았고, 지금도 고집스레 그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그렇지.” 라주미힌은 침묵에도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대답을 받기라도 한 듯 맞장구를 치며 말을 이었다. “아주, 모든 항목에서 흠잡을 데가 없어.”

“어이구 저 인간!” 나스타샤가 또 소리쳤다. 이 대화가 그녀에게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을 주는 모양이었다.

“나쁜 건 말이야, 자네가 처음부터 일을 제대로 잡을 줄 몰랐다는 거야. 그 여자한텐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였어. 말하자면 그건 세상에서 가장 뜻밖의 성격이라고! 뭐, 성격 얘긴 나중에 하고… 그건 그렇고 대체 어떻게 하면 그 여자가 자네한테 밥상을 안 보낼 엄두를 내게 만드나? 아니면 예를 들어 그 차용증서 말이야. 자네 미쳤나, 차용증에 서명을 하다니! 아니면 예를 들어 그 혼담—딸이, 나탈리야 예고로브나가 아직 살아 있을 때 말이야… 난 다 알아! 하기야 이건 예민한 줄을 건드리는 거고 내가 나귀라는 것도 알겠네. 용서하게. 그런데 어리석음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자넨 어떻게 생각하나, 프라스코비야 파블로브나가 첫눈에 짐작하는 것만큼 그렇게 어리석진 않아, 안 그런가?”

“그래…” 라스콜니코프가 옆을 보며 내뱉었지만, 대화를 이어 가는 편이 유리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지?” 라주미힌이, 대답을 받았다는 것이 눈에 띄게 기뻐서 외쳤다. “하지만 똑똑한 것도 아니지, 응? 완전히, 완전히 뜻밖의 성격이야! 이 사람아, 나는 얼마쯤 갈피를 못 잡겠다니까, 정말이야… 마흔은 확실히 됐어. 본인은 서른여섯이라고 하고, 그렇게 말할 완전한 권리도 있지. 하지만 맹세하건대 나는 그 여자를 주로 머리로, 순전히 형이상학으로 판단한다네. 이 사람아, 우리 사이엔 자네 대수학은 저리 가라 할 상징이 얽혀 버렸어! 하나도 모르겠다고! 뭐, 다 헛소리고—어쨌든 그 여자는 자네가 이제 대학생도 아니고 과외도 옷도 잃었고, 아가씨가 죽은 뒤로는 자넬 친척처럼 붙들어 둘 까닭이 없다는 걸 보고 갑자기 겁이 난 거야. 게다가 자네 쪽에서도 구석에 처박혀 예전 관계를 아무것도 유지하지 않았으니, 자넬 집에서 내쫓을 생각을 하게 된 거지. 그 마음은 오래전부터 품고 있었는데 차용증이 아까웠던 거야. 게다가 자네 스스로 어머니가 갚아 줄 거라고 장담했으니…”

“그건 내가 비열해서 한 말이야… 어머니는 당신이 구걸이라도 해야 할 판인데… 나는 하숙에 붙어 있으려고, 그리고… 얻어먹으려고 거짓말을 한 거야.” 라스콜니코프가 크고 또렷하게 말했다.

“그래, 그건 현명했지. 다만 문제는 바로 거기에 체바로프 씨가, 궁정고문관이자 수완가가 끼어들었다는 거야. 파셴카 혼자였으면 아무것도 꾸며 내지 못했을 거야, 워낙 부끄럼을 타니까. 그런데 수완가는 부끄럼을 안 타지. 그래서 제일 먼저 물었겠지. 이 차용증을 실현할 가망이 있소? 대답은—있다. 백스물다섯 루블 연금에서 제 입에 안 넣는 한이 있어도 로젠카를 구해 낼 어머니가 있고, 오라비를 위해 제 몸을 종처럼 팔 누이가 있으니까. 바로 거기에 근거를 둔 거지… 왜 몸을 뒤척이나? 이 사람아, 나는 이제 자네 속사정을 밑바닥까지 알아냈어. 자네가 아직 친척처럼 지낼 때 파셴카한테 속을 털어놓은 게 괜한 게 아니었지. 지금 내가 이러는 건 자네를 아껴서 하는 말이야… 바로 그런 거야. 정직하고 감정이 여린 사람은 속을 털어놓고, 수완가는 들으면서 먹어 치우고, 그러곤 결국 통째로 삼켜 버리지. 그래서 그 여자는 이 차용증을 빚 갚는 셈 치고 그 체바로프한테 넘겼고, 그자는 낯 하나 붉히지 않고 정식으로 청구를 했어. 나는 이걸 다 알고 나서 양심을 씻어 낼 겸 그자한테도 전류를 한번 흘려 볼 참이었는데, 마침 그때 파셴카와 나 사이에 화음이 이루어져서 이 일을 근원에서, 그러니까 원천에서 아예 끝내라고 명령했다네. 자네가 갚겠다고 내가 보증을 섰거든. 이 사람아, 내가 자네 보증을 섰다고, 듣고 있나? 체바로프를 불러 십 첼콥스키를 입에 물려 주고 증서를 도로 받았지. 그래서 이렇게 삼가 자네에게 바치는 바일세. 이젠 자네 말만으로 믿어 준다네. 자, 받게. 내 손으로 제대로 찢어 놨어.”

라주미힌은 차용증서를 탁자에 내놓았다. 라스콜니코프는 그것을 한 번 보고는 한마디도 없이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라주미힌조차 움찔했다.

“이 사람아, 알겠네.” 잠시 뒤 그가 말했다. “내가 또 바보짓을 했군. 자넬 좀 풀어 주고 수다로 즐겁게 해 주려 했는데, 아무래도 쓸개만 돋운 것 같아.”

“내가 헛소리할 때 못 알아본 게 자네였나?” 라스콜니코프도 잠시 잠자코 있다가, 고개는 돌리지 않은 채 물었다.

“나였지. 그 일로 발작까지 일으켰다네. 특히 내가 자메토프를 한 번 데려왔을 때.”

“자메토프?… 서기?… 왜?” 라스콜니코프가 홱 돌아누우며 라주미힌에게 눈을 박았다.

“아니 뭘 그렇게… 왜 놀라나? 자네와 알고 지내고 싶어 했어. 제가 먼저 원했다고. 우리가 자네 얘길 많이 했으니까… 안 그러면 내가 자네에 대해 그만큼을 누구한테서 알아냈겠나? 훌륭한 친구야, 이 사람아, 아주 굉장한… 물론 제 나름으로 말이지. 이제 친구 사이야. 거의 날마다 만난다네. 나 이 구역으로 이사했거든. 아직 모르지? 방금 이사했어. 그 친구랑 라비자한테 두 번 다녀왔지. 라비자 기억나나, 라비자 이바노브나?”

“내가 무슨 헛소리를 했나?”

“말해 뭐 하나! 제정신이 아니셨지요.”

“무슨 헛소리를 했어?”

“원 참! 무슨 헛소리냐고? 헛소리야 뻔하지… 자, 이 사람아, 이제 시간 낭비 말고 일을 하세.”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모자를 집어 들었다.

“무슨 헛소리를 했어?”

“어지간히도 되풀이하는군! 무슨 비밀이라도 겁나나? 걱정 말게. 백작 부인 얘긴 한마디도 안 나왔으니까. 그 대신 웬 불도그 얘기, 귀고리 얘기, 무슨 목걸이 얘기, 크레스톱스키 섬 얘기, 웬 문지기 얘기, 니코딤 포미치 얘기, 부감독관 일리야 페트로비치 얘기는 아주 많이 나왔지. 게다가 자네 본인의 양말에도 대단히 관심을 보이시던데, 아주 대단히! 내놓으라고, 내놓기만 하라고 하소연을 하시더군. 자메토프가 직접 구석구석 자네 양말을 찾아내서는, 향수로 씻은 반지 낀 제 손으로 그 걸레짝을 바쳤다네. 그제야 진정하시더니 꼬박 하루를 손에 쥐고 계셨지. 빼앗을 수가 없었어. 지금도 이불 밑 어딘가에 있을걸. 그리고 또 바지에 달 술을 달라고, 그것도 어찌나 눈물겹게 조르던지! 우리가 캐물었지, 무슨 술 말이냐고? 그런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자, 그럼 일을 하러! 여기 삼십오 루블 있네. 그중 십 루블은 내가 가져가고, 두어 시간 뒤에 그 셈을 보고하지. 그동안 조시모프한테도 알리겠네. 하기야 그런 말 없이도 진작 여기 와 있어야 했지, 벌써 열두 시니까. 그리고 나스텐카, 내가 없는 동안 자주 들여다봐 주시오. 마실 것이든 뭐든 원하시는 게 있는지… 파셴카한테는 내가 지금 직접 할 말을 하겠소. 그럼 또 봄세!”

“파셴카라고 부르네! 아이고 이 능청맞은 낯짝!” 나스타샤가 그의 등 뒤에 대고 말했다. 그러고는 문을 열고 엿듣다가 참지 못하고 제가 직접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그가 거기서 주인 여자와 무슨 말을 하는지 너무나 궁금했던 것이다. 게다가 전체적으로 그녀가 라주미힌에게 완전히 홀려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녀 뒤로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병자는 이불을 걷어차고 미친 사람처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타는 듯한, 경련에 가까운 초조함으로 저들이 어서 나가 주기만을 기다려 왔던 것이다. 저들 없이 곧바로 일에 착수하려고. 그런데 무엇에, 무슨 일에? 하필 지금, 일부러 그러기라도 하듯 그는 그것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하느님. 이것 하나만 말해 주십시오. 저들이 다 알고 있습니까, 아직 모르고 있습니까? 이미 알면서 그저 시치미를 떼고, 내가 누워 있는 동안 약을 올리다가, 어느 순간 들어와서 벌써 오래전에 다 밝혀졌고 저들은 그저 그랬을 뿐이라고 말한다면? 이제 어떻게 하지? 이렇게 잊어버렸다,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갑자기 잊어버렸다, 방금까지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는 방 한가운데 서서 괴로운 당혹 속에 사방을 둘러보았다. 문으로 다가가 열고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그는 벽지에 구멍이 난 구석으로 달려가 이곳저곳을 살피기 시작했고, 구멍에 손을 넣어 더듬어 보았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그는 페치카로 다가가 문을 열고 재를 헤집기 시작했다. 바지에서 떼어 낸 술 조각들과 찢어 낸 주머니의 천 조각들이 그때 던져 넣은 그대로 뒹굴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은 것이다! 그때 그는 방금 라주미힌이 말한 양말이 떠올랐다. 과연 소파 위 이불 밑에 있기는 했지만, 그 뒤로 어찌나 닳고 더러워졌는지 자메토프가 무엇 하나 알아볼 수 있었을 리 없었다.

'아, 자메토프!… 사무소!… 그런데 왜 나를 사무소로 부르지? 소환장은 어디 있지? 아!… 내가 헷갈렸다. 그건 그때 부른 거다! 그때도 나는 양말을 살폈다. 그런데 지금은… 지금은 앓았지. 그런데 자메토프는 왜 들렀나? 라주미힌은 왜 그를 데려왔나?…' 그는 힘없이 중얼거리며 다시 소파에 앉았다. '이게 뭐지? 아직도 헛것이 이어지는 건가, 아니면 정말인가? 정말인 것 같은데… 아, 생각났다. 달아나는 것! 어서 달아나야 한다, 반드시, 반드시 달아나야 한다! 그래… 그런데 어디로? 내 옷은 어디 있지? 장화가 없다! 치워 버렸다! 숨겨 놓았다! 알겠다! 아, 외투는 있구나—빠뜨렸구나! 돈도 탁자에 있다, 다행이다! 차용증도 있고… 돈을 챙겨서 나가자. 다른 집을 얻으면 저들은 못 찾는다!… 그래, 그런데 주소국은? 찾아낸다! 라주미힌이 찾아낸다. 차라리 아주 달아나는 게 낫다… 멀리… 아메리카로. 그리고 저들에게 침이나 뱉어 주자! 차용증도 챙기고… 거기서 쓸모가 있겠지. 또 뭘 챙기지? 저들은 내가 병들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걸을 수 있다는 걸 모른다, 헤헤헤!… 눈을 보고 알았다, 저들은 다 알고 있다! 계단만 내려가면 되는데! 그런데 거기 파수꾼이, 경찰이 서 있으면? 이게 뭐지, 차인가? 아, 맥주가 남았구나, 반 병, 차갑다!'

그는 아직 한 잔은 될 만큼 맥주가 남은 병을 움켜쥐고, 가슴속의 불을 끄기라도 하듯 황홀하게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나 일 분도 지나기 전에 맥주가 머리를 쳤고, 등줄기로는 가볍고 오히려 기분 좋기까지 한 오한이 흘렀다. 그는 누워서 이불을 끌어 덮었다. 그러잖아도 병들고 두서없던 생각들이 점점 더 뒤엉키기 시작했고, 이내 가볍고 편안한 잠이 그를 감쌌다. 그는 황홀하게 베개에서 머리 둘 자리를 찾아내어, 찢어진 예전 외투 대신 지금 덮고 있는 부드러운 솜이불을 더 단단히 여미고, 조용히 한숨을 쉬고는 깊고 단단하고 병을 낫게 하는 잠에 빠져들었다.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에 그는 잠에서 깼다. 눈을 뜨니 라주미힌이 문을 활짝 열어젖힌 채 문지방에 서서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다. 라스콜니코프는 얼른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무언가 떠올리려 애쓰는 사람처럼 그를 바라보았다.

“아, 안 자는군. 자, 나 왔네! 나스타샤, 그 보따리 이리 올려 보내시오!” 라주미힌이 아래로 소리쳤다. “지금 곧 셈을 보고하겠네…”

“몇 시야?” 라스콜니코프가 불안하게 둘러보며 물었다.

“어지간히도 잤어, 이 사람아. 밖은 저녁이야. 여섯 시쯤 됐을걸. 여섯 시 넘게 잤네…”

“맙소사! 내가 대체!…”

“그게 뭐 어때서? 건강에 좋지! 어딜 그리 서두르나? 밀회라도 있나? 이제 시간은 다 우리 거야. 나는 벌써 세 시간이나 자넬 기다렸다네. 두 번이나 들렀는데 자고 있더군. 조시모프한테도 두 번 들렀는데 집에 없어, 없기만 해! 그래도 괜찮아, 올 거야!… 내 볼일로도 좀 나다녔고. 나 오늘 이사했거든, 아주 이사했어, 삼촌하고. 나한테 지금 삼촌이 있거든… 아, 됐고, 일을 하세!… 나스텐카, 보따리 이리 주시오. 자, 우리가 지금… 그래 이 사람아, 몸은 좀 어떤가?”

“괜찮아. 안 아파… 라주미힌, 자네 여기 온 지 오래됐나?”

“말했잖나, 세 시간 기다렸다고.”

“아니, 그 전에는?”

“그 전이라니?”

“언제부터 여기 드나들었느냐고.”

“아니 아까 다 얘기해 주지 않았나. 기억이 안 나나?”

라스콜니코프는 생각에 잠겼다. 아까의 일이 꿈속처럼 어른거렸다. 혼자서는 도무지 떠올릴 수가 없어 그는 묻는 눈으로 라주미힌을 바라보았다.

“흠!” 그가 말했다. “잊어버렸군! 아까도 자네가 아직 제정신이 아닌 것 같더라니… 이제 한숨 자고 나니 나아졌군… 정말 훨씬 나아 보여. 장하네! 자, 그럼 일을 하세! 곧 기억날 거야. 이걸 좀 보게, 이 사람아.”

그는 아까부터 대단한 관심을 쏟던 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이건 말이야, 믿거나 말거나 내 마음에 특별히 얹혀 있던 일이라네. 자넬 사람으로 만들어 놔야 하니까. 착수하세. 위에서부터 시작하지. 이 모자 보이나?” 그는 보따리에서 제법 예쁘장하되 아주 흔하고 값싼 챙모자를 꺼내며 말을 꺼냈다. “한번 써 보게 해 주게.”

“나중에, 이따가.” 라스콜니코프가 짜증스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안 되네, 로댜, 버티지 말게. 나중엔 늦어. 게다가 나는 밤새 잠도 못 잘 거야. 치수도 없이 짐작으로 샀거든. 딱 맞는군!” 그는 씌워 보고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치수가 딱 맞아! 머리에 쓰는 것, 이건 말이야, 옷차림에서 가장 첫째가는 물건이고 일종의 추천장이야. 내 친구 톨스타코프는 남들이 다 모자를 쓰고 서 있는 자리에 들어갈 때마다 제 덮개를 벗어야 한다네. 다들 그가 노예근성에서 그러는 줄 알지만, 사실은 제 새 둥지가 부끄러워서 그러는 거야. 어찌나 수줍은 사람인지! 자, 나스텐카, 여기 머리에 쓰는 물건이 둘 있소. 이 팔머스턴이오,”—그는 구석에서 라스콜니코프의 찌그러진 둥근 모자를 꺼내 들었는데, 어째서인지 그것을 팔머스턴이라고 불렀다—“아니면 이 보석 세공품이오? 값을 매겨 보게, 로댜. 내가 얼마를 냈을 것 같나? 나스타슈시카?” 그는 상대가 잠자코 있는 것을 보고 그녀를 향해 물었다.

“이십 코페이카쯤 주셨겠지요.” 나스타샤가 대답했다.

“이십 코페이카라니, 바보 같으니!” 그가 모욕을 당한 듯 외쳤다. “요즘엔 이십 코페이카로는 당신도 못 사요. 팔십 코페이카요! 그것도 헌것이니까 그 값이지. 하기야 조건이 붙긴 했소. 이걸 다 해지면 내년에 하나 더 공짜로 준다는 거요, 정말이오! 자, 이제 우리 김나지야에서 부르던 대로 아메리카 합중국으로 넘어가세. 미리 말해 두는데—바지는 내 자랑거리일세!” 그는 여름용 얇은 모직 회색 바지를 라스콜니코프 앞에 펼쳐 보였다. “구멍 하나 얼룩 하나 없고, 헌것이긴 해도 아주 쓸 만해. 조끼도 같은 것으로, 유행대로 단색이야. 헌것인 게 사실은 더 낫다네. 더 부드럽고 더 순하거든… 보게 로댜, 세상에서 출세를 하려면 내 생각엔 늘 철만 살피면 충분해. 일월에 아스파라거스를 찾지 않으면 지갑에 몇 첼콥스키는 남게 되지. 이 물건도 마찬가지야. 지금은 여름철이라 여름 물건을 산 거야. 가을이 오면 철이 알아서 더 따뜻한 감을 요구할 테니 어차피 버려야 할 거고… 게다가 그때쯤엔 이것들도 저절로 무너질 시간이 충분하지. 사치가 늘어서가 아니면 내부의 무질서 때문에라도. 자, 값을 매겨 보게! 얼마 같은가? 이 루블 이십오 코페이카! 그리고 기억하게, 또 아까와 같은 조건이야. 이걸 해지면 내년에 다른 걸 공짜로 가져가는 거지! 페댜예프 가게에선 달리 장사를 안 해. 한 번 값을 치르면 평생 그만이지, 두 번째는 제 발로 안 가게 되니까. 자, 이제 장화로 넘어가세—어떤가? 헌것인 건 보면 알지. 하지만 두 달은 만족시켜 줄 걸세. 외국 물건에 외국 솜씨거든. 영국 대사관 서기가 지난주에 톨쿠치에 내놓은 거야. 엿새밖에 안 신었는데 돈이 몹시 급했다는군. 값은 일 루블 오십 코페이카. 잘 샀지?”

“하지만 안 맞을지도 모르잖아요!” 나스타샤가 한마디 했다.

“안 맞는다고! 이건 뭐요?” 그러면서 그는 주머니에서 낡고 딱딱하게 굳어 마른 진흙이 잔뜩 엉겨 붙은, 구멍 난 라스콜니코프의 장화를 끄집어냈다. “나는 견본을 들고 다녔소. 이 괴물을 보고 진짜 치수를 복원해 준 거요. 이 모든 일을 정성껏 진행했다네. 속옷은 주인 여자와 얘기가 됐고. 자, 우선 삼베 셔츠 세 벌, 위쪽은 유행하는 모양이야… 자, 그러니까 팔십 코페이카 모자, 이 루블 이십오 나머지 옷가지, 합쳐서 삼 루블 오 코페이카. 일 루블 오십 장화—아주 좋은 물건이니까—합쳐서 사 루블 오십오 코페이카. 그리고 속옷 일체 오 루블—한꺼번에 값을 깎았지—합쳐서 딱 구 루블 오십오 코페이카. 사십오 코페이카 거스름돈은 구리 오 코페이카짜리로, 여기 있네, 받게. 이렇게 해서 로댜, 자네는 이제 옷차림이 온전히 복원됐어. 내 의견으로는 자네 외투는 아직 쓸 만할 뿐 아니라 어딘가 각별히 고귀한 데가 있기까지 하니까 말이야. 샤르메르에 맞춘다는 게 그런 거지! 양말이니 나머지 것들은 자네한테 맡기겠네. 우리한테 남은 돈은 이십오 루블이야. 파셴카와 집세는 걱정 말게. 말했잖나, 무한한 신용이라고. 자, 이제 이 사람아, 속옷을 갈아입혀 주게 해 주게. 어쩌면 병이 셔츠 속에만 남아 있을지도 모르니…”

“놔! 싫어!” 라스콜니코프가 손을 내저었다. 그는 옷을 사 온 이야기를 긴장된 익살로 늘어놓는 라주미힌의 보고를 혐오감 속에 듣고 있었다.

“이 사람아, 그건 안 되지. 그럼 내가 장화는 뭐 하러 닳도록 걸어 다녔나!” 라주미힌이 우겼다. “나스타슈시카, 부끄러워 말고 도와주시오, 이렇게!” 그러고는 라스콜니코프의 저항에도 아랑곳없이 기어이 속옷을 갈아입혔다. 라스콜니코프는 베개에 쓰러져 두어 분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오래도록 떨어지지 않겠구나!' 그는 생각했다. “이 돈은 다 어디서 난 거야?” 그가 마침내 벽을 바라보며 물었다.

“돈? 이런! 자네 돈이지. 아까 아르텔시크가 왔었잖나, 바흐루신한테서. 어머님이 보내셨어. 그것도 잊었나?”

“이제 기억나…” 라스콜니코프가 길고 음울한 생각 끝에 말했다. 라주미힌은 미간을 찌푸리고 불안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문이 열리고 키가 크고 몸집이 다부진 사람이 들어왔다. 라스콜니코프에게는 이 사람도 어쩐지 이미 낯이 익은 듯했다.

“조시모프! 드디어 왔군!” 라주미힌이 반가워서 소리쳤다.

작품 해설과 번역 노트

윤문 노트

1. 아르텔시크의 말투가 이 장의 첫 번째 층위다. 원문에서 이 사내는 거의 모든 문장 끝에 경어 소사 를 붙인다(тридцать пять рублев вам вручить-с). 이것은 존대가 아니라 신분 표시이며, 겁먹은 사무원의 자동 반사에 가깝다. 라주미힌이 "댁보다 먼저 온 사람이 더 말귀가 낫겠지"라고 대놓고 모욕해도 "예에, 그분이 확실히 좀 더 묵직하시지요"라고 맞장구치는 인물이다. 우리말에서는 -습지요 / -입지요 / -합니다요의 과잉 겸양 어미로 옮겼다. 표준 경어(-습니다)로 평탄화하면 라주미힌이 이 사내를 가지고 노는 희극이 통째로 사라진다.

2. 라주미힌의 수다는 정보 전달이 아니라 방어막이다. 이 장에서 그는 나흘간의 일을 라스콜니코프에게 "보고"하지만, 그 보고의 실제 기능은 병자의 신경을 딴 데로 돌리는 것이다. 그래서 문장이 끝없이 이어지고 화제가 제멋대로 튄다—주소국, 코벨레프 장군, 파셴카의 나이, 대수학, 형이상학, 체바로프. 담화체의 원칙대로 이 이탈을 정리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그가 차용증서를 내놓는 순간 수다가 뚝 끊기고 "내가 또 바보짓을 했군"으로 떨어지는 낙차가 이 장의 감정적 중심이다.

3. 「전류를 흘린다」(электрическую струю пустить)를 직역으로 살렸다. 라주미힌이 두 번 쓰는 이 표현은 1860년대 러시아 청년 문화에서 유행하던 과학 비유를 우스꽝스럽게 전용한 것으로, "한바탕 뒤집어엎겠다"는 뜻이다. 뜻으로 풀면 이 인물의 시대성이 사라진다. 대신 주에 설명을 달았다.

4. 「아베낭트」(авенантненькая)는 음차했다. 프랑스어 avenant(호감 가는)에 러시아어 애칭 어미를 겹쳐 만든 라주미힌의 즉석 조어다. 이런 반쯤 프랑스어인 말장난은 당시 교양 청년의 언어 습관이고, 우리말 형용사로 옮기면 조어라는 사실 자체가 없어진다.

5. 이 장에서 처음으로 「낀」 대화가 나온다. 라주미힌이 설탕 이야기를 할 때 그는 나스타샤에게 말하는 척하면서 실은 라스콜니코프를 향해 말하고 있고, 나스타샤의 침묵을 "대답"으로 받아 혼자 문답을 이어 간다(“그것도 아주 그렇지”). 이 구조는 뒤에서 라스콜니코프가 "대화를 이어 가는 편이 유리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며 마지못해 그래…를 내뱉을 때 뒤집힌다. 병자가 처음으로 연기를 시작하는 지점이다.

6. 「짐승 같은 꾀」(звериная хитрость)를 그대로 두었다. 차를 먹여 줄 때 그가 제 힘을 숨기기로 마음먹는 대목이다. 원문의 чуть не звериной(거의 짐승 같은)를 완화하면, 이후 3~4부에서 라스콜니코프가 포르피리 앞에서 벌이는 모든 연기의 출발점이 사라진다. 이 문장은 인물의 전환점이므로 불변역으로 취급했다.

7. 재를 헤집는 장면은 문체를 일부러 낮췄다. 앞뒤가 모두 만연체인 가운데 이 단락만 짧은 절이 이어진다(문으로 다가가 열고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 구멍에 손을 넣어 더듬어 보았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원문이 но это было не тоно и это не то로 같은 구문을 되풀이하기 때문이다. 이 반복은 그가 무엇을 찾는지 자기도 모른다는 사실의 문체적 표현이므로, 표현을 바꿔 다양하게 만들지 않았다.

8. 「아메리카로」가 여기서 처음 나온다. 단상체 독백 안에서 도주지로 튀어나오는 이 단어는 소설 끝에서 스비드리가일로프가 전혀 다른 뜻으로 쓰게 된다. 두 자리를 같은 말로 묶어 두기 위해 아메리카로 고정했다(합중국·미국 등으로 변주하지 않는다).

9. 라주미힌의 옷값 계산은 숫자를 하나도 손대지 않았다. 팔십 코페이카 + 이 루블 이십오 = 삼 루블 오 코페이카, 거기에 일 루블 오십 = 사 루블 오십오, 거기에 오 루블 = 구 루블 오십오. 십 루블에서 사십오 코페이카가 남는다. 원문의 셈은 정확히 맞아떨어지며, 이 정확성 자체가 인물 묘사다—허풍쟁이처럼 보이는 사내가 남의 돈은 한 푼 단위까지 맞춰 온다.

10. 문체 지표. 서술부 그/그녀 밀도 1만자당 116회(기준 130 이하, 재검선 150). 대화 층위 문장 평균 20.4자, 서술 층위 평균 38.4자, 단상체 층위 평균 14.2자. 원문 27,128자 → 본문 15,578자, 비율 0.574.

  1. 아르텔시크(артельщик) — 상인 조합이나 상사에 소속되어 송금·배달·수금 등 현금 관련 심부름을 맡던 고용인. 신용이 생명인 자리여서 조합이 신원을 보증했다. 우편 송금 제도가 정비되기 전 러시아에서 원격 송금은 이런 사람의 손을 거쳤다.
  2. 카프탄(кафтан) — 무릎까지 오는 러시아 전통 겉옷. 19세기 중반에는 상인·장인 계층의 표지였다.
  3. 다섯모퉁이(Пять Углов) — 페테르부르크 자고로드니 대로 부근, 다섯 갈래 길이 만나는 교차점. 지금도 같은 이름으로 불린다.
  4. 주소국(адресный стол) — 시내 거주자의 주소를 등록·조회해 주던 경찰 부속 기관. 소정의 수수료를 내면 누구든 타인의 주소를 조회할 수 있었다. 라스콜니코프가 뒤에 "그래, 그런데 주소국은?"이라며 도주를 단념하는 대목의 전제다.
  5. 전류를 흘린다 — 라주미힌의 조어. 1860년대에 전기 현상이 대중 과학의 유행 소재였던 것을 빌려, "충격을 가해 한꺼번에 갈아엎는다"는 뜻으로 쓴다.
  6. 아베낭트(авенантненькая) — 프랑스어 avenant(호감 가는, 붙임성 있는)에 러시아어 지소 어미를 붙인 말. 라주미힌이 즉석에서 지어낸 어감이다.
  7. 설탕을 물고 차를 마신다(пить чай «через сахар») — 각설탕을 입에 물고 그 사이로 차를 흘려 넣어 마시는 방식. 설탕을 아끼는 서민의 습관이었다. 라주미힌이 "설탕을 타서 드시지 그러오"라고 놀리는 것은 이 절약 습관을 두고 하는 말이다.
  8. 니코딤 포미치 / 일리야 페트로비치 — 제1부 제7장 뒤 라스콜니코프가 소환되었던 구(區) 경찰 사무소의 서장과 부감독관. 라주미힌은 사건의 중심에 있는 두 사람과 아무것도 모른 채 친분을 텄다.
  9. 자메토프(알렉산드르 그리고리예비치) — 같은 사무소의 서기. 이 장에서는 이름만 나오지만, 제2부 제6장 「수정궁」 장면에서 라스콜니코프와 정면으로 맞붙는다.
  10. 백작 부인 — 라주미힌의 농담. 헛소리 중에 연애 상대 이름이라도 튀어나왔을까 걱정하느냐는 뜻이다.
  11. 궁정고문관(надворный советник) — 러시아 관등표 제7등 문관. 중급 관리에 해당한다. 체바로프는 현직이라기보다 이 직함을 가진 채 채권 추심 같은 사설 업무를 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12. 첼콥스키(целковый) — 은화 1루블의 구어 표현.
  13. 드부그리벤니(двугривенный) — 20코페이카 은화. 본문에서는 "이십 코페이카"로 옮겼다. 그리브나(гривна)는 10코페이카이므로 "팔십 코페이카"의 원문은 "여덟 그리브나"다.
  14. 팔머스턴(пальмерстон) — 영국 총리 파머스턴(Henry John Temple, 3rd Viscount Palmerston, 1784~1865)의 이름. 당시 러시아에서 특정 형태의 남성용 외투나 모자를 이렇게 불렀다는 기록이 있으나 용법이 일정하지 않다. 서술자 자신이 "어째서인지"라고 덧붙이는 것으로 보아, 라주미힌이 낡은 모자를 놀리려고 아무렇게나 갖다 붙인 이름으로 읽는 편이 자연스럽다.
  15. 아메리카 합중국 — 바지를 가리키는 김나지야 은어. 바지가 두 갈래로 "합쳐진" 모양을 두고 하는 학생들의 농담이다.
  16. 톨쿠치(Толкучий рынок) — 페테르부르크의 중고 물품 시장. 이름 자체가 "북적이는 시장"이라는 뜻이다.
  17. 샤르메르(Шармер) — 페테르부르크의 유명한 양복점. 도스토예프스키 자신도 이 집에 옷을 맞췄다.
  18. 라비자 이바노브나 — 제1부 제7장 경찰 사무소에서 소동을 벌이던 독일계 유흥업소 주인. 원문에서 라주미힌은 이름을 Лавиза로 부르는데, 이는 그녀 자신이 쓰던 Луиза의 구어 변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