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만일 이미 수색을 했다면? 만일 그들과 내 방에서 딱 마주친다면?'
그러나 여기가 그의 방이다. 아무것도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나스타시야조차 손대지 않았다. 그러나 맙소사! 아까 어떻게 이 물건들을 죄다 이 구멍에 두고 나갈 수 있었단 말인가?
그는 구석으로 달려들어 벽지 아래로 손을 밀어 넣고 물건들을 끌어내 주머니에 채우기 시작했다. 모두 여덟 점이었다. 귀고리인지 무엇인지가 든 작은 갑 둘 — 제대로 보지도 않았다 — 그리고 자그마한 모로코가죽 갑 넷. 목걸이 하나는 그냥 신문지에 싸여 있었다. 신문지에 싼 것이 또 하나 있었는데 훈장인 듯했다……
그는 모두 여기저기 주머니에, 외투와 아직 남아 있는 바지 오른쪽 주머니에 나누어 넣었다. 되도록 눈에 띄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지갑도 물건들과 함께 챙겼다. 그런 다음 방을 나섰는데, 이번에는 문을 아주 활짝 열어 둔 채였다.
그는 빠르고 단단하게 걸었다. 온몸이 부서진 것 같았으나 의식은 제게 있었다. 뒤쫓아 올까 두려웠고, 삼십 분 뒤에, 십오 분 뒤에는 제 뒤를 밟으라는 지시가 내릴지도 모른다는 것이 두려웠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때가 되기 전에 뒤끝을 감추어야 했다. 아직 조금이라도 힘이 남아 있고 조금이라도 헤아릴 수 있는 동안에 해치워야 했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하나?
그것은 이미 오래전에 정해 두었다. '죄다 운하에 던지면 물속으로 사라지고 일은 끝난다.' 그렇게 그는 어젯밤 헛것에 홀려 있을 때, 몇 번이나 일어나 나가려 했던 그 순간들에 — 그는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 이미 정해 두었다. '어서, 어서 죄다 버려야 한다.' 그러나 버리기가 몹시 어려운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예카테리나 운하 강둑을 벌써 삼십 분쯤, 어쩌면 더 오래 서성이며 물가로 내려가는 층계들을 몇 번이나 눈여겨보았다. 그러나 뜻한 바를 해낼 생각은 할 수도 없었다. 층계 바로 앞에 뗏목이 서 있고 그 위에서 빨래하는 여자들이 있거나, 배가 매여 있거나 했다. 게다가 어디나 사람이 우글거렸고, 강둑 어디에서든 사방에서 볼 수 있고 알아챌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이 일부러 내려가 멈추어 서서 무언가를 물에 던진다는 것은 의심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갑들이 가라앉지 않고 떠오르면 어쩐단 말인가? 물론 그럴 것이었다. 누구나 볼 것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마주치는 사람마다 저를 쳐다보고 훑어보는 것 같았다, 마치 저들에게는 오직 그만이 볼일이라는 듯이.
'어째서 그럴까, 아니면 내 착각일까?'
그는 생각했다.
마침내 그의 머리에 떠올랐다. 차라리 네바 강 어디로 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 거기는 사람도 적고 눈에도 덜 띄고 어쨌든 더 마땅하며, 무엇보다 이 근처에서 더 멀다. 그러다 문득 놀랐다. 어떻게 삼십 분이나 우수와 불안 속에, 그것도 위험한 자리에서 서성이면서 이것을 더 일찍 생각해 내지 못했단 말인가! 그리고 그 삼십 분을 통째로 헛된 일에 버린 것은 오로지 꿈속에서, 헛것에 홀려 한번 그렇게 정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몹시 흐트러지고 잘 잊게 되었고 스스로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서둘러야 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V 대로를 따라 네바 강으로 향했다. 그러나 길에서 문득 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왜 네바로? 왜 물속으로? 아주 멀리, 이를테면 다시 섬들로 가서 거기 어딘가 외진 곳, 숲속 덤불 아래 죄다 묻고 나무에 표를 해 두는 편이 낫지 않을까?'
이 순간 모든 것을 또렷하고 온전하게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이 생각만은 틀림없어 보였다.
그러나 섬들에 이르는 것도 그의 몫이 아니었고 다른 일이 일어났다. V 대로에서 광장으로 나서다가 그는 문득 왼쪽에 온통 막힌 벽으로 둘러싸인 안뜰 입구를 보았다. 대문으로 들어서면 곧바로 오른쪽으로, 이웃한 사 층 집의 희게 칠하지 않은 막힌 벽이 안뜰 깊숙이 뻗어 있었다. 왼쪽으로는 그 막힌 벽과 나란히, 역시 대문에서 바로, 나무 울타리가 안뜰 안쪽으로 스무 걸음쯤 이어지다가 왼쪽으로 꺾였다. 무슨 자재를 쌓아 둔, 막히고 가려진 자리였다. 더 안쪽 뜰 깊은 곳에는 울타리 너머로 낮고 그을린 돌 헛간의 모서리가 내다보였는데 어느 공방의 일부인 것이 분명했다. 여기는 아마 마차 만드는 곳이거나 자물쇠 만드는 곳이거나 그 비슷한 무엇이 있었을 것이다. 대문께부터 어디나 석탄 먼지가 시커멓게 깔려 있었다.
'여기다 던져 놓고 가면 되겠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안뜰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그는 대문 안으로 들어섰고, 바로 대문 가까이 울타리에 붙여 놓은 홈통을 곧바로 보았다(공장 일꾼과 품팔이와 마부가 많은 이런 집에는 흔히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홈통 위 울타리에는 이런 자리에 으레 있는 우스갯소리가 분필로 적혀 있었다. '여기 마차 세우는거 금함.' 그러니 그가 들어와 멈추어 섰다는 것만으로는 아무 의심도 사지 않을 터라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여기다 죄다 한꺼번에 어디 한구석에 던져 놓고 가자!'
한 번 더 둘러보고 그는 이미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문득 바로 바깥벽께, 대문과 홈통 사이 한 아르신 남짓한 그 틈에서 다듬지 않은 큰 돌 하나를 알아보았다. 아마 한 푸드 반쯤 되었을 것이고 거리로 난 돌담에 바로 붙어 있었다. 그 담 너머는 거리였고 인도였으며, 언제나 적지 않은 행인들이 지나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대문 안쪽의 그는 아무도 볼 수 없었다. 누가 거리에서 들어오지만 않는다면. 하기야 그런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으므로 서둘러야 했다.
그는 돌 쪽으로 몸을 굽혀 그 윗부분을 두 손으로 단단히 붙들고 온 힘을 모아 돌을 뒤집었다. 돌 아래에 자그마한 우묵한 곳이 생겼다. 곧바로 그는 주머니에 든 것을 죄다 거기 던져 넣기 시작했다. 지갑이 맨 위에 놓였는데도 우묵한 곳에는 아직 자리가 남았다. 그런 다음 다시 돌을 붙들어 한 번에 본래 쪽으로 뒤집었고, 돌은 꼭 제자리에 들어맞았다, 다만 아주 조금, 눈곱만큼 높아 보였을 뿐이다. 그러나 그는 흙을 긁어모으고 가장자리를 발로 눌렀다.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그는 나와 광장으로 향했다. 다시 아까 사무소에서처럼 세차고 견디기 어려운 기쁨이 한순간 그를 사로잡았다.
'뒤끝을 감췄다! 그런데 누가, 누가 이 돌 밑을 찾아볼 생각을 하겠는가? 이 돌은 어쩌면 이 집이 서던 때부터 여기 있었고 앞으로도 그만큼 더 있을 것이다. 설령 찾아낸다 한들 누가 나를 떠올리겠는가? 모든 것이 끝났다! 증거가 없다!'
그러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다, 그는 나중에 기억했다. 제가 신경질적이고 잘고 소리 없고 긴 웃음을 터뜨렸다는 것을, 그리고 광장을 가로지르는 내내 계속 웃었다는 것을. 그러나 그저께 그 소녀와 마주쳤던 K 가로수길에 발을 들이자 그의 웃음이 문득 그쳤다. 다른 생각들이 그의 머리로 기어들었다. 그때 소녀가 가 버린 뒤 앉아 골똘히 생각하던 그 긴 의자 앞을 지나는 것이 지금 무섭게 역겹다는 느낌도 문득 들었고, 그때 이십 코페이카를 주었던 그 콧수염과 다시 마주치는 것도 무섭게 힘겨우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빌어먹을!'
그는 흐트러지고 사나운 눈으로 둘레를 보며 걸었다. 그의 온갖 생각이 이제 어떤 하나의 중심점 둘레를 돌고 있었다 — 그리고 그 자신도 느꼈다, 그것이 정말로 그런 중심점이며, 지금, 바로 지금 제가 그 중심점과 단둘이 남았다는 것을, 그리고 이 두 달 만에 처음이라는 것을.
'에이 죄다 빌어먹어라!'
그는 끝없는 노여움의 발작 속에 문득 생각했다.
'시작됐으면 시작된 거다, 새 삶이고 뭐고 악마에게나 가라! 주여, 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리고 오늘 내가 얼마나 거짓말을 하고 얼마나 비굴하게 굴었는가! 아까 그 고약하기 짝이 없는 일리야 페트로비치에게 어찌나 추하게 알랑거리고 비위를 맞추었는가! 하기야 이것도 헛소리다! 저들 모두에게도, 내가 알랑거리고 비위 맞춘 것에도 침이나 뱉자! 전혀 그게 아니다! 전혀 그게 아니야!……'
문득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새롭고 아주 뜻밖이며 더없이 단순한 물음 하나가 단번에 그를 어리둥절하게 하고 쓰디쓰게 놀라게 했다.
'만일 이 일이 정말로 또렷한 정신으로, 바보처럼이 아니라 이루어진 것이라면, 만일 너에게 정말로 분명하고 단단한 목적이 있었다면, 어째서 너는 여태 지갑을 들여다보지도 않았고 네가 무엇을 얻었는지도 모르는가? 그 온갖 괴로움을 다 겪고, 그토록 비열하고 추하고 천한 일에 또렷한 정신으로 나선 것이 무엇을 위해서였는데? 게다가 너는 방금 그것을 물에 던지려 하지 않았나, 그 지갑을, 역시 아직 보지도 않은 그 물건들과 함께…… 이건 또 어찌 된 일인가?'
그렇다, 그렇다. 이 모든 것이 그렇다. 하기야 그는 이것을 전에도 알고 있었고 그에게 전혀 새로운 물음이 아니었다. 그리고 밤중에 물에 던지기로 정해졌을 때, 그것은 아무 망설임도 반박도 없이 정해졌다. 마치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마치 달리 될 수 없다는 듯이…… 그렇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이것은 어제, 그가 궤 위에 앉아 갑들을 끌어내던 바로 그 순간에 이미 그렇게 정해졌던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은가!……
'내가 몹시 아프기 때문이다.'
그는 마침내 음울하게 결정했다.
'내가 스스로 나를 괴롭히고 갈기갈기 찢었고, 나 자신도 내가 무엇을 하는지 모른다…… 어제도 그저께도 이 내내 나를 찢어 놓았다…… 나으면…… 나를 찢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아예 낫지 않으면 어쩌지? 주여! 이 모든 것이 어찌나 지긋지긋한지!……'
그는 멈추지 않고 걸었다. 어떻게든 마음을 딴 데로 돌리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으나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벌여야 할지 알지 못했다. 한 가지 새롭고 이겨 낼 수 없는 느낌이 거의 한순간 한순간 점점 더 그를 사로잡았다. 마주치는 모든 것과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한 어떤 끝없고 거의 몸으로 느껴지는 역겨움, 고집스럽고 사납고 증오에 찬 역겨움이었다. 마주치는 사람이 모조리 역겨웠다. 그들의 얼굴도 걸음걸이도 몸짓도 역겨웠다. 누가 그에게 말이라도 걸었다면 그대로 침을 뱉었을 것이고 물어뜯었을 것만 같았다……
바실리옙스키 섬의 말라야 네바 강 둑, 다리 옆으로 나섰을 때 그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에 그가 산다, 이 집에.' 그는 생각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아니 내가 라주미힌에게 제 발로 온 것인가! 또 그때와 같은 일이군…… 그런데 몹시 궁금하다. 내가 스스로 온 것인가, 아니면 그냥 걷다가 여기로 들어선 것인가? 마찬가지다. 내가 말했지…… 그저께…… 그 일 다음 날 그에게 가겠다고, 그래 좋다, 가자! 지금 들르지 못할 것도 없지 않은가……'
그는 오 층의 라주미힌에게 올라갔다.
그는 집에, 제 골방에 있었고 그 순간 일을 하며 무언가를 쓰고 있었고, 손수 문을 열어 주었다. 넉 달쯤 서로 보지 못했다. 라주미힌은 누더기가 되도록 해진 실내복 차림에 맨발로 슬리퍼를 신고 앉아 있었고, 머리는 헝클어졌고 면도도 세수도 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자네 왜 이러나?”
들어온 동무를 발끝에서 머리까지 훑어보며 그가 소리쳤다. 그러고는 잠시 잠자코 있다가 휘파람을 불었다.
“설마 그렇게까지 나쁜가? 자네는 우리 같은 축을 넘어섰군.”
라스콜니코프의 누더기를 보며 그가 보탰다.
“앉기나 하게, 지쳤을 것 아닌가!”
그러고는 상대가 제 것보다 더 형편없는 방수천 씌운 터키식 소파에 쓰러지듯 앉자, 라주미힌은 문득 제 손님이 아프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자네 정말로 아프군, 알고 있나?”
그러고는 맥을 짚기 시작했다. 라스콜니코프가 손을 뿌리쳤다.
“됐네.”
그가 말했다.
“내가 온 건…… 이것 때문일세. 나는 과외 자리가 하나도 없어서…… 그래서 좀…… 하기야 나에게는 과외 자리가 전혀 필요 없네……”
“그런데 말이야? 자네 지금 헛소리를 하고 있어!”
그를 뚫어지게 지켜보던 라주미힌이 한마디 했다.
“아니, 헛소리가 아니야……”
라스콜니코프가 소파에서 일어섰다. 라주미힌에게 올라오면서 그는 그와 얼굴을 마주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한순간에 그는 몸으로 겪어 깨달았다. 이 순간 자기는 온 세상 누구와도 얼굴을 마주하기가 무엇보다 싫다는 것을. 온갖 쓴 것이 그의 안에서 솟아올랐다. 라주미힌의 문지방을 넘어서자마자 그는 제 자신에 대한 노여움으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잘 있게!”
그가 문득 말하고 문으로 걸어갔다.
“잠깐, 잠깐만, 이 별난 사람아!”
“됐네!……”
그가 다시 손을 뿌리치며 되뇌었다.
“그럼 대체 무슨 빌어먹을 일로 온 건가! 자네 돌았나? 이건…… 거의 모욕일세. 이대로는 못 보내네.”
“그럼 듣게. 내가 자네에게 온 건 자네 말고는 도와줄 사람을…… 시작하게 해 줄 사람을 아무도 모르기 때문일세…… 자네가 그들 누구보다 착하니까, 그러니까 슬기로우니까, 헤아릴 줄 아니까…… 그런데 이제 보니 나에게는 아무것도 필요 없네, 듣고 있나, 아주 아무것도…… 누구의 도움도 참견도…… 나 혼자…… 혼자서…… 자, 됐네! 나를 좀 가만히 놓아두게!”
“잠깐만 있어 보게, 이 굴뚝 청소부 같은 사람아! 아주 미쳤군! 나야 자네 좋을 대로 하겠네만. 보게. 나도 과외 자리는 없네, 그리고 그딴 건 아무래도 좋고. 대신 톨쿠치 시장에 헤루비모프라는 책장수가 있는데 이것도 나름대로 과외 자리 노릇을 하지. 나는 이제 상인 집 과외 다섯 자리와도 안 바꾸겠네. 그 사람이 그런 자잘한 책들을 내고 자연 과학 소책자를 찍어 내는데, 아 그게 얼마나 팔리는지! 제목만 해도 대단하다니까! 자네는 늘 내가 어리석다고 우겼지. 정말이지 이 사람아, 나보다 어리석은 사람도 있네! 이제 그 사람이 사조에도 뛰어들었는데 저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러네, 그러니 나야 물론 부추기지. 자, 여기 독일어 원고가 두 장 남짓 있는데, 내가 보기엔 더없이 어리석은 사기일세. 한마디로 여자가 사람인가 아닌가를 따져 보는 거지. 그리고 물론 사람이라는 것을 엄숙하게 증명해 보이고. 헤루비모프가 그걸 여성 문제 쪽으로 준비하고 있고 내가 옮기는 중이야. 그 사람이 이 두 장 반을 여섯 장으로 늘리고, 우리가 반 쪽짜리 으리으리한 제목을 붙여서 오십 코페이카에 내놓을 거네. 팔릴 거야! 번역료로 나는 한 장에 육 루블씩 받으니 다 해서 십오 루블쯤 되고, 육 루블은 미리 받았네. 이걸 끝내면 고래에 관한 걸 옮기기 시작하고, 그다음에는 『고백록』 둘째 부분에서 더없이 지루한 뒷이야기 몇 개를 골라 두었으니 그것도 옮길 걸세. 누가 헤루비모프에게 루소가 나름대로 라디셰프라고 말해 준 모양이야. 나야 물론 거스르지 않지, 될 대로 되라지! 자, 『여자는 사람인가?』 둘째 장을 옮겨 보겠나? 그럴 마음이 있으면 지금 원고를 받고 펜도 종이도 받게 — 다 관에서 나온 것일세 — 그리고 삼 루블을 받게. 내가 번역 전체에 대해 첫째 장 둘째 장 값을 미리 받았으니 삼 루블은 곧바로 자네 몫이 되는 셈이지. 한 장을 끝내면 삼 루블을 더 받고. 그리고 한 가지 더, 제발 이걸 내 쪽에서 무슨 은혜를 베푸는 것으로 여기지 말게. 오히려 자네가 들어서자마자 나는 자네가 나에게 무엇으로 쓸모 있을지 이미 셈했네. 첫째로 나는 철자가 서투르고, 둘째로 독일어가 이따금 그냥 엉망이라 대개는 내가 지어내고, 그래서 그 덕에 더 낫게 나온다는 것으로 스스로를 달래지. 뭐 누가 알겠나, 더 낫기는커녕 더 못하게 나오는지도…… 받겠나, 말겠나?”
라스콜니코프는 말없이 독일어 원고 낱장을 받고 삼 루블을 받고, 한마디도 하지 않고 나갔다. 라주미힌이 놀라며 그 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첫 번째 거리에 이르자 라스콜니코프는 문득 되돌아 다시 라주미힌에게 올라가서는, 독일어 낱장도 삼 루블도 탁자에 놓고 역시 한마디도 하지 않고 나가 버렸다.
“자네 진전 섬망이라도 걸렸나!”
마침내 성이 난 라주미힌이 으르렁거렸다.
“무슨 연극을 하는 건가! 나까지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어…… 그럴 거면 대체 무엇 하러 왔나, 이 사람아?”
“번역은…… 필요 없네……”
라스콜니코프가 이미 계단을 내려가며 중얼거렸다.
“그럼 대체 무엇이 필요하단 말인가?”
라주미힌이 위에서 소리쳤다. 상대는 말없이 계속 내려갔다.
“이봐, 자네! 어디 사나?”
대답이 없었다.
“그럼 될 대로 되-어-라!……”
그러나 라스콜니코프는 이미 거리로 나서고 있었다. 니콜라옙스키 다리에서 그는 제게 몹시 불쾌한 일이 생긴 탓에 한 번 더 온전히 정신을 차려야 했다. 하마터면 말에 치일 뻔한 그를, 마부가 서너 번이나 소리쳤는데도 그랬다며 어느 마차의 마부가 채찍으로 등을 세게 후려친 것이다. 채찍이 어찌나 그를 성나게 했던지 그는 난간 쪽으로 물러나며(어째서인지 그는 사람이 다니는 데가 아니라 차가 다니는 다리 한복판으로 걷고 있었다) 사납게 이를 갈고 딱딱거렸다. 둘레에서는 물론 웃음이 터졌다.
“싸다!”
“어디서 굴러먹던 것이겠지.”
“뻔하지, 취한 척하고 일부러 바퀴 밑으로 기어드는 거요. 그러면 당신이 물어 줘야 하고.”
“그걸로 벌어먹고 사는 거요, 나리, 그걸로 벌어먹고……”
그러나 그가 난간에 붙어 서서 멀어져 가는 마차를 여전히 멍하고 사납게 바라보며 등을 문지르고 있던 그 순간, 문득 누군가가 그의 손에 돈을 쥐여 주는 것이 느껴졌다. 바라보니 머릿수건을 쓰고 염소가죽 신을 신은 나이 든 상인 아내였고, 그와 함께 모자를 쓰고 초록 양산을 든 처녀가 있었는데 아마 딸이리라.
“받으시오, 나리, 그리스도를 보아서.”
그는 받았고 그들은 지나갔다. 돈은 이십 코페이카였다. 옷차림과 꼴로 보아 그들은 그를 거지로, 거리에서 동전을 거두는 진짜 걸인으로 여겼을 만했다. 그리고 이십 코페이카나 되는 돈을 받은 것은 아마 그들의 마음을 움직인 그 채찍질 덕이었으리라.
그는 이십 코페이카를 손에 쥐고 열 걸음쯤 걷다가 네바 강 쪽으로, 궁전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고 물은 거의 푸르렀는데 네바 강에서는 몹시 드문 일이었다. 어느 자리에서 보아도 여기, 다리 위에서, 예배당까지 스무 걸음쯤 못 미친 이 자리에서 보는 것보다 더 낫게 드러나지 않는 대성당의 둥근 지붕이 환히 빛났고, 맑은 공기를 통해 그 장식 하나하나까지 또렷이 알아볼 수 있었다. 채찍 맞은 아픔은 가라앉았고 라스콜니코프는 매를 잊었다. 불안하고 그리 또렷하지 않은 생각 하나가 지금 오로지 그를 붙들고 있었다. 그는 서서 멀리 오래,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 자리는 그에게 각별히 낯익었다. 대학에 다닐 때 그는 흔히, 무엇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쩌면 백 번쯤은 바로 이 자리에 멈추어 서서 정말로 훌륭한 이 전경을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그때마다 제 안의 또렷하지 않고 풀리지 않는 어떤 인상에 거의 놀라곤 했다. 이 훌륭한 전경에서는 언제나 설명할 수 없는 추위가 그에게 불어왔다. 이 화려한 그림은 그에게 말 없고 귀먹은 혼으로 가득했다…… 그는 그때마다 제 음울하고 수수께끼 같은 인상에 놀랐고, 제 자신을 믿지 못해 그 풀이를 뒷날로 미루었다. 지금 문득 그는 제 예전의 이 물음과 어리둥절함을 날카롭게 떠올렸고, 지금 그것들을 떠올린 것이 우연이 아닌 듯싶었다. 제가 전과 똑같은 자리에 멈추어 섰다는 것 하나만도 사납고 이상하게 여겨졌다. 마치 정말로 지금도 전과 똑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고, 그리고…… 그토록 얼마 전까지 마음을 쓰던 그 전과 똑같은 주제와 그림에 마음을 쓸 수 있다고 여기기라도 한 것처럼. 우스울 지경이기까지 했고 동시에 가슴이 아프도록 죄어들었다. 어떤 깊은 곳, 아래쪽, 발밑 어딘가 겨우 보이는 데에 그 옛것들이 죄다 있는 듯했다. 예전의 생각도, 예전의 과제도, 예전의 주제도, 예전의 인상도, 이 전경 전체도, 그 자신도, 모든 것이, 모든 것이…… 그는 어딘가 위로 날아오르고 모든 것이 그의 눈앞에서 사라지는 듯했다…… 저도 모르게 손을 움직이다가 그는 문득 제 주먹 안에 쥔 이십 코페이카를 느꼈다. 그는 손을 폈고 동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고 팔을 휘둘러 물에 던졌다. 그런 다음 돌아서서 집으로 걸어갔다. 이 순간 제가 가위로 저를 모든 사람과 모든 것에서 잘라 낸 것만 같았다.
그가 제 방에 이른 것은 이미 저녁 무렵이었으니 여섯 시간쯤 걸어 다닌 셈이었다. 어디로 어떻게 돌아왔는지 그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옷을 벗고 쫓긴 말처럼 온몸을 떨면서 소파에 누워 외투를 끌어당기고 곧바로 넋을 놓았다……
그는 온전히 땅거미가 내렸을 때 무서운 비명에 정신이 들었다. 맙소사, 이 무슨 비명인가! 그런 부자연스러운 소리를, 그런 울부짖음과 아우성과 이 가는 소리와 눈물과 매질과 욕설을 그는 여태 들어 본 적도 본 적도 없었다. 그런 짐승 같은 짓을, 그런 광란을 그는 그려 볼 수조차 없었다. 소름에 질려 그는 몸을 일으켜 제 잠자리에 앉았고, 한순간 한순간 숨이 멎고 괴로웠다. 그러나 싸움과 아우성과 욕설은 점점 더 세지기만 했다. 그런데 더없이 놀랍게도 그는 문득 제 집주인의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그 여자는 울부짖고 새된 소리를 지르고 넋두리를 했는데, 서두르고 다급해하며 말을 뱉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도 없었고, 무언가를 빌고 있었다 — 물론 그만 때려 달라는 것이었으리라. 계단에서 사정없이 맞고 있었으니까. 때리는 자의 목소리는 노여움과 미친 기운에 어찌나 무서워졌던지 이제 쉰 소리만 낼 뿐이었으나, 그래도 때리는 자 역시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고 역시 빠르게, 알아들을 수 없게, 서두르고 숨이 막혀 가며 말하고 있었다. 문득 라스콜니코프는 나뭇잎처럼 떨었다. 그 목소리를 알아본 것이다. 일리야 페트로비치의 목소리였다. 일리야 페트로비치가 여기 있고 집주인을 때린다! 발로 차고 머리를 계단에 짓찧고 있다 — 그것이 또렷하다, 소리로, 아우성으로, 매질로 들린다! 이게 무엇인가, 세상이 뒤집히기라도 했단 말인가? 모든 층에서, 온 계단에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소리가 들렸고, 목소리와 외침이 들렸고, 올라오고 두드리고 문을 여닫고 뛰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무엇 때문에, 어떻게 이럴 수가!'
그는 되뇌며 제가 아주 미쳐 버렸다고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다, 그는 너무나 또렷이 듣고 있다!…… 그렇다면 곧 제게도 올 것이다.
'왜냐하면…… 틀림없이 이 모든 것이 그것 때문이다…… 어제 일 때문이다…… 주여!'
그는 갈고리를 걸려 했으나 손이 올라가지 않았다…… 게다가 쓸데없는 짓이었다! 두려움이 얼음처럼 그의 마음을 뒤덮었고 그를 괴롭혔고 그를 얼어붙게 했다…… 그러나 마침내 꼬박 십 분은 이어진 이 소란이 차츰 잦아들기 시작했다. 집주인은 신음하고 끙끙거렸고 일리야 페트로비치는 여전히 으르고 욕을 했다…… 그러나 마침내 그도 잠잠해진 듯했다. 이제 그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설마 갔단 말인가! 주여!'
그렇다, 집주인도 간다, 여전히 신음하고 울면서…… 이제 그 여자의 문도 닫혔다…… 이제 사람들도 계단에서 제 집으로 흩어진다. 탄식하고 다투고 서로 부른다, 말소리를 외침으로 높였다가 속삭임으로 낮췄다가 하면서. 아마 많이들 있었으리라. 온 집이 뛰어나오다시피 했으니.
'그러나 맙소사, 이 모든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그리고 무엇 하러, 무엇 하러 그가 여기 왔단 말인가!'
라스콜니코프는 힘없이 소파에 쓰러졌으나 이제 눈을 감을 수 없었다. 그는 삼십 분쯤을, 여태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그런 괴로움 속에, 끝없는 소름의 그런 견딜 수 없는 느낌 속에 누워 있었다. 문득 환한 빛이 그의 방을 비추었다. 나스타시야가 초와 수프 접시를 들고 들어온 것이었다.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그가 자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보고서 그 여자는 초를 탁자에 놓고 가져온 것을 펼쳐 놓기 시작했다. 빵과 소금과 접시와 숟가락을.
“어제부터 못 먹었을 테지. 온종일 쏘다니고는 학질에 걸려 떨고 있으니.”
“나스타시야…… 왜 집주인을 때렸소?”
그 여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누가 집주인을 때려?”
“방금…… 삼십 분 전에, 일리야 페트로비치, 감독관 보좌가, 계단에서…… 왜 그렇게 두들겨 팼소? 그리고…… 왜 왔소?……”
나스타시야는 말없이 이맛살을 찌푸리고 그를 살펴보았고 오래 그렇게 바라보았다. 그 살펴보는 눈길이 그에게는 몹시 불쾌해졌고 무섭기까지 했다.
“나스타시야, 왜 말이 없소?”
마침내 그가 겁먹은 목소리로 힘없이 말했다.
“그건 피야.”
마침내 그 여자가 대답했다. 조용히, 마치 혼잣말처럼.
“피!…… 무슨 피?……”
그는 창백해지며 벽 쪽으로 물러나 중얼거렸다. 나스타시야는 말없이 그를 계속 바라보았다.
“아무도 집주인을 때리지 않았어.”
그 여자가 다시 엄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숨을 겨우 쉬며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내가 직접 들었소…… 나는 자지 않았소…… 앉아 있었소.”
그가 더 겁먹은 채로 말했다.
“나는 오래 들었소…… 감독관 보좌가 왔소…… 모든 집에서 계단으로 다들 뛰어나왔소……”
“아무도 안 왔어. 그건 자네 안에서 피가 소리치는 거야. 피가 빠져나갈 데가 없어서 간에 엉기기 시작하면 헛것이 보이기 시작하지…… 먹을 텐가, 말 텐가?”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스타시야는 여전히 그의 곁에 서서 뚫어지게 그를 바라보며 가지 않았다.
“마실 것 좀…… 나스타시유시카.”
그 여자는 아래로 내려갔다가 이 분쯤 뒤에 흰 질그릇 잔에 물을 담아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그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미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찬물을 한 모금 삼켰다는 것과 잔에서 물을 가슴에 흘렸다는 것만 기억했다. 그런 다음 넋을 잃었다.
작품 해설과 번역 노트
윤문 노트
이 회차의 고유 문제 — 「그건 피야」
이 장의 급소는 나스타시야의 한마디다. 원문은 두 뜻이 겹치게 해 두었다. 하나는 민간에서 말하는 울혈, 곧 피가 빠져나가지 못해 헛것이 보인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독자만 알아듣는 뜻이다. 이 겹침은 설명하면 죽는다. 그래서 '그건 피야'로 짧게 끊고, 그 여자가 뒤에 덧붙이는 민간 의학 설명을 그대로 두어 표면의 뜻이 먼저 오게 했다. 라스콜니코프가 창백해지며 벽으로 물러나는 반응이 두 번째 뜻을 독자에게 넘긴다.
그 밖에
- 분필 낙서 — 원문은 울타리에 적힌 글씨의 철자가 일부러 틀려 있다. 거리에서 아무나 갈겨쓴 것이라는 표시이므로 한국어에서도 맞춤법을 흐트러뜨려 옮겼다.
- 이십 코페이카의 왕복 — 1부 4장에서 그가 소녀를 위해 순경에게 준 돈이 이십 코페이카였다. 이 장에서 그는 같은 액수를 적선으로 받고 네바 강에 던진다. 원문이 같은 낱말을 쓰므로 역어도 같게 두었다. 주고, 받고, 버리는 세 걸음이 한 화폐 단위로 이어진다.
- '가위로 잘라 낸 듯' — 2부 1장의 사무소에서 마음이 비던 대목과 짝을 이룬다. 거기서는 느낌이었고 여기서는 동작이 되었다.
- 라주미힌의 말 — 한 호흡에 길게 쏟아 내는 인물이다. 헤루비모프 이야기는 사실상 한 문단짜리 독백이라 끊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말이 많다는 것 자체가 이 인물의 성격이고, 뒤에 그가 라스콜니코프를 감당하게 되는 근거다.
- '여자는 사람인가?' — 원문 그대로다. 라주미힌이 이것을 어리석은 사기라 부르면서도 옮기고 있다는 것이 당대 출판의 풍경이자 그의 형편이다.
- 대성당의 전경 — 이 소설에서 드물게 아름다운 것을 오래 바라보는 대목이다. 그런데 그에게는 거기서 추위가 불어온다. 원문의 긴 호흡을 쪼개지 않았다.
검수
- 단상체 구간의 말줄임·반복·미완을 정리하지 않았다.
- 강조부사를 임의로 삭제하지 않았다.
- 1부 고정 낱말은 이 장에 등장하지 않았다.
주
- 푸드 — 약 16.4킬로그램. 돌이 한 푸드 반이라면 25킬로그램쯤 되고, 열이 오른 사람이 두 손으로 겨우 뒤집을 만한 무게다.
- 아르신 — 약 71센티미터.
- 예카테리나 운하 — 현재의 그리보예도프 운하. 소설의 주요 무대를 가로지른다.
- 톨쿠치 시장 — 페테르부르크의 헌 물건 시장. 싸구려 출판업자가 자리 잡을 만한 곳이다.
- 헤루비모프 — 케루빔(천사)에서 온 성. 자연 과학 소책자로 돈을 버는 출판업자에게 붙인 이름이다.
- 『고백록』 둘째 부분 — 루소의 자서전. 라디셰프는 18세기 러시아의 급진 저술가로, 두 사람을 같은 부류로 묶는 것은 당대 출판계의 어설픈 안목을 보여 주는 농담이다.
- 여성 문제 — 1860년대 러시아에서 가장 뜨거웠던 사회 논쟁 가운데 하나. 여성의 교육과 노동과 지위를 두고 벌어진 논의를 가리킨다.
- 진전 섬망 — 심한 알코올 금단 증상. 라주미힌이 상대의 앞뒤 안 맞는 행동을 두고 쓰는 말이다.
- 니콜라옙스키 다리 — 네바 강에 놓인 다리. 바실리옙스키 섬과 시내를 잇는다.
- 대성당의 둥근 지붕 — 이사크 성당.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그 전경이 이 도시의 대표적인 풍경이었다.
- 그리스도를 보아서 — 적선할 때 쓰는 러시아 관용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