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 죄와 벌 · 1866

제4부 제1장

소냐와의 만남, 유혹과 추궁이 라스콜니코프의 내면을 뒤흔든다.
소냐와의 만남, 유혹과 추궁이 라스콜니코프의 내면을 뒤흔든다.
예고 없이 나타난 스비드리가일로프가 라스콜니코프의 방을 찾아온다.
예고 없이 나타난 스비드리가일로프가 라스콜니코프의 방을 찾아온다.

'정말 꿈이 계속되는 걸까?'

라스콜니코프는 다시 생각했다. 뜻밖의 손님을 조심스럽고 미심쩍은 눈으로 살폈다.

“스비드리가일로프라고요?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마침내 어리둥절한 채 소리 내어 말했다. 손님은 그 외침에도 조금도 놀라지 않는 듯했다.

“두 가지 까닭으로 찾아왔습니다. 첫째로는 직접 알고 지내고 싶었습니다. 아주 흥미롭고 선생에게도 좋은 쪽으로 오래전부터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둘째로는 누이동생 아브도티야 로마노브나의 이해관계에 직접 닿아 있는 일에, 어쩌면 도움을 거절하지 않으시리라는 기대가 있어서지요. 지금은 선입견 때문에, 누가 소개해 주지 않고 혼자 찾아가면 아마 마당에도 들이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선생이 도와주신다면, 반대로 저는 기대를…”

“잘못 짚으셨습니다.”

라스콜니코프가 말을 잘랐다.

“실례지만, 어제야 도착하셨지요?”

라스콜니코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제인 줄 압니다. 저도 불과 그저께 도착했거든요. 자, 로디온 로마노비치, 이 점에 관해서는 이렇게 말씀드리지요. 제 변명을 늘어놓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저도 한마디는 하게 해 주십시오. 그 모든 일에서 제 쪽에 그토록 특별히 죄가 될 만한 것이 도대체 무엇이었습니까? 편견 없이, 온전한 정신으로 판단하자는 말입니다.”

라스콜니코프는 계속 말없이 그를 살폈다.

“제집에서 의지할 데 없는 처녀를 쫓아다니고, 「추악한 제안으로 모욕했다」는 것이겠지요? 제가 먼저 짚어 드리는 겁니다! 하지만 저도 사람이며, 인간적인 것이라면 그 무엇도… 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한마디로 저도 마음을 빼앗기고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그런 일은 우리가 시킨다고 되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그러면 모든 것이 아주 자연스럽게 설명됩니다. 문제는 오직 하나예요. 제가 괴물이냐, 아니면 저 자신도 희생자냐? 희생자라면 어떻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저와 함께 미국이나 스위스로 달아나자고 제안하면서, 어쩌면 더없이 존중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을 수도 있고, 두 사람 모두의 행복을 이루려 했을 수도 있잖습니까!.. 이성이란 정념을 섬기는 것이니까요. 제가 오히려 제 자신을 더 크게 망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제발…”

“문제는 그런 게 전혀 아닙니다.”

라스콜니코프가 역겨워하며 말을 가로막았다.

“그저 당신이 싫은 겁니다. 옳으냐 그르냐와 상관없이요. 그래서 당신과 알고 지내고 싶지 않은 것이고, 당신을 쫓아내는 겁니다. 그러니 가세요!..”

스비드리가일로프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었다.

“선생은 참… 선생은 당해 낼 수가 없군요!”

아주 거리낌 없이 웃으며 말했다.

“잔꾀를 좀 부려 보려 했는데, 안 되겠어요. 곧장 가장 정확한 지점을 짚으셨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잔꾀를 부리고 있잖습니까.”

“그러면 어떻습니까? 그러면 어때요?”

스비드리가일로프는 활짝 웃으며 되풀이했다.

“이른바 정당한 싸움이라는 것이지요. 충분히 허용될 만한 꾀 아닙니까!.. 하지만 제 말을 끊으셨습니다. 어쨌거나 다시 말씀드리지요. 정원에서 그 일이 일어나지만 않았다면 아무 불쾌한 일도 없었을 겁니다. 마르파 페트로브나가…”

“마르파 페트로브나도 당신이 죽게 했다면서요?”

라스콜니코프가 거칠게 말을 잘랐다.

“그것도 들으셨습니까? 하긴 못 들으셨을 리가… 자, 그 질문에 대해서는, 정말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제 양심은 그 점에서 더없이 편안합니다만. 그러니까 제가 무슨 그런 일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모든 것이 절차에 맞게 아주 정확하게 처리되었습니다. 의학적 조사에서는 식사를 배불리 하고 포도주를 거의 한 병 마신 뒤 곧바로 목욕한 탓에 졸중이 온 것으로 밝혀졌어요. 달리 무엇이 나올 수도 없었습니다… 아니, 제가 한동안 혼자 생각한 것은 이런 겁니다. 특히 여기 오는 길에 객차에 앉아서 말이지요. 제가 정신적으로 화를 돋우었다든가, 그와 비슷한 무슨 일로 이 모든… 불행을 거들지는 않았을까? 하지만 그런 일조차 있을 수 없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라스콜니코프가 웃었다.

“그렇게까지 신경을 쓰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왜 웃으시지요? 생각해 보세요. 가느다란 채찍으로 딱 두 번 때렸을 뿐입니다. 자국도 없었어요… 저를 냉소적인 인간으로 보지는 말아 주십시오. 그게 제 쪽에서 얼마나 추악한 짓이었는지 정확히 압니다. 그 밖의 여러 가지도요. 하지만 마르파 페트로브나가 저의, 말하자면 그 흥분을 어쩌면 반가워했으리라는 것도 저는 확실히 압니다. 누이동생에 관한 이야기는 밑바닥까지 다 써먹은 뒤였거든요. 마르파 페트로브나는 벌써 사흘째 집에 틀어박혀 있어야 했습니다. 읍내에 들고 나갈 이야기가 없었어요. 그 편지를 들고 다니는 일에도 거기 사람들은 모두 진저리를 내고 있었고요. 편지를 읽어 주고 다닌 이야기는 들으셨지요? 그런데 갑자기 채찍 두 대가 하늘에서 떨어진 겁니다! 가장 먼저 마차에 말을 매라고 시켰지요!.. 여자들에게는 겉으로 아무리 분개하더라도 모욕당하는 것이 아주, 아주 기분 좋은 때가 있다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누구에게나 그런 때가 있어요. 사람은 대체로 모욕당하기를 아주 좋아합니다. 알아차리신 적 있습니까? 여자들은 특히 그렇지요. 그것만으로 살아간다고 해도 될 정도예요.”

라스콜니코프는 잠시 일어나 나가 버려 이 만남을 끝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얼마간의 호기심과, 어쩌면 무슨 계산 같은 것이 잠깐 그를 붙잡았다.

“때리기를 좋아하십니까?”

마음이 다른 데 가 있는 채 물었다.

“아니요, 그다지.”

스비드리가일로프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마르파 페트로브나와는 거의 싸우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아주 사이좋게 살았고, 아내는 늘 제게 만족했어요. 일곱 해 동안 채찍을 쓴 것은 딱 두 번입니다. 세 번째 일이 한 번 더 있기는 하지만, 그건 아주 애매한 경우라 빼놓는다면 말입니다. 처음은 결혼하고 두 달 뒤, 시골에 도착하자마자였고, 다음은 바로 이번의 마지막 일이지요. 그런데 선생은 저를 무슨 괴물이나 수구파, 농노를 부리는 폭군으로 여기셨군요? 헤헤… 그러고 보니 로디온 로마노비치, 몇 년 전, 아직 그 은혜로운 공개 논의의 시대에 우리나라에서 어느 귀족을 온 국민과 온 문단이 나서서 망신 준 일을 기억하십니까? 성은 잊었습니다만! 객차에서 독일 여자를 채찍질했던 사람 말입니다. 기억하세요? 그때, 아마 같은 해에 「『베크』의 추잡한 행위」 사건도 있었지요. 그러니까 「이집트의 밤」, 공개 낭독 말입니다. 기억하시지요? 검은 눈동자!.. 아, 우리 청춘의 황금시대여, 어디로 갔는가! 자,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독일 여자를 채찍질한 그 신사에게는 전혀 공감하지 않습니다. 실제로도 그건… 공감할 게 뭐 있겠어요! 하지만 때로는 어찌나 사람을 부추기는 「독일 여자들」이 있는지, 아무리 진보적인 사람이라도 자기는 절대로 그러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점은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군요. 당시에는 아무도 이 관점에서 문제를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관점이 참으로 인간적인 관점이란 말입니다. 정말이에요!”

그 말을 하고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갑자기 다시 웃었다. 라스콜니코프에게는 그가 무언가를 단단히 결심했으며 제 속셈을 감추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분명했다.

“며칠 내리 아무하고도 말을 하지 않으셨나 보군요?”

그가 물었다.

“거의 그렇습니다. 왜요? 제가 이렇게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라 놀라셨습니까?”

“아니요. 너무 말이 잘 통하는 분이라서 놀랐습니다.”

“질문이 무례한데도 제가 기분 나빠하지 않아서요? 그런 뜻입니까? 그렇지요… 기분 나쁠 게 뭐 있겠습니까? 물으시는 대로 대답했을 뿐인데요.”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놀라울 만큼 순진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사실 저는 특별히 관심 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정말이에요.”

그가 무언가 생각하는 듯 말을 이었다.

“특히 지금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고요… 하긴 무슨 속셈이 있어서 비위를 맞춘다고 생각하실 만합니다. 누이동생에 관한 용건이 있다고 제가 직접 말했으니 더욱 그렇겠지요. 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몹시 따분합니다! 특히 이 사흘 동안은요. 그래서 선생을 뵈니 반갑기까지 합니다… 화내지 마십시오, 로디온 로마노비치. 하지만 선생 자신도 제게는 어쩐지 대단히 이상한 분으로 보입니다. 뭐라고 하시든 선생에게는 무언가가 있어요. 특히 지금 말입니다. 꼭 이 순간이라는 뜻이 아니라, 대체로 요즘에… 자, 자, 그만하겠습니다. 그만할 테니 찌푸리지 마세요! 저도 생각하시는 것만큼 곰 같은 사람은 아닙니다.”

라스콜니코프가 어두운 눈길로 그를 보았다.

“어쩌면 곰 같은 사람은 전혀 아닐지도 모르지요. 오히려 아주 좋은 사회에서 지내셨거나, 적어도 필요할 때는 점잖게 처신할 줄 아는 분 같군요.”

“저는 남의 평가에 특별히 관심이 없습니다.”

스비드리가일로프가 메마르게, 조금은 거만한 기색까지 띠며 대답했다.

“그러니 때로는 천박한 인간으로 지내면 어떻습니까? 우리네 기후에서는 그런 옷이 입기에 아주 편하고… 게다가 천성이 그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면야.”

다시 웃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여기 아는 사람이 많으시다고 들었습니다. 이른바 「연줄 없는 분은 아니다」라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무슨 목적 때문이 아니고서야 왜 제가 필요하십니까?”

“아는 사람이 있다는 말씀은 맞습니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핵심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말을 받았다.

“벌써 마주치기도 했어요. 사흘째 돌아다니고 있으니까요. 저도 알아보고, 저쪽에서도 저를 알아보는 것 같더군요. 물론 옷도 번듯하게 입고 있고, 가난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도 않습니다. 농노 해방도 우리에게는 별 영향이 없었지요. 숲과 물이 넘나드는 초지가 있으니 수입이 줄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에게는 가지 않을 겁니다. 예전에도 싫증이 났거든요. 사흘째 돌아다니면서 누구에게도 아는 체하지 않고 있어요… 게다가 이 도시라니! 대체 어떻게 이런 도시가 생겨났는지 좀 말해 보십시오! 서기들과 온갖 신학생들의 도시예요! 정말이지, 팔 년 전 여기서 빈둥거릴 때는 미처 못 본 것들이 많았어요… 이제는 해부학에만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정말이에요!”

“무슨 해부학 말입니까?”

“클럽이나 뒤소 같은 곳, 선생네 도박판이나, 아니면 또 진보 같은 것은, 우리 없이들 하라고 합시다.”

이번에도 질문을 못 들은 듯 말을 이었다.

“사기 도박꾼 노릇을 하고 싶겠습니까?”

“사기 도박도 하셨습니까?”

“그걸 빼놓을 수 있나요? 팔 년 전에는 한 무리가 있었어요. 아주 번듯한 모임이었지요.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모두 예의범절을 아는 사람들이었고, 시인도 있었고 자본가도 있었어요. 대체로 러시아 사회에서는 매를 맞아 본 사람들이 예절이 가장 좋습니다. 알아차리셨습니까? 저는 요즘 시골에서 지내다 보니 이렇게 흐트러진 것이지요. 하지만 결국 그때 빚 때문에 감옥에 갔습니다. 네진 출신 그리스 놈 하나 때문이었어요. 그때 마르파 페트로브나가 나타나 값을 흥정하더니 은화 삼만에 저를 사냈습니다. 빚은 모두 칠만이었고요. 우리는 정식으로 결혼했고, 아내는 저를 무슨 보물처럼 곧장 자기 시골집으로 데려갔어요. 저보다 다섯 살 많습니다. 아주 사랑했지요. 저는 칠 년 동안 시골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잘 보세요. 아내는 내내 그 삼만에 대한 증서를 다른 사람 명의로 쥐고 있었어요. 제가 무슨 일로든 반항할 생각을 품기만 하면 곧장 덫에 걸리는 겁니다! 정말 그랬을 거예요! 여자들에게는 그런 것들이 다 함께 들어앉아 있지요.”

“그 증서가 없었다면 달아나셨겠군요?”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 증서 때문에 얽매인 일은 거의 없습니다. 어디 가고 싶지가 않았거든요. 제가 따분해하는 걸 보고 마르파 페트로브나 자신이 외국에 가자고 두 번쯤 권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뭘요! 예전에도 외국에 가 보았는데, 갈 때마다 속이 메스꺼웠습니다. 꼭 그렇다는 게 아니라, 이를테면 동이 트고, 나폴리만과 바다가 보이는데,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슬퍼지는 겁니다. 가장 싫은 것은 정말로 무언가 때문에 슬퍼하고 있다는 사실이지요! 아니, 고국이 낫습니다. 여기서는 적어도 모든 일을 남의 탓으로 돌리고 자기를 변호할 수 있으니까요. 어쩌면 지금은 북극 탐험에 나설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술버릇이 고약해서 술 마시기도 싫고, 술 말고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거든요. 해 보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일요일에 베르크가 유수포프 정원에서 거대한 기구를 타고 날아오른다면서요? 돈을 받고 동승할 사람을 모은다던데, 사실입니까?”

“타러 가시려고요?”

“제가요? 아니… 그냥…”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정말 생각에 잠긴 듯 중얼거렸다.

'이 사람, 정말로 하는 말인가?'

라스콜니코프는 생각했다.

“아니요, 증서 때문에 얽매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스비드리가일로프가 생각에 잠겨 말을 이었다.

“제가 스스로 시골을 떠나지 않은 겁니다. 마르파 페트로브나는 일 년쯤 전에 제 영명 축일에 그 증서를 돌려주고, 게다가 상당한 돈까지 선물했습니다. 아내에게는 자본이 있었거든요. 「아르카디 이바노비치, 내가 당신을 얼마나 믿는지 보시겠어요?」 정말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말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아십니까? 저는 시골에서 꽤 괜찮은 지주가 되었어요. 인근에서 저를 압니다. 책도 주문해서 읽었지요. 마르파 페트로브나는 처음에는 좋아하다가, 나중에는 제가 공부를 너무 많이 할까 봐 자꾸 걱정했습니다.”

“마르파 페트로브나가 많이 그리우신가 보군요?”

“제가요? 어쩌면요. 정말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유령을 믿으십니까?”

“무슨 유령요?”

“보통 말하는 유령이지요. 무슨 유령이겠습니까!”

“당신은 믿습니까?”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선생 비위를 맞추자면요… 그러니까 안 믿는다는 뜻은 아니고…”

“나타나기라도 합니까?”

스비드리가일로프가 어쩐지 이상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마르파 페트로브나께서 찾아와 주십니다.”

입을 비틀어 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찾아와 준다니요?”

“벌써 세 번 왔어요. 처음 본 것은 장례 당일, 묘지에서 돌아온 지 한 시간 뒤였습니다. 여기로 떠나기 전날이었지요. 두 번째는 그저께 새벽에 오는 길의 말라야 비셰라 역에서였고, 세 번째는 두 시간 전, 제가 묵는 집의 방에서였습니다. 혼자 있었어요.”

“깨어 있을 때요?”

“완전히요. 세 번 다 깨어 있었습니다. 와서 일 분쯤 이야기하다가 문으로 나갑니다. 언제나 문으로요.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아요.”

“왜 나는 당신에게 반드시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생각했던 걸까요!”

라스콜니코프가 갑자기 말하고는, 그런 말을 했다는 데 스스로 놀랐다. 몹시 흥분해 있었다.

“아, 그래요?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스비드리가일로프가 놀라서 물었다.

“정말입니까? 우리 사이에 무슨 공통점이 있다고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그런 말 한 적 없습니다!”

라스콜니코프가 날카롭고 격하게 대답했다.

“안 했습니까?”

“네!”

“한 줄 알았는데요. 아까 들어와 보니 선생이 눈을 감고 누워 있으면서 자는 체하고 계시기에, 바로 속으로 말했지요. '바로 이 사람이구나!' 하고요.”

“바로 이 사람이라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라스콜니코프가 외쳤다.

“무슨 말이냐고요? 정말이지, 저도 모르겠군요…”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솔직하게, 저 자신도 어쩐지 헷갈린 듯 중얼거렸다.

일 분쯤 말이 없었다. 두 사람은 눈을 크게 뜨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다 헛소리입니다!”

라스콜니코프가 짜증스럽게 외쳤다.

“그런데 찾아오면 무슨 말을 합니까?”

“아내가요? 상상해 보세요. 정말 보잘것없는 사소한 이야기뿐입니다. 사람 마음이 우습지요? 바로 그게 저를 화나게 합니다. 처음 들어왔을 때는, 아시겠지만 제가 지쳐 있었어요. 장례 예배에, 「성인들과 함께 안식을」, 그 뒤에는 추도 기도와 음식까지. 마침내 서재에 혼자 남아 시가에 불을 붙이고 생각에 잠겨 있었지요. 그런데 문으로 들어와서는 이러는 겁니다. 「아르카디 이바노비치, 오늘은 정신이 없어서 식당 시계 태엽 감는 것도 잊으셨군요.」 그 시계는 실제로 칠 년 내내 매주 제가 직접 태엽을 감았습니다. 잊으면 늘 아내가 일러 주었고요.

이튿날에는 벌써 여기 오는 길이었지요. 새벽에 역에 들어갔습니다. 밤새 잠깐씩 졸았더니 온몸이 쑤시고 눈이 잠에 절어 있었어요. 커피를 시켰는데, 보니 마르파 페트로브나가 갑자기 제 옆에 앉는 겁니다. 손에는 카드 한 벌을 들고요. 「아르카디 이바노비치, 길 떠나시는 점이나 쳐 드릴까요?」 아내는 점을 아주 잘 쳤거든요. 아, 그때 점을 치지 않은 것은 저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어요! 겁이 나서 달아났습니다. 마침 종도 울렸고요.

오늘은 식당에서 가져온 형편없는 점심을 먹고 속이 더부룩한 채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또 마르파 페트로브나가 나타났습니다. 길게 끌리는 자락이 달린 새 초록 비단옷을 입고 한껏 차려입었더군요. 「안녕하세요, 아르카디 이바노비치! 내 옷이 마음에 드세요? 아니시카는 이렇게 못 지어요.」 아니시카는 우리 마을의 바느질하는 여자입니다. 예전 농노 출신인데 모스크바에서 일을 배웠어요. 예쁘장한 아이죠. 아내는 서서 제 앞을 빙글빙글 돕니다. 저는 옷을 살펴보고, 그다음에는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본 뒤 말했어요. 「마르파 페트로브나, 그런 사소한 일 때문에 이렇게 수고스럽게 나를 찾아오고 싶으십니까?」 그러자 「아이고, 여보, 이젠 당신을 건드리지도 못하겠네!」 하는 겁니다.

약을 올리려고 말했지요. 「마르파 페트로브나, 나 결혼하고 싶어요.」 그러자 「당신이라면 그러고도 남지요, 아르카디 이바노비치. 아내를 묻기가 무섭게 곧장 장가들러 가다니, 참 체면 서는 일이네요. 상대나 제대로 고르면 좋으련만, 내가 알지요. 그 여자에게도 당신에게도 좋을 것 하나 없이, 멀쩡한 사람들 웃음거리만 되고 말 거예요.」 그러고는 그냥 나가 버렸습니다.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까지 나는 것 같았어요. 이 무슨 허튼 일이란 말입니까?”

“하지만 전부 거짓말하시는 건지도 모르지요?”

라스콜니코프가 대꾸했다.

“저는 거짓말을 좀처럼 하지 않습니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질문의 무례함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듯, 생각에 잠겨 대답했다.

“그전에는 유령을 본 적이 없었습니까?”

“아… 아니요, 본 적 있어요. 평생에 딱 한 번, 육 년 전입니다. 필카라는 하인이 있었습니다. 막 장례를 치른 뒤였는데, 깜빡 잊고 외쳤지요. 「필카, 파이프!」 그랬더니 들어와서 곧장 제 파이프들이 놓인 진열장으로 가는 겁니다. 저는 앉아서 생각했어요. '내게 복수하러 왔구나.' 죽기 바로 전에 심하게 다투었거든요. 「감히 팔꿈치가 찢어진 옷을 입고 내 앞에 들어와? 썩 나가, 못된 놈!」 하고 말했습니다. 돌아서 나갔고, 그 뒤에는 다시 오지 않았어요. 그때 마르파 페트로브나에게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을 위해 추도 예배를 드릴까 하다가, 부끄러워서 그만두었지요.”

“의사에게 가 보세요.”

“제가 건강하지 않다는 것은 선생이 말씀하지 않아도 압니다. 다만 어디가 아픈지는 정말 모르겠어요. 제 생각에는 선생보다 다섯 배는 더 건강한 것 같은데요. 제가 여쭌 것은 유령이 나타난다는 말을 믿느냐는 것이 아닙니다. 유령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느냐고 여쭌 겁니다.”

“아니요. 절대로 믿지 않습니다!”

라스콜니코프가 거의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보통은 어떻게들 말하지요?”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머리를 조금 숙이고 옆을 보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당신은 아프다. 그러니 당신 눈에 보이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헛것일 뿐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엄밀한 논리가 없습니다. 유령이 아픈 사람에게만 나타난다는 것은 저도 인정해요. 그러나 그것은 유령이 아픈 사람에게만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뿐이지, 유령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잖습니까.”

“물론 존재하지 않지요!”

라스콜니코프가 짜증스럽게 우겼다.

“없다고요?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스비드리가일로프가 천천히 그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럼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요? 좀 도와주십시오. 유령은 말하자면 다른 세계의 조각과 파편, 그 시작입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물론 그것을 볼 까닭이 없지요. 건강한 사람은 가장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므로, 충실하고 질서 있게 살기 위해서는 오직 이곳의 삶만 살아야 하니까요. 그런데 조금 병이 들고, 몸 안에서 이 세상의 정상적인 질서가 조금만 어그러져도, 곧장 다른 세계의 가능성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병이 깊어질수록 다른 세계와의 접촉도 많아지고, 마침내 사람이 완전히 죽으면 곧장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것이지요. 저는 오래전부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세를 믿는다면 이 생각도 믿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내세를 믿지 않습니다.”

라스콜니코프가 말했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생각에 잠겨 앉아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거미만 있다면요? 아니면 그런 것들뿐이라면.”

갑자기 그가 말했다.

'미친 사람이군.'

라스콜니코프는 생각했다.

“우리는 늘 영원을 이해할 수 없는 관념, 무언가 거대하고 또 거대한 것으로 상상합니다! 하지만 왜 반드시 거대해야 하지요? 그런데 그 모든 것 대신 거기에는 조그만 방 하나가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시골 목욕탕처럼 그을음이 낀 방에 구석구석 거미가 있는 겁니다. 그게 영원의 전부예요. 아십니까? 저는 가끔 그런 것이 어른거립니다.”

“정말, 정말로 그보다 더 위안이 되고 더 정의로운 것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습니까!”

라스콜니코프가 고통스러운 심정으로 외쳤다.

“더 정의로운 것이라고요? 누가 압니까? 어쩌면 그게 바로 정의로운 것일 수도 있지요. 그리고 아십니까? 저라면 꼭 일부러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 흉측한 대답을 듣자 라스콜니코프는 갑자기 한기가 온몸을 감싸는 것 같았다. 스비드리가일로프가 고개를 들고 그를 유심히 보더니 갑자기 큰 소리로 웃었다.

“아니, 생각해 보세요!”

그가 외쳤다.

“반시간 전만 해도 우리는 서로 얼굴도 보지 못했고, 적으로 여기고 있으며, 사이에는 해결되지 않은 일이 있어요. 그런데 그 일은 내버려 두고 이렇게 문학 이야기까지 흘러왔군요! 우리가 같은 밭에서 난 열매라고 한 말이 맞지 않습니까?”

“그러니 제발 부탁드리겠습니다.”

라스콜니코프가 짜증스럽게 말을 이었다.

“어서 용건을 밝히고, 어째서 이렇게 저를 찾아 주시는 영광을 베푸셨는지 알려 주십시오… 그리고… 그리고… 저는 급합니다. 시간이 없어요. 나가려던 참입니다…”

“좋습니다, 좋아요. 누이동생 아브도티야 로마노브나가 루진 씨, 표트르 페트로비치와 결혼하시는 겁니까?”

“제 누이에 관한 질문은 모두 삼가고, 이름도 입에 올리지 않으실 수 없습니까? 당신이 정말 스비드리가일로프라면, 제 앞에서 감히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부터가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바로 그분 이야기를 하러 왔는데, 어떻게 이름을 빼놓습니까?”

“좋습니다. 말씀하세요. 하지만 빨리요!”

“제 아내 쪽 친척인 그 루진 씨를 반시간이라도 만나 보셨거나, 그 사람에 관해 조금이라도 정확하고 틀림없는 이야기를 들으셨다면, 벌써 나름의 판단을 내리셨으리라 확신합니다. 아브도티야 로마노브나에게 맞는 짝이 아닙니다. 제 생각에 아브도티야 로마노브나는 이 일에서 아주 너그럽고 앞뒤를 헤아리지 않은 채 자신을 희생하고 있습니다. 그… 가족을 위해서요. 선생에 관해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가족의 이익을 해치지 않고 이 결혼을 깨뜨릴 수 있다면 선생 쪽에서도 아주 기뻐하시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직접 뵙고 나니 확신하게 되는군요.”

“참 순진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실례했습니다. 뻔뻔하다고 하려던 겁니다.”

라스콜니코프가 말했다.

“그러니까 제가 제 주머니를 위해 뛰어다닌다는 뜻이군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로디온 로마노비치. 제 이익을 위해서라면 이렇게 곧장 털어놓지는 않았을 겁니다. 저도 아주 바보는 아니니까요. 그 점에 관해 심리적으로 이상한 사실 하나를 말씀드리지요. 아까 아브도티야 로마노브나에 대한 사랑을 변명하면서 저 자신도 희생자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알아 두십시오. 지금은 아무런 사랑도 느끼지 않습니다. 전혀요. 저 자신에게도 이상합니다. 실제로 무언가 느끼고 있었으니까요…”

“게으름과 방탕 때문에 그랬겠지요.”

라스콜니코프가 말을 잘랐다.

“실제로 저는 방탕하고 게으른 사람입니다. 하지만 누이동생에게는 장점이 그렇게 많으니, 저도 얼마간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저 자신도 알지만, 모두 하찮은 일이었지요.”

“그걸 안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조짐은 그전부터 느꼈고, 완전히 확신한 것은 그저께, 거의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는 순간이었습니다. 하긴 모스크바에 있을 때만 해도 아브도티야 로마노브나에게 청혼하고 루진 씨와 경쟁하러 가는 줄 알았어요.”

“말씀을 끊어서 죄송하지만, 제발 좀 줄이고 곧장 찾아오신 목적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저는 바쁩니다. 나가야 해요…”

“기꺼이 그러지요. 여기 도착한 뒤 이제 어떤…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먹고, 그 전에 필요한 정리를 해 두고 싶었습니다. 아이들은 친척 아주머니에게 남겨 두었어요. 부유하고, 저 개인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무슨 아비 노릇을 하겠습니까! 저는 일 년 전 마르파 페트로브나가 선물한 것만 가져왔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해요. 실례했습니다. 지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어쩌면 이루어질지도 모르는 그 여행을 떠나기 전에, 루진 씨와의 일도 끝내고 싶어요. 그를 아주 못 견디게 싫어해서라기보다는, 그 사람 때문에 마르파 페트로브나와 다투게 되었거든요. 아내가 이 결혼을 꾸며 냈다는 것을 알고서 말이지요. 저는 이제 선생의 중개로 아브도티야 로마노브나를 만나고 싶습니다. 원하신다면 선생이 함께 계신 자리에서, 첫째로 루진 씨에게서는 조금의 이익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분명히 손해를 입게 되리라는 것을 설명하고 싶어요. 그러고는 최근의 그 모든 불쾌한 일에 대해 용서를 구한 뒤, 만 루블을 드릴 수 있도록 허락을 청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해서 루진 씨와 갈라서는 일을 쉽게 만들어 드리는 것이지요. 기회만 생긴다면 본인도 그 결별을 마다하지 않으리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정말, 정말 미친 사람이군요!”

라스콜니코프가 화가 났다기보다는 놀라서 외쳤다.

“감히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소리 지르실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첫째로, 저는 부자는 아니어도 그 만 루블은 여윳돈입니다. 그러니까 제게는 전혀, 전혀 필요하지 않아요. 아브도티야 로마노브나가 받지 않으시면 어쩌면 더 어리석은 데 써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입니다. 둘째로, 제 양심은 완전히 편안합니다. 아무런 계산 없이 드리는 제안이에요. 믿든 안 믿든, 나중에는 선생도 아브도티야 로마노브나도 알게 되실 겁니다.

문제는 제가 존경하는 누이동생께 실제로 얼마간의 번거로움과 불쾌함을 끼쳤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뉘우치며 마음 깊이 바라는 것이지요. 돈으로 벗어나거나 불쾌한 일의 값을 치르려는 게 아니라, 그저 그분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해 드리고 싶다는 것입니다. 제가 악한 일만 할 특권을 받은 것은 아니잖습니까. 제 제안에 백만분의 일이라도 속셈이 있다면 이렇게 곧장 말하지 않았을 겁니다. 또 만 루블만 드리겠다고 하지도 않았겠지요. 불과 오 주 전에는 그보다 더 많이 드리겠다고 했으니까요. 게다가 저는 아주, 아주 가까운 시일 안에 어느 처녀와 결혼할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아브도티야 로마노브나에게 무슨 수작을 부릴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그 자체로 사라져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리자면, 아브도티야 로마노브나가 루진 씨와 결혼하는 것도 결국 같은 돈을 받는 일입니다. 다만 다른 쪽에서 받는 것뿐이지요… 화내지 마세요, 로디온 로마노비치. 차분하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그 말을 하는 스비드리가일로프 자신은 더없이 냉정하고 차분했다.

“그만하시기 바랍니다.”

라스콜니코프가 말했다.

“어찌 되었든 용서할 수 없을 만큼 무례한 말씀입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악한 일만 할 수 있고, 하찮은 관습상의 형식 때문에 조금의 선행도 할 권리가 없다는 말이 되지요. 터무니없습니다. 이를테면 제가 죽어서 유언으로 그 돈을 누이동생께 남긴다고 합시다. 그래도 받지 않겠다고 하실까요?”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건 아닐 겁니다. 하긴 싫다면 싫은 거지요. 그렇게 합시다. 다만 만 루블은 경우에 따라서는 아주 좋은 물건입니다. 어쨌든 말씀드린 내용을 아브도티야 로마노브나께 전해 주십시오.”

“아니요, 전하지 않겠습니다.”

“그렇다면 로디온 로마노비치, 제가 직접 만나려고 애쓸 수밖에 없겠군요. 결국 귀찮게 해 드리게 되겠지요.”

“제가 전하면 직접 만나려고 애쓰지는 않겠습니까?”

“정말이지,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한 번은 꼭 만나고 싶습니다.”

“기대하지 마십시오.”

“아쉽군요. 하지만 선생은 저를 모르십니다. 어쩌면 우리 더 가까워질지도 모르지요.”

“우리가 더 가까워질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안 될 이유가 있나요?”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웃으며 일어나 모자를 들었다.

“저도 선생을 그렇게까지 귀찮게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닙니다. 여기 올 때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어요. 하긴 오늘 아침부터 선생의 얼굴이 제게 깊은 인상을 주기는 했습니다만…”

“오늘 아침 어디서 저를 보셨습니까?”

라스콜니코프가 불안하게 물었다.

“우연히요… 선생에게는 자꾸 저와 맞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저는 성가신 사람이 아닙니다. 사기 도박꾼들과도 잘 지냈고, 제 먼 친척이며 고관인 스비르베이 공작도 귀찮게 하지 않았어요. 프릴루코바 부인의 기념첩에는 라파엘로의 성모상에 관한 글도 써 넣을 줄 알았고, 마르파 페트로브나와는 칠 년을 꼼짝 않고 함께 살았지요. 옛날에는 센나야의 뱌젬스키 집에서 밤을 지새운 적도 있고, 어쩌면 베르크와 함께 기구를 타고 날아갈지도 모르고요.”

“좋습니다. 한 가지 여쭤보지요. 여행은 곧 떠나십니까?”

“무슨 여행요?”

“그 「여행」 말입니다… 직접 말씀하셨잖습니까.”

“여행이라고요? 아, 그렇지!.. 정말 제가 여행 이야기를 했군요… 자, 그건 큰 문제입니다… 하지만 선생이 지금 무엇을 묻고 있는지 아신다면!”

그는 덧붙이고는 갑자기 크고 짧게 웃었다.

“어쩌면 여행 대신 결혼을 할지도 모릅니다. 신붓감을 중매해 주고 있거든요.”

“여기서요?”

“네.”

“어느새 그런 일까지 하셨습니까?”

“하지만 아브도티야 로마노브나는 한 번 꼭 뵙고 싶습니다. 진지하게 부탁드립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아, 맞다! 이걸 잊었군요! 로디온 로마노비치, 마르파 페트로브나의 유언에 누이동생 몫으로 삼천 루블이 들어 있다고 전해 주십시오.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마르파 페트로브나가 죽기 일주일 전에 정했고, 제가 있는 자리에서 처리한 일입니다. 이삼 주쯤 지나면 아브도티야 로마노브나가 돈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사실입니까?”

“사실입니다. 전해 주세요.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저는 여기서 아주 멀지 않은 곳에 묵고 있습니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나가다가 문에서 라주미힌과 마주쳤다.

작품 해설과 번역 노트

윤문 노트

  • 스비드리가일로프의 아내에 대한 폭력과 그 변명은 인물의 발언으로 옮겼다. 이를 서술자의 견해로 바꾸거나 옹호하는 설명을 보태지 않았다.
  • 「유령이 나타나는가」와 「유령이 존재하는가」를 구별했다. 그가 내세와 질병을 연결하는 논리는 인물의 주장으로 그대로 두었다.
  • 삼만·칠만·만·삼천의 금액, 일곱 해·오 주·일주일·이삼 주의 시간 관계를 구별했다. 증서의 반환과 새로 제안하는 돈, 유언으로 남긴 돈은 서로 다른 사건이다.
  • 여행의 의미를 앞질러 풀이하지 않았다. 처음의 여행 계획과 마지막에 되묻는 「무슨 여행요?」 사이의 간극을 남겼다.
  • 원문에 삽입된 라틴어·프랑스어는 문맥에 맞게 우리말로 옮기고 아래에 원어를 기록했다. 생각과 독백에는 작은따옴표를 썼다.
  • 제삼자 교차 검수, 음독, 대명사 밀도 수치 측정은 미실시다.

  • 인간적인 것이라면 그 무엇도…: 원문의 et nihil humanum.... 제공 저본의 주는 「그리고 인간적인 것은 아무것도」라는 뜻을 설명한다. 인물이 인용을 끝맺지 않는 상태를 유지했다.
  • 정당한 싸움: 원문의 프랑스어 bonne guerre. 자기의 잔꾀를 정당화하며 쓰는 말이다.
  • 술버릇이 고약해서: 원문의 j'ai le vin mauvais.
  • 선생 비위를 맞추자면요: 원문의 pour vous plaire.
  • 영명 축일: 원문의 именины. 생일과 구별해 옮겼다.
  • 「『베크』의 추잡한 행위」: 제공 저본의 «Безобразный поступок Века». 뒤이어 「이집트의 밤」 공개 낭독을 떠올리는 대목이다. 사건의 구체적인 경위는 본문 밖에서 새로 덧붙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