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 죄와 벌 · 1866

제1부 제3장

어머니의 편지를 읽는 라스콜니코프에게 두냐의 희생이 무겁게 다가온다.
어머니의 편지를 읽는 라스콜니코프에게 두냐의 희생이 무겁게 다가온다.

이튿날 그는 이미 늦은 시각에, 뒤숭숭한 잠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잠은 그에게 기운을 주지 못했다. 깨어나 보니 속이 쓰리고 신경이 곤두서고 심사가 사나웠으며, 그는 제 골방을 증오에 차서 둘러보았다. 여섯 걸음 남짓 길이의 조그만 우리 같은 방이었는데, 누렇고 먼지투성이에 사방이 벽에서 떨어져 나온 벽지 때문에 더없이 초라해 보였고, 천장이 어찌나 낮은지 조금만 키가 큰 사람이면 섬뜩해져서 금방이라도 머리를 부딪칠 것만 같았다. 가구도 방에 어울렸다. 성한 데가 남아나지 않은 낡은 의자 셋, 구석에 놓인 칠한 탁자 하나, 그 위에 공책과 책이 몇 권 놓여 있었는데 먼지가 앉은 꼴만 보아도 벌써 오래전부터 아무 손도 닿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벽을 거의 다 차지하고 방 너비의 절반까지 뻗은 볼품없이 큰 소파가 있었다. 한때는 사라사를 씌웠으나 이제는 누더기가 되었고, 라스콜니코프의 잠자리 노릇을 했다. 그는 자주 그 위에서 입은 채로, 홑이불도 없이, 낡고 삭은 학생 외투를 덮고, 머리맡에는 작은 베개 하나만 놓고 잤다. 베개 밑에는 깨끗한 것이든 입던 것이든 가진 속옷을 죄다 밀어 넣어 머리맡을 조금이라도 높였다. 소파 앞에는 작은 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이보다 더 내려앉고 더 너절해지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지금의 마음 상태에서 라스콜니코프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편안하기까지 했다. 그는 거북이가 제 껍데기 속으로 들어가듯 모두에게서 단호히 물러나 있었고, 그의 시중을 들어야 해서 이따금 방을 들여다보는 하녀의 얼굴조차 그의 속을 뒤집고 경련을 일으켰다. 무언가에 지나치게 골몰한 편집증 환자들에게 흔히 있는 일이다. 주인 여자는 두 주일째 그에게 음식을 올려 보내지 않고 있었고, 그는 점심을 굶으면서도 아직 내려가 사정을 이야기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주인집의 부엌일꾼이자 하나뿐인 하녀인 나스타시야는 하숙인의 그런 기분이 얼마쯤 반갑기도 해서 그의 방을 치우고 쓰는 일을 아주 그만두었고, 일주일에 한 번쯤 어쩌다 생각나면 빗자루를 들었다. 지금 그를 깨운 것도 그 여자였다.

“일어나, 뭘 자고 있어!”

그 여자가 그의 머리맡에서 소리쳤다.

“아홉 시가 넘었어. 차 가져왔어. 차 마실 테야? 쫄쫄 굶은 꼴이구먼?”

하숙인은 눈을 뜨고 흠칫하더니 나스타시야를 알아보았다.

“차라니, 주인아주머니가 보낸 거요?”

그는 괴로운 낯으로 천천히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주인아주머니는 무슨!”

그 여자는 이미 우려 먹고 남은 차가 든 제 금 간 찻주전자를 그의 앞에 놓고 누런 설탕 두 조각을 곁들였다.

“나스타시야, 자, 이거 받아요.”

그는 주머니를 뒤적여 (그는 옷을 입은 채로 잤다) 동전 한 줌을 꺼내며 말했다.

“가서 흰 빵 좀 사다 줘요. 그리고 순댓집에서 순대도 조금, 싼 걸로.”

“흰 빵은 이 자리에서 가져다주지. 그런데 순대 말고 시치는 어때? 좋은 시치야, 어제 거. 어제 남겨 뒀는데 자네가 늦게 왔지. 좋은 시치야.”

시치를 가져와 그가 먹기 시작하자 나스타시야는 그의 곁 소파에 앉아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시골 아낙이었고 말이 몹시 많은 여자였다.

“프라스코비야 파블로브나가 자네를 경찰에 일러바치겠다더군.”

그 여자가 말했다.

그는 심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경찰에? 나한테 뭘 어쩌자고?”

“돈은 안 내지, 방은 안 비우지. 뻔한 노릇 아닌가.”

“에잇, 그것까지 모자랄 게 뭐람.”

그는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아니, 그건 지금 나한테…… 때가 나쁘다. 멍청한 여자로군.”

그가 소리 내어 덧붙였다.

“내 오늘 내려가서 이야기하지.”

“멍청하기야 멍청하지, 나만큼이나. 그런데 자네는, 똑똑한 양반이 자루처럼 누워만 있으면서 뭐 하나 내보이는 게 있나? 전에는 애들 가르치러 다닌다더니 지금은 왜 아무것도 안 해?”

“하고 있소……”

라스콜니코프가 마지못해 무뚝뚝하게 말했다.

“뭘 하는데?”

“일……”

“무슨 일?”

“생각하는 일이오.”

잠시 잠자코 있다가 그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나스타시야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며 자지러졌다. 잘 웃는 여자여서, 한번 웃기면 소리도 내지 않고 온몸을 출렁이며 떨다가 저 스스로 속이 메슥거릴 지경이 되어서야 멈추었다.

“그래 돈은 많이 생각해 냈나?”

마침내 그 여자가 겨우 말을 뱉었다.

“장화가 없으면 애들을 못 가르쳐요. 그리고 그딴 건 아무래도 좋소.”

“우물에 침은 뱉지 말게.”

“애들 가르치면 동전이나 쥐여 주지. 코페이카로 뭘 하겠소?”

제 생각에 대답하듯 그가 마지못해 말을 이었다.

“그럼 자네는 단번에 밑천을 몽땅 쥐겠다는 건가?”

그는 야릇하게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렇소, 밑천을 몽땅.”

잠시 잠자코 있다가 그가 단단히 대답했다.

“어이구, 조금씩 하게, 안 그러면 사람 겁주겠네. 무서워서 원. 흰 빵은 사러 가, 말아?”

“마음대로.”

“아 참, 잊었네! 자네한테 어제 자네 없을 때 편지가 왔어.”

“편지! 나한테! 누구한테서?”

“누군지 내가 아나. 우편배달부한테 내 돈으로 삼 코페이카 줬어. 갚을 텐가?”

“그럼 가져와요, 제발, 가져와!”

라스콜니코프가 온통 흥분해서 소리쳤다.

“맙소사!”

잠시 뒤 편지가 나타났다. 과연 그랬다. 어머니가 R 현에서 보낸 것이었다. 그는 편지를 받아 들면서 얼굴이 창백해지기까지 했다. 편지를 받아 본 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와 다른 무언가가 문득 그의 가슴을 죄었다.

“나스타시야, 나가 줘요, 제발. 자, 삼 코페이카, 그러니 제발 빨리 나가 줘요!”

편지가 그의 손안에서 떨렸다. 그는 그 여자 앞에서 뜯고 싶지 않았다. 이 편지와 단둘이 있고 싶었다. 나스타시야가 나가자 그는 편지를 재빨리 입술에 가져다 대고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겉봉의 글씨를, 언젠가 자기에게 읽기와 쓰기를 가르쳐 준 어머니의, 그에게 낯익고 정다운 잘고 비스듬한 글씨를 한참이나 더 들여다보았다. 그는 꾸물거렸다.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것 같기까지 했다. 마침내 뜯었다. 크고 두툼한, 두 로트는 되는 편지였다. 커다란 편지지 두 장에 빼곡히 잘게 적혀 있었다.

'사랑하는 내 로쟈.' 어머니는 썼다. '너와 편지로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지 벌써 두 달이 넘었구나. 그 일로 나 자신이 괴로웠고 어떤 밤에는 생각하느라 잠을 이루지도 못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었던 이 침묵을 두고 너는 나를 탓하지 않겠지.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너는 안다. 너는 우리에게, 나와 두냐에게 하나뿐인 사람이고, 너는 우리의 전부이고 희망의 전부이고 우리의 기댈 곳이다. 네가 스스로를 건사할 것이 없어 몇 달 전에 이미 대학을 그만두었고 과외며 다른 벌이가 다 끊겼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내 마음이 어떠했겠니! 한 해 백이십 루블 연금을 가지고 내가 너를 어떻게 도울 수 있었겠느냐? 넉 달 전에 보낸 십오 루블도, 너도 알다시피 바로 그 연금을 담보로 이곳 상인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바흐루신에게 꾸었던 것이다. 좋은 사람이고 네 아버지의 벗이기도 했지. 그런데 내 연금을 대신 받을 권리를 그에게 준 터라 빚이 다 갚아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고, 그것이 이제야 겨우 끝났다. 그래서 그동안 아무것도 보내 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하느님 덕분에, 또 보내 줄 수 있을 듯하고, 대체로 우리는 이제 운을 자랑해도 될 만해졌다. 그 이야기를 서둘러 알리려고 한다.

우선, 사랑하는 로쟈, 네 누이가 벌써 한 달 반째 나와 함께 지내고 있고 앞으로도 우리가 다시는 떨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너는 짐작이나 하겠니?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 아이의 시달림은 끝났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우리가 지금까지 너에게 무엇을 감추고 있었는지 네가 알 수 있도록 차례대로 다 이야기하마. 두 달 전에 네가, 두냐가 스비드리가일로프 씨 댁에서 모진 대접을 많이 받는다는 말을 누구에게 들었다며 나에게 정확한 사정을 물어 왔을 때, 내가 답장으로 무엇을 쓸 수 있었겠니? 사실을 다 썼더라면 너는 아마 모든 것을 내던지고 걸어서라도 우리에게 왔을 것이다. 나는 네 성격도 마음도 알고 있고, 너는 누이가 모욕당하는 것을 두고 보지 않았을 테니까. 나 자신도 절망하고 있었다만 어쩌겠느냐? 게다가 나도 그때는 사실을 다 알지 못했다. 무엇보다 어려웠던 것은, 두네치카가 지난해 그 댁에 가정교사로 들어가면서 급료에서 다달이 떼는 조건으로 백 루블을 미리 받았고, 따라서 빚을 갚지 않고는 자리를 그만둘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 돈도 (이제는 다 이야기할 수 있겠구나, 더없이 귀한 로쟈) 그 아이가 주로 너에게 육십 루블을 보내 주려고 받은 것이었다. 그때 네가 그렇게나 아쉬워하던, 그리고 지난해에 우리에게서 받은 그 돈 말이다. 우리는 그때 너를 속이고 두네치카가 전에 모아 둔 돈이라고 썼지만 그렇지 않았다. 이제 사실을 다 알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으로 모든 것이 갑자기 좋은 쪽으로 달라졌기 때문이고, 두냐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아이의 마음이 얼마나 값진지 네가 알기를 바라서다.

과연 스비드리가일로프 씨는 처음에는 그 아이를 몹시 거칠게 대했고 식탁에서 이런저런 무례와 조롱을 했다…… 그러나 이제 다 끝난 일을 두고 공연히 너를 뒤흔들고 싶지 않으니 그 괴로운 자질구레한 것들까지 늘어놓지는 않으마. 간단히 말해서, 스비드리가일로프 씨의 부인인 마르파 페트로브나와 온 집안사람들이 착하고 점잖게 대해 주었는데도 두네치카는 몹시 힘들었다. 특히 스비드리가일로프 씨가 옛 연대 시절 버릇대로 술기운에 사로잡혀 있을 때가 그랬지. 그런데 나중에 무엇이 드러났는지 아니? 생각해 보아라, 이 분별없는 사람이 진작부터 두냐에게 마음을 품고 있었으면서 그것을 줄곧 거칠음과 멸시로 감추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제 나이와 제가 한 집안의 아비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경솔한 바람을 품은 자신이 부끄럽고 두려워서 두냐에게 저도 모르게 화를 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거친 대접과 조롱으로 다른 사람들에게서 진실을 가리려 했는지도 모르지. 그러나 끝내 참지 못하고 감히 두냐에게 드러내 놓고 더러운 제안을 했다. 이런저런 보답을 약속하면서, 그뿐 아니라 모든 것을 버리고 그 아이와 함께 다른 시골로, 아니면 외국으로 떠나겠다고 했다는구나. 그 아이의 괴로움이 어떠했을지 짐작해 보아라! 당장 자리를 그만둘 수는 없었다. 빚 때문만이 아니라 마르파 페트로브나를 생각해서였다. 그 부인이 문득 의심을 품을 수 있었고, 그렇게 되면 그 집안에 불화를 심는 셈이 될 테니까. 두네치카에게도 큰 추문이 되었을 것이고, 그냥 넘어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른 여러 사정도 있어서, 두냐는 여섯 주 안에는 그 무서운 집에서 빠져나올 길이 없었다. 너도 물론 두냐를 알지, 그 아이가 얼마나 슬기롭고 얼마나 굳은 성격인지. 두네치카는 많은 것을 견딜 수 있고, 아주 막다른 경우에도 굳셈을 잃지 않을 만큼의 너그러움을 제 안에서 찾아내는 아이다. 나를 심란하게 하지 않으려고 나에게조차 다 써 보내지 않았다. 우리는 자주 소식을 주고받았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끝맺음은 뜻밖에 찾아왔다. 마르파 페트로브나가 남편이 뜰에서 두네치카에게 애원하는 것을 어쩌다 엿듣고는 모든 것을 거꾸로 알아들어 도리어 그 아이를 탓했다. 그 아이가 모든 일의 씨앗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 자리에서, 뜰에서 무서운 장면이 벌어졌다. 마르파 페트로브나는 두냐를 때리기까지 했고 아무 말도 들으려 하지 않았으며, 저 혼자 한 시간이나 소리를 지르다가 마침내 두냐를 당장 시내의 나에게 데려다주라고 일렀다. 그냥 농사꾼 짐수레에 태워서, 그 아이 물건이며 속옷이며 옷가지를 되는대로 묶지도 싸지도 않고 던져 넣은 채로 말이다. 게다가 그때 억수 같은 비가 쏟아졌고, 모욕당하고 욕을 뒤집어쓴 두냐는 뚜껑도 없는 짐수레를 타고 농부와 함께 꼬박 십칠 베르스타를 와야 했다. 자 이제 생각해 보아라. 두 달 전에 받은 네 편지에 내가 무엇을 써 보낼 수 있었겠으며 무엇을 쓸 수 있었겠니? 나 자신이 절망에 빠져 있었다. 사실대로 쓸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은 네가 몹시 불행해하고 상심하고 분개했을 것이기 때문이고, 또 네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느냐? 자칫 너 자신을 망쳤을지도 모르고, 게다가 두네치카가 금했다. 그렇다고 마음에 그런 슬픔이 있는데 편지를 시시한 것들로 채울 수도 없었다.

한 달 내내 온 시내에 이 일에 관한 소문이 돌았고, 급기야 두냐와 함께 성당에 가는 것조차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멸시하는 눈길과 수군거림 때문이었고, 우리 앞에서 대놓고 떠드는 일까지 있었다. 아는 사람들이 다 우리에게서 물러났고, 인사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상점 점원들과 관청 서기 몇이 우리 집 대문에 타르를 칠하는 저열한 모욕을 주려 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는데, 그래서 집주인들이 우리더러 방을 비우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일의 원인은 마르파 페트로브나였다. 그 부인이 집집마다 다니며 두냐를 탓하고 더럽혀 놓았던 것이다. 우리 쪽 사람들과 다 아는 사이인 데다 그달에는 시도 때도 없이 시내로 나왔고, 말이 조금 많은 편이어서 제 집안일을 이야기하기를, 특히 남편을 두고 아무에게나 하소연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 그것은 아주 좋지 않은 일이지 — 짧은 사이에 온 이야기를 시내뿐 아니라 군 전체에 퍼뜨려 놓았다. 나는 앓아누웠고, 두네치카가 나보다 굳세었다. 그 아이가 그 모든 것을 어떻게 견뎌 내고 도리어 나를 달래고 기운을 북돋우었는지 네가 보았더라면! 그 아이는 천사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로 우리의 괴로움은 짧아졌다. 스비드리가일로프 씨가 정신을 차리고 뉘우쳤으며, 아마 두냐가 가엾어서였겠지만, 두네치카가 아무 잘못이 없다는 온전하고 명백한 증거를 마르파 페트로브나에게 내놓았다. 다름이 아니라 편지 한 통이었다. 마르파 페트로브나가 뜰에서 두 사람을 맞닥뜨리기 전에, 그가 고집하는 사사로운 해명과 은밀한 만남을 물리치려고 두냐가 어쩔 수 없이 써서 건넸던 편지인데, 두네치카가 떠난 뒤에도 스비드리가일로프 씨의 손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 편지에서 그 아이는 더없이 뜨겁게, 온전한 분노로, 바로 마르파 페트로브나에 대한 그의 처신이 고결하지 못하다고 그를 나무랐고, 그가 한 집안의 아비라는 것을 일깨웠으며, 끝으로 이미 불행하고 몸 붙일 데 없는 처녀를 괴롭히고 더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얼마나 더러운 일인지를 짚었다. 한마디로, 사랑하는 로쟈, 그 편지가 어찌나 고결하고 마음을 울리게 쓰였던지 나는 읽으며 흐느꼈고 지금도 눈물 없이는 읽지 못한다. 게다가 두냐를 밝히는 데에는 하인들의 증언까지 마침내 나섰다. 늘 그렇듯 하인들은 스비드리가일로프 씨 자신이 짐작한 것보다 훨씬 많이 보고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마르파 페트로브나는 완전히 넋이 나갔고, 제 입으로 우리에게 털어놓은 대로 '다시 한번 죽었다'. 그러나 그 대신 두네치카의 결백을 온전히 믿게 되어, 바로 다음 날인 일요일에 곧장 대성당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눈물로 성모께 이 새로운 시련을 견딜 힘과 제 도리를 다할 힘을 달라고 빌었다. 그러고는 대성당에서 곧장, 아무 데도 들르지 않고 우리에게 와서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쓰디쓰게 울며 온전히 뉘우치면서 두냐를 끌어안고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그리고 그날 아침에 조금도 미루지 않고 우리 집에서 곧장 시내의 집집마다 돌며, 어디서나 두네치카에게 더없이 좋은 말로, 눈물을 흘리며 그 아이의 결백과 마음과 처신의 고결함을 되세워 주었다. 그뿐 아니라 두네치카가 스비드리가일로프 씨에게 손수 쓴 편지를 모두에게 보이고 소리 내어 읽어 주었으며 베껴 가도록까지 했다 (그것은 이미 지나친 일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하여 며칠씩 잇달아 시내를 다 돌아야 했는데, 남들이 먼저 대접받았다고 서운해하는 이들이 생겨 차례가 매겨지기까지 했고, 어느 집에서는 미리 기다리면서 아무 날에 마르파 페트로브나가 어디서 그 편지를 읽으리라는 것을 다들 알고 있었으며, 읽을 때마다 제 집에서 또 다른 아는 집에서 이미 여러 번 들은 이들까지 차례로 모여들었다. 내 생각에 여기에는 지나친 것이, 아주 지나친 것이 많았다. 그러나 마르파 페트로브나가 그런 성품인 것을. 어쨌든 그 부인은 두네치카의 명예를 온전히 되세워 주었고, 이 일의 모든 추함은 으뜸가는 죄인인 제 남편에게 지워지지 않는 치욕으로 내려앉았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이 가엾기까지 하다. 그 분별없는 사람을 너무 모질게 다루었어.

두냐는 곧 몇몇 집에서 가르쳐 달라는 청을 받았으나 거절했다. 대체로 사람들이 갑자기 그 아이를 각별히 우러르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이제 우리 운명 전체가 달라지게 되었다고 할 만한 그 뜻밖의 일에도 무엇보다 큰 힘이 되었다. 알아 두어라, 사랑하는 로쟈. 두냐에게 청혼한 사람이 있고 그 아이가 이미 승낙했다는 것을. 서둘러 너에게 알린다. 이 일이 네 의견을 듣지 않고 이루어졌지만 너는 아마 나에게도 누이에게도 서운해하지 않을 것이다. 네 답장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미루기가 우리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음을 너도 일의 내용을 보면 알 테니까. 게다가 너도 멀리서 모든 것을 정확히 헤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일은 이렇게 되었다. 그 사람은 이미 7등 문관인 표트르 페트로비치 루신이고 마르파 페트로브나의 먼 친척인데, 그 부인이 여기에 많은 힘을 썼다. 그 부인을 통해 우리와 알고 지내고 싶다는 뜻을 밝힌 것이 시작이었고, 격식대로 맞아들여 커피를 대접했더니 바로 다음 날 편지를 보내 아주 정중하게 청혼의 뜻을 밝히고 빠르고 분명한 대답을 청해 왔다. 일에 밝고 바쁜 사람이라 지금 페테르부르크로 서두르고 있어서 한 시간 한 시간을 아끼는 처지다. 물론 우리는 처음에 몹시 놀랐다. 이 모든 것이 너무 빠르고 뜻밖이었으니까. 그날 하루 내내 둘이서 헤아리고 또 생각했다. 믿을 만하고 살림이 넉넉한 사람으로 두 군데에서 일하고 제 밑천도 이미 있다. 사실 나이가 벌써 마흔다섯이지만 생김이 꽤 마음에 들고 아직도 여자들 마음에 들 만하며, 대체로 아주 든든하고 반듯한 사람이다. 다만 조금 침울하고 어딘가 거만해 보이는 데가 있지.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첫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미리 일러두마, 사랑하는 로쟈, 곧 페테르부르크에서 그를 만나게 될 텐데, 첫눈에 그에게서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너답게 너무 빠르고 뜨겁게 판단하지 말아라. 만일을 위해 하는 말이고, 그가 너에게 좋은 인상을 주리라고 나는 믿는다. 게다가 어떤 사람이든 알아보려면 차츰차츰 조심스럽게 대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잘못과 선입견에 빠지는데, 그것은 나중에 고치고 지우기가 몹시 어려우니까.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적어도 여러 가지로 보아 아주 존경할 만한 사람이다. 첫 방문에서 그는 자기가 실질을 따지는 사람이지만 많은 점에서, 제 말대로 하자면 '우리 최신 세대의 신념'을 함께하며 온갖 편견의 적이라고 밝혔다. 그 밖에도 많은 말을 했는데, 어딘가 자부심이 조금 있고 남이 제 말을 들어 주는 것을 아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야 거의 흠이라 할 수도 없겠지. 나야 물론 잘 알아듣지 못했다만, 두냐가 설명하기를 배움이 많지는 않아도 슬기롭고 착한 사람인 듯하다고 했다.

너는 네 누이의 성품을 알지, 로쟈. 굳세고 분별 있고 참을성 있고 너그러운 처녀이며, 다만 마음이 뜨겁다는 것을 나는 그 아이에게서 잘 보아 왔다. 물론 그 아이 쪽에도 그 사람 쪽에도 각별한 사랑은 없다. 그러나 두냐는 슬기로운 처녀인 데다 천사 같은 고결한 사람이라, 남편의 행복을 이루어 주는 것을 제 도리로 삼을 것이고, 남편 또한 그 아이의 행복을 돌보게 될 것이다. 뒤의 일은 아직 크게 의심할 까닭이 없다. 솔직히 말해 일이 좀 빠르게 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게다가 그는 셈이 아주 밝은 사람이니, 두네치카가 곁에서 행복할수록 제 부부의 행복도 그만큼 더 확실해지리라는 것을 스스로 알 것이다. 성격이 서로 고르지 않은 데가 있다거나 오래된 버릇이 있다거나 생각이 얼마쯤 어긋난다거나 하는 것은 (더없이 행복한 부부라도 피할 수 없는 일이지) 두네치카가 나에게 스스로 말하기를 자기를 믿는다고, 걱정할 것이 없다고, 앞으로의 사이가 정직하고 올바르기만 하다면 많은 것을 견딜 수 있다고 했다.

이를테면 나에게도 그는 처음에 어딘가 모진 사람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그가 곧은 사람이기 때문일 수 있고,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예컨대 두 번째 방문 때, 이미 승낙을 받은 뒤에 이야기 가운데 이런 말을 했다. 두냐를 알기 전부터 이미 정직하되 지참금 없는 처녀를, 그것도 반드시 곤궁을 겪어 본 처녀를 맞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고. 그 까닭은, 그의 설명으로는, 남편이 아내에게 무엇을 빚져서는 안 되며 아내가 남편을 제 은인으로 여기는 편이 훨씬 낫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덧붙이자면 내가 쓴 것보다는 그가 조금 더 부드럽고 상냥하게 말했다. 정확한 표현을 잊어버리고 뜻만 기억하고 있어서다. 게다가 그것은 결코 미리 작정하고 한 말이 아니라 이야기에 열이 올라 그만 나온 말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뒤에 고쳐 말하고 누그러뜨리려 애쓰기까지 했으니까. 그래도 나에게는 그것이 조금 모질게 들려서 나중에 두냐에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두냐는 언짢은 듯이 '말이 아직 행동은 아니에요'라고 대답했고, 그것은 물론 옳은 말이다. 마음을 정하기 전날 밤에 두네치카는 한숨도 자지 못했고, 내가 이미 잠든 줄 알고 침대에서 일어나 밤새도록 방 안을 오갔다. 마침내 무릎을 꿇고 성상 앞에서 오래 뜨겁게 기도하더니 아침에 나에게 마음을 정했다고 알렸다.

이미 말한 대로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이제 페테르부르크로 떠난다. 거기에 큰 일거리가 있고 페테르부르크에서 변호사 사무소를 열려고 한다. 오래전부터 온갖 소송과 송사를 맡아 왔고 요 며칠 사이에도 제법 큰 송사를 하나 이겼다. 게다가 상원에 걸린 중요한 일이 하나 있어서 페테르부르크에 꼭 가야 한다. 그러니 사랑하는 로쟈, 그가 너에게도 아주 쓸모 있을 수 있다, 모든 면에서 말이다. 나와 두냐는 네가 바로 오늘부터라도 장래의 길을 뚜렷이 시작하고 네 앞날이 이미 분명해졌다고 여길 수 있으리라고 마음을 모았다. 오, 그렇게만 된다면! 그것은 어찌나 큰 이득인지 전능하신 분이 우리에게 곧바로 베푸신 은혜라고밖에 여길 수 없을 것이다. 두냐는 오직 그 꿈만 꾸고 있다. 우리는 이미 그 이야기를 표트르 페트로비치에게 몇 마디 꺼내 보기까지 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골라, 물론 서기 없이는 일을 할 수 없으니 남보다야 친척에게 급료를 주는 편이 낫겠지만 그 사람이 그 자리에 맞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했다 (네가 맞지 않을 리가 있겠느냐!). 그러면서도 곧바로 네 대학 공부가 제 사무소 일을 볼 틈을 남겨 주지 않으리라는 의심도 내비쳤다. 그때는 그것으로 이야기가 끝났지만 두냐는 요즘 그 생각밖에 하지 않는다. 며칠째 그저 열에 들뜬 사람 같고, 나중에 네가 표트르 페트로비치의 송사 일에 동료가, 나아가 동업자가 될 수 있으리라는 계획까지 통째로 세워 놓았다. 더구나 너 자신이 법학부에 있으니 말이다.

로쟈, 나도 그 아이와 온전히 뜻이 같고 그 계획과 바람을 다 함께 나눈다. 거기에 충분한 가망이 보이니까. 그리고 표트르 페트로비치가 지금은 얼마쯤 발을 빼는 것도 (아직 너를 모르니까) 아주 당연한 일이지만, 두냐는 장래의 남편에게 제 착한 감화를 미쳐 모든 것을 이루어 내리라고 굳게 믿고 있다. 물론 우리는 이 앞으로의 꿈 가운데 무엇 하나도, 무엇보다 네가 그의 동업자가 되리라는 것을 표트르 페트로비치에게 흘리지 않도록 조심했다. 실질을 따지는 사람이라 아마 아주 쌀쌀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이 그에게는 한낱 꿈으로만 보였을 테니까. 마찬가지로 나도 두냐도, 네가 대학에 다니는 동안 그가 돈으로 너를 도와주리라는 우리의 굳은 바람에 대해서는 아직 반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꺼내지 않은 것은, 첫째로 그 일은 나중에 저절로 그렇게 될 것이고 그가 여러 말 없이 스스로 나서서 말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두네치카에게 그런 것을 거절할 사람이겠느냐). 더구나 네가 그의 사무소에서 오른팔이 될 수 있으니 그 도움을 은혜가 아니라 네가 일해서 받는 급료로 받게 될 테니 더욱 그렇다. 두네치카는 그렇게 해 놓으려 하고 나도 온전히 같은 생각이다. 둘째로 꺼내지 않은 까닭은, 이번에 만나게 될 때 너를 그와 대등한 자리에 세우고 싶은 마음이 각별했기 때문이다. 두냐가 너에 대해 들떠서 이야기하자 그는, 사람은 누구든 먼저 제 눈으로 가까이 보아야 판단할 수 있다고, 너를 알게 된 뒤에 자기 나름의 의견을 세우겠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말이다, 더없이 귀한 내 로쟈, 몇 가지 헤아려 본 끝에 (그것은 결코 표트르 페트로비치와 관계된 것이 아니라 그저 내 나름의, 사사로운, 어쩌면 늙은 여편네의 변덕일지도 모르겠다만) 나는 그들이 혼인한 뒤에도 지금처럼 따로 사는 편이 나을 듯싶다. 그가 고결하고 자상해서 스스로 나를 부르고 이제 딸과 떨어지지 말자고 할 것이 틀림없고, 아직 그 말을 하지 않았다면 그야 말하지 않아도 그러려니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거절하려 한다. 살면서 여러 번 보았는데 장모란 사위의 마음에 그리 드는 법이 아니고, 나는 누구에게든 털끝만치도 짐이 되고 싶지 않을뿐더러 나 자신도 온전히 자유롭고 싶다. 나에게 제 밥벌이가 조금이라도 있고 너와 두네치카 같은 자식이 있는 동안은 말이다. 될 수만 있다면 너희 둘 가까이에 자리를 잡으마.

로쟈, 가장 기쁜 것을 편지 끝에 아껴 두었다. 알아 다오, 사랑하는 내 벗아, 어쩌면 아주 곧 우리가 다시 다 함께 모여 셋이서 얼싸안게 되리라는 것을, 거의 삼 년 만에 말이다! 나와 두냐가 페테르부르크로 떠나는 것은 이미 정해졌다. 언제일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아주, 아주 곧, 어쩌면 일주일 안에 될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표트르 페트로비치의 분부에 달렸는데, 그가 페테르부르크에 닿아 자리를 살피는 대로 바로 알려 주기로 했다. 그는 몇 가지 셈속으로 혼인 예식을 될 수 있는 대로 서두르고 싶어 하며, 될 수만 있다면 이번 육식 기간에 혼례를 치르고 싶어 한다. 기한이 짧아 그러지 못한다면 성모 금식 기간이 끝나는 대로 하겠다고 한다. 오, 어떤 행복으로 너를 내 가슴에 안게 될까!

두냐는 너를 만난다는 기쁨에 온통 들떠 있고, 한번은 농담 삼아 그 하나만으로도 표트르 페트로비치에게 시집가겠다고 했다. 천사 같은 아이다! 지금 너에게 따로 몇 자 적지 않고, 다만 나더러 이렇게 써 달라고 했다. 너와 할 이야기가 너무나 많아서, 너무나 많아서 지금은 펜을 들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고, 몇 줄로는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저만 심란해질 뿐이라고. 대신 너를 꼭 껴안고 셀 수 없이 입 맞춰 달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가 어쩌면 아주 곧 직접 만나게 될 텐데도 나는 며칠 안에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돈을 부치마. 두네치카가 표트르 페트로비치에게 시집간다는 것을 다들 알게 되자 내 신용도 문득 올라서, 아파나시 이바노비치가 이제는 연금을 담보로 칠십오 루블까지도 믿어 주리라는 것을 나는 확실히 안다. 그러니 너에게 이십오 루블쯤, 어쩌면 삼십 루블까지도 보낼 수 있겠구나. 더 보내고 싶다만 길에서 쓸 것이 걱정이다. 표트르 페트로비치가 고맙게도 우리가 수도로 가는 비용의 얼마를 맡아 주어 짐과 큰 궤짝을 제 돈으로 부쳐 주기로 했다만 (아는 사람들을 통해 어떻게 되는 모양이다), 그래도 페테르부르크에 닿는 것을 셈에 넣어야 한다. 적어도 처음 며칠은 한 푼 없이 나설 수 없으니까. 그래도 두네치카와 함께 하나하나 다 셈해 보았더니 길에 드는 것이 얼마 되지 않겠더구나. 우리에게서 철길까지가 겨우 구십 베르스타이고, 만일을 위해 아는 농부 마부와 이야기를 맞춰 두었다. 거기서부터는 두네치카와 나란히 삼등칸을 타고 무사히 가면 된다. 그러니 어쩌면 이십오가 아니라 틀림없이 삼십 루블을 마련해 보내 줄 수 있겠다.

그러나 이만 그치마. 두 장을 빼곡히 채워 더는 자리가 남지 않는구나. 우리 이야기가 통째로 들어갔다. 하기야 일이 얼마나 쌓였느냐! 이제, 더없이 귀한 내 로쟈, 곧 만날 날을 앞두고 너를 껴안으며 어미의 축복으로 너를 축복한다. 두냐를, 네 누이를 사랑해라, 로쟈. 그 아이가 너를 사랑하는 만큼 사랑해 다오. 그리고 알아 다오, 그 아이가 너를 끝없이, 저 자신보다 더 사랑한다는 것을. 그 아이는 천사이고, 로쟈, 너는 우리의 전부다. 우리 희망의 전부이고 기댈 곳의 전부다. 너만 행복하다면 우리도 행복할 것이다. 로쟈, 너는 예전처럼 하느님께 기도하느냐, 그리고 우리를 지으시고 건지신 분의 어지심을 믿느냐? 나는 마음속으로 두렵구나, 요즘 유행하는 새 불신이 너에게도 찾아든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나는 너를 위해 기도하마. 기억하느냐, 얘야, 어릴 적 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네가 내 무릎에서 기도를 더듬더듬 외우던 것을, 그리고 그때 우리 모두가 얼마나 행복했는지를! 잘 있어라, 아니, 더 낫게는, 곧 만나자! 너를 꼭, 꼭 껴안고 셀 수 없이 입 맞춘다.

무덤에 들 때까지 너의 풀헤리야 라스콜니코바.'

라스콜니코프가 읽는 내내, 편지의 첫머리부터 그의 얼굴은 눈물로 젖어 있었다. 그러나 다 읽었을 때 그 얼굴은 창백했고 경련으로 일그러져 있었으며, 무겁고 쓰디쓰고 사나운 웃음이 입술 위로 뱀처럼 기어 다녔다. 그는 여위고 닳아 빠진 제 베개에 머리를 누이고 생각했다, 오래 생각했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고 생각이 세차게 요동쳤다. 마침내 그는 벽장이나 궤짝 같은 이 누런 골방이 숨 막히고 비좁게 느껴졌다. 눈도 생각도 트인 곳을 청했다. 그는 모자를 움켜쥐고 밖으로 나갔다. 이번에는 계단에서 누구와 마주칠까 겁내지도 않았다. 그런 것은 잊고 있었다. 길은 V 대로를 지나 바실리옙스키 섬 쪽으로 잡았다. 마치 볼일이 있어 그리로 서두르는 사람 같았으나, 늘 그렇듯 길을 알아보지도 못한 채 혼자 속삭이고 소리 내어 제 자신과 이야기까지 하며 걸었고, 그것이 지나가는 이들을 몹시 놀라게 했다. 많은 이가 그를 취한 사람으로 여겼다.

작품 해설과 번역 노트

윤문 노트

이 회차의 고유 문제 — 풀헤리야의 목소리

분량의 절반이 편지 한 통이다. 이 편지는 정보를 전하는 글이 아니라 한 사람이 스스로를 설득하는 글이라, 그 설득이 무너지는 자리를 문장이 드러내야 한다. 어머니는 딸을 감싸면서 동시에 루신을 변호하고, 루신의 가장 추한 말(지참금 없는 처녀를 고르겠다는 대목)을 옮겨 적으면서 곧바로 세 겹의 변명을 덧댄다 — 「내가 쓴 것보다는 조금 더 부드럽게 말했다」, 「정확한 표현을 잊어버리고」, 「미리 작정하고 한 말이 아니라」. 이 덧댐을 정리하면 편지가 읽기는 편해지지만 인물이 사라진다. 원문의 군더더기를 군더더기인 채로 두었다.

  • 호칭 — 어머니는 아들을 로쟈로만 부르고 딸은 두냐와 두네치카를 오간다. 감정이 올라오는 자리에서 두네치카가 나온다. 원문의 갈림을 그대로 옮겼다.
  • 편지의 층위 — 편지 전체를 ' '로 묶었다. 단상체가 아니라 인용된 문서이므로 만연체를 유지하되, 본문 서술과 시각적으로 갈리도록 했다.
  • '말이 아직 행동은 아니에요' — 두냐가 어머니에게 한 대꾸를 어머니가 옮겨 적은 것이다. 편지 안의 인용이라 겹따옴표 대신 홑화살괄호로 받았다.
  • 육식 기간 · 성모 금식 기간 — 정교회 교회력의 시기 구분이라 혼례 날짜를 셈하는 근거가 된다. 풀어쓰지 않고 주로 뺐다.
  • 나스타시야의 말투 — 시골 아낙의 거친 반말이다. 라스콜니코프에게 존대를 쓰지 않는 유일한 인물이라, 이 집에서 그가 어떤 자리에 있는지가 말투로 드러난다. 상대 높임을 아예 없앴다.
  • '생각하는 일이오' — 원문에서 이 한마디 뒤에 나스타시야가 자지러지게 웃는다. 짧게 끊어 웃음이 터질 자리를 비워 두었다.

검수

  • 편지의 말줄임·반복·자기 변명을 정리하지 않았다.
  • 강조부사를 임의로 삭제하지 않았다.
  • 서술부 「그/그녀」 — 이 회차는 서술 분량 자체가 적고 라스콜니코프 단독 장면이 많아, 주어 생략으로 처리했다.

  • 연금 백이십 루블 — 관리 유족에게 나오는 한 해 연금. 당시 하급 관리 한 사람의 연봉에도 못 미치는 액수로, 두 모녀가 그것으로 살아 왔다는 뜻이다.
  • 7등 문관 — 관등표 14등급 중 7등. 마르멜라도프의 9등보다 두 계단 위이고, 문관으로서 세습 귀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 경계선에 가깝다. 루신이 제 직함을 앞세우는 까닭이다.
  • 가정교사 — 귀족 가정에 입주해 아이를 가르치던 자리. 교육받은 몰락 가문의 딸에게 거의 유일하게 열려 있던 직업이었고, 고용주 가정 안에서 신분이 모호해 이 소설에서처럼 위험에 놓이기 쉬웠다.
  • 미리 받은 백 루블 — 급료에서 다달이 떼는 조건으로 앞당겨 받은 돈. 갚기 전에는 그만둘 수 없으므로 사실상 사람을 묶어 두는 장치가 된다. 두냐가 여섯 주를 버텨야 했던 이유다.
  • 베르스타 — 약 1.07킬로미터. 두냐가 짐수레로 온 십칠 베르스타는 18킬로미터 남짓이고, 모녀가 철길까지 가야 하는 구십 베르스타는 96킬로미터쯤 된다.
  • 대문에 타르를 칠하는 일 — 러시아 농촌과 소도시의 관습으로, 그 집 처녀의 품행이 나쁘다고 공개적으로 낙인찍는 모욕이었다.
  • 로트 — 무게 단위로 약 12.8그램. 편지가 두 로트라는 것은 우편 요금이 그만큼 더 든다는 뜻이자, 어머니가 그만큼 길게 썼다는 뜻이다.
  • 육식 기간 · 성모 금식 기간 — 정교회 교회력에서 금식기가 아닌 때를 육식 기간이라 하고, 8월 1일부터 15일까지를 성모 안식 금식기라 한다. 금식기에는 혼례를 올리지 않으므로, 루신은 그 사이에 식을 치르거나 금식기가 끝나기를 기다려야 한다.
  • 상원 — 제정 러시아의 최고 사법 기관. 루신이 거기에 걸린 사건을 맡고 있다는 것은 그의 변호사 일이 제법 무게가 있다는 표시다.
  • 삼등칸 — 페테르부르크·모스크바 간 철도의 가장 싼 등급. 모녀의 형편을 말없이 보여 준다.
  • 바실리옙스키 섬 — 네바 강 하구의 큰 섬. 라스콜니코프가 사는 센나야 일대에서 걸어가려면 한참이다. 목적 없이 걷고 있다는 표시다.
  • 요즘 유행하는 새 불신 — 1860년대 러시아 청년층에 퍼진 무신론과 실증주의를 가리킨다. 어머니가 아들에게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