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 / 제2에필로그 / 제5장
《전쟁과 평화》 · 제2에필로그

제5장

《전쟁과 평화》 제2에필로그 5장 삽화

민족들의 삶은 소수 인물의 삶에 담겨 있지 않다. 그 사람들과 민족들 사이의 연관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연관이 한 민중의 집단 의지를 특정한 역사적 인물들에게 넘기는 데 기반을 둔다는 이론은 역사의 경험으로 입증되지 않은 가설이다.

민중의 집단 의지가 역사적 인물들에게 넘어간다는 이론은 법학의 영역에서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고 그 목적에 필수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에 적용하면 혁명·정복·내전이 일어나는 순간, 곧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이 이론이 논박할 수 없는 듯 보이는 까닭은 민중의 의지가 넘어가는 행위를 검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일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누가 일을 주도하든, 이론은 집단 의지가 그 사람에게 넘어갔기 때문에 그가 지도자가 되었다고 언제나 말할 수 있다.

이 이론이 역사적 질문에 내놓는 답은 소 떼의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들판의 구역마다 목초의 질이 다르다는 사실이나 목동이 몰고 있다는 사실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우연히 맨 앞에 있는 소 때문에 떼가 그 방향으로 간다고 보는 사람의 답과 같다.

“앞의 소가 이끌고 나머지 모든 소의 집단 의지가 그 지도자에게 맡겨졌기 때문에 소 떼가 그 방향으로 간다.” 민중의 의지가 무조건 넘어간다고 가정하는 첫 번째 부류의 역사가들이 하는 말이다.

“소 떼를 이끄는 소가 바뀐다면, 이는 앞장선 소가 온 소 떼가 선택한 방향으로 이끄느냐 아니냐에 따라 모든 소의 집단 의지가 한 지도자에게서 다른 지도자에게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알려졌다고 여기는 조건 아래 민중의 집단 의지가 통치자에게 위임된다고 가정하는 역사가들의 답은 이와 같다. 이런 관찰 방법에서는 관찰자 자신이 선호하는 방향에 영향을 받아, 소 떼의 방향이 바뀌면서 더는 앞쪽이 아니라 옆이나 심지어 뒤에 있는 소들을 지도자로 여기는 일이 흔히 생긴다.

“앞쪽의 소들이 끊임없이 바뀌고 온 소 떼의 방향도 계속 달라진다면, 이는 정해진 방향을 따르려고 소들이 우리의 관심을 끈 소들에게 의지를 넘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 떼의 움직임을 연구하려면 떼의 사방에서 움직이는 눈에 띄는 소들을 모두 지켜보아야 한다.” 군주에서 언론인에 이르는 모든 역사적 인물을 그 시대의 표현으로 보는 세 번째 부류의 역사가들은 이렇게 말한다.

민중의 의지가 역사적 인물들에게 넘어간다는 이론은 질문을 다른 말로 바꾸어 되풀이한 것에 불과하다.

역사적 사건은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가? 권력 때문이다. 권력이란 무엇인가? 한 사람에게 넘어간 민중의 집단 의지다. 어떤 조건에서 민중의 의지가 한 사람에게 위임되는가? 그 사람이 온 민중의 의지를 표현한다는 조건에서다. 그러므로 권력은 권력이다. 다시 말해 권력은 우리가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말이다.

인간 지식의 영역이 추상적 추론에 한정된다면, 법학이 제시하는 ‘권력’의 설명을 비판한 뒤 인류는 권력이 단지 말일 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추상적 추론 외에도 자기 생각을 검증하는 경험이 있다. 경험은 권력이 단순한 말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현상임을 알려 준다.

인간의 집단 활동을 서술할 때 권력 개념을 쓰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고, 권력의 존재는 역사와 동시대 사건에 대한 관찰로 모두 입증된다.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그 사람의 의지 또는 그 사람들의 의지로 사건이 일어난 듯 보이는 한 사람 또는 여러 사람이 나타난다. 나폴레옹 3세가 법령을 내리면 프랑스인들이 멕시코로 간다. 프로이센 왕과 비스마르크가 법령을 내리면 군대가 보헤미아로 들어간다. 나폴레옹 1세가 법령을 내리면 군대가 러시아로 들어간다. 알렉산드르 1세가 명령하면 프랑스인들이 부르봉 왕가에 복종한다. 경험은 무슨 사건이 일어나든 그것을 명령한 한 사람 또는 여러 사람의 의지와 언제나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역사가들은 신이 인간사에 관여한다고 인정하던 옛 습관에 따라 권력을 부여받은 누군가의 의지 표현에서 사건의 원인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이 가정은 이성으로도 경험으로도 입증되지 않는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한 사람의 의지 표현, 곧 그의 말은 전쟁이나 혁명 같은 사건으로 나타난 전체 활동의 일부일 뿐이다. 따라서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힘, 곧 기적을 가정하지 않고는 말이 수백만 명의 움직임을 직접 일으키는 원인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 말이 사건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인정하더라도, 역사는 역사적 인물들의 의지 표현이 대부분 아무런 결과도 낳지 않음을 보여 준다. 곧 그들의 명령은 흔히 실행되지 않으며, 때로는 명령한 것과 정반대의 일이 일어난다.

신이 인간사에 관여함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권력’을 사건의 원인으로 볼 수 없다.

경험의 관점에서 권력이란 누군가의 의지 표현과 다른 사람들이 그 의지를 실행하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일 뿐이다.

그 관계의 조건을 설명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의지 표현이라는 개념을 신이 아니라 인간과 관련지어 확립해야 한다.

고대 역사가 말하듯 신이 명령하고 자신의 의지를 표현한다면, 신은 사건의 지배를 받지 않으므로 그 의지 표현은 시간과 무관하고 어떤 것에서도 비롯되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 속에서 서로 관계를 맺으며 행동하는 인간들의 의지를 표현하는 명령을 말할 때, 명령과 사건의 연관을 설명하려면 다음 두 가지를 복원해야 한다. 첫째, 일어나는 모든 일의 조건, 곧 사건과 명령하는 사람 모두가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움직인다는 점이다. 둘째, 명령하는 사람과 명령을 실행하는 사람들 사이에 필연적인 연관이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