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거장의 삶
영지의 작가와 셋집의 작가

톨스토이는 1828년 툴라 지방의 귀족 영지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태어났다. 그는 볼콘스키 공작가와 톨스토이 백작가의 혈통을 물려받았지만 두 살 무렵 어머니를, 아홉 살 무렵 아버지를 잃었다. 어머니를 기억하지 못했던 톨스토이는 평생 그를 순수하고 영적인 존재로 상상했고, 그 기억은 《전쟁과 평화》의 마리야 공작 영애 같은 인물에도 스며들었다. 야스나야 폴랴나는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었다. 톨스토이가 태어나 60년 이상 생활하고 작품을 쓰며 농민과 교육을 실험한 장소였고, 마지막에는 묻힌 곳이었다. 어린 시절의 가족사, 귀족 저택의 질서, 유모와 가정교사, 프랑스어와 러시아어가 뒤섞인 생활은 훗날 로스토프가와 볼콘스키가를 창조하는 기억의 저장고가 되었다.
청년 톨스토이는 대학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영지 경영을 시도하다가 군에 입대해 카프카스와 크림전쟁을 경험했다. 그는 전쟁을 영웅의 결단이나 작전도의 선으로 보지 않고, 공포와 허영, 우연과 피로에 휩쓸리는 수많은 개인의 행위로 보게 되었다. 귀환한 뒤에는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농민 자녀를 위한 학교를 운영하고 교육 잡지까지 발간했다. 이 경험은 ‘위에서 백성을 계몽한다’는 태도와, 실제 농민의 생활에서 배우려는 충동 사이의 긴장을 낳았다. 영주이면서 민중의 삶을 동경했고, 부와 명성을 누리면서도 사유재산과 제도 종교를 비판했던 모순은 그의 생애 끝까지 계속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출발점은 달랐다. 그는 모스크바의 자선병원에서 의사로 일하던 아버지의 가족으로 태어나 도시의 환자와 빈민, 하급 관리들의 삶을 가까이 보았다. 군사공학학교를 졸업했지만 문학을 택했고, 첫 소설 《가난한 사람들》로 러시아 문단에 갑작스럽게 등장했다. 비평가 벨린스키와 시인 네크라소프는 가난한 하급 관리가 자기 목소리로 말하게 한 젊은 작가를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그러나 이 성공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급진적 지식인 모임과 관련되어 체포되었고, 사형 집행 직전 감형을 통고받은 뒤 시베리아 유형과 군 복무를 겪었다. 이 체험은 인간을 관념의 표본이 아니라 죽음 직전에도 증오하고 사랑하며 신을 부정하고 찾는 모순된 존재로 바라보게 했다.
유형에서 돌아온 도스토예프스키의 삶은 셋집, 잡지, 빚, 질병과 마감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생계를 위해 연재소설을 써야 했으며, 도박과 채무 때문에 유럽을 떠돌기도 했다. 1866년 젊은 속기사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에게 《도박꾼》을 구술하면서 마감을 가까스로 맞추었고, 두 사람은 이듬해 결혼했다. 안나는 원고를 받아 적는 사람을 넘어 가계와 저작권, 출판을 관리하는 동반자가 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페테르부르크 쿠즈네치니 골목의 아파트는 1846년 《분신》을 쓰던 초기와 1878년 이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완성한 말년을 이어 주는 공간이었다.
두 사람의 차이는 생활공간에서 선명해진다. 톨스토이의 기본 단위는 영지였다. 넓은 토지, 대가족, 농민 공동체, 계절의 순환이 그의 시야를 수평으로 확장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기본 단위는 셋집의 방이었다. 좁은 복도, 밀린 집세, 벽 너머의 소음, 법정과 선술집, 출판 마감이 인간을 극단적인 순간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결국 같은 질문에 도달했다.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고통은 인간을 파괴하는가 구원하는가, 개인의 자유는 타인에 대한 책임과 어떻게 결합되는가. 톨스토이는 이 질문을 삶의 넓이 속에서 물었고, 도스토예프스키는 삶의 가장 좁고 뜨거운 방 안에서 물었다.